#135화, 모든 것을 빼앗겠다.
님프 궁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머리가 아팠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머리는 끝없이 굴러갔다.
시슬리가 본인 입으로 말했다. 자신이 로웬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다고.
너무 순순히 토해낸 터라 순식간에 맥이 빠져버릴 정도로, 하지만 뒤이어 따라붙은 말이 흐릿해졌던 정신을 꽉 붙잡았다.
‘각하께서는 저를 보호해주실 수 있어요. 저를 도와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저를 도와주신다면, 모든 걸 말씀드릴게요. 그걸 원하시는 거잖아요.’
모든 걸 말해주겠다고?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그녀의 말을 덜컥 믿어도 되는 걸까. 실마리를 찾으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꼬여버렸다. 이카니엘 대공을 의심했지만, 아니었다. 이카니엘 대공이 아니라 그의 비서인 시슬리라니….
‘내일 자정, 님프 궁으로 제가 찾아갈게요. 그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먼저 말해주려는 걸까. 원하는 것이 내가 그녀를 보호해주는 것이라면, 내가 이야기만 듣고 도와주지 않는 경우는 생각하지 못한 건가? 아니야, 그럴 리는 없다, 그럼 도대체 왜? 만약 로웬을 조종해, 안케도니아 제국을 침공하게 만들고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키게 했다면 숨겨야 할 일이 아닌가?
이건 국제분쟁을 넘어서, 제국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한 제국의 기사단장을 마법으로 조종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침략 작전을 위해 동의 없이 진행한 셈이 되니까.
“대공 각하.”
머리가 아파 잠시 서서 이마를 문지르고 있던 찰나,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루아 남작부인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몸짓이나 목소리나. 어디 아픈 건가? 목소리가 왜 낮아졌지?
“저에요, 켈빈 부인.”
“!”
“아메님께서 마법으로 외향을 바꿔주셨어요. 내일 연회에 참석할 수 있게요.”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구나.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목소리나 몸짓만 좀 더 루아 남작부인인 척 한다면 더 완벽할 듯싶었다. 혹시 몰라 미리 연회 하루 전에 루아 남작부인인 척 샤를로테의 옆에서 시중을 듣겠다고 자처했었지.
“루아 남작부인은 어디에 있죠?”
“가족들과 함께 제가 머물던 별장으로 이동 중이에요. 라벨도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래요, 그러는 편이 더 낫겠죠……드디어 내일이군요, 부인.”
내일이라는 말에 켈빈 부인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나 못지않게 원한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순간에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의 인생까지 망가져 버렸으니, 이해하면서도 측은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무엇이 말이죠?”
“독을 마시는 거요, 지금이라도 다른 대책을….”
“아니요, 나는 독을 마실 거예요. 그래야 해요.”
독을 마신다. 그리고 그 순간 켈빈 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부터 복수가 시작되는 셈이었다. 내가 독을 마시고 피를 토하는 것은 복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물론 칼라일이 오늘 아침까지도 계속 반대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샤를로테를 확실하게 끌어내릴 수 있으니까.
“칼라일은 어디에 있나요?”
“칼라일님은 지금 급한 사안이 생겼다고 황궁으로 가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안 되려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켈빈 부인을 꽉 끌어안았다. 샤를로테에게 갈 준비를 마친 켈빈 부인은 어쩐지 처형당하러 가는 사형수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조장하고 타국에서 주최해준 연회를 망치는 일은 과도하다 여길지 몰랐다. 하지만 누가 켈빈 부인을 욕할 수 있을까. 모든 죄는 샤를로테와 페르소나였다.
켈빈 부인이 황궁으로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칼라일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도착했을 쯤에는 칼라일은 거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로젤리아.”
“오늘도 멋지네, 칼라일.”
피곤했다. 칼라일을 보자 그를 끌어안고 침대에 눕고 싶은 욕망이 강해졌다. 그는 마력연구관이니 얼른 가봐야 했지만, 준비도 다한 상태에서 가지 말라고 하기도 뭐했다.
“로젤리아.”
“응?”
“무슨 일 있었어?”
내 얼굴이 많이 안 좋았던 것인지, 칼라일은 내 뺨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니 더욱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오늘은 정말 함께 있고 싶었다. 오늘만이라도 좋으니,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한 채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일이 있었는데….”
“!”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급한 사안 아니면…….”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라일은 나를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침대에 나를 눕혔다.
“칼라일?”
칼라일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눕힌 상태에서 하나씩 옷을 벗었다. 마력연구관에게만 주어지는 브로치와 새하얀 제복 겉옷을 벗더니 아예 셔츠와 바지만 입은 상태에서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평소와 같으면 숨 막힌다며 밀어냈겠지만, 오늘은 좋기만 했다. 손을 뻗어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새하얀 끝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오늘 안 가도 괜찮겠어?”
“응, 안 갈 거야. 네 옆에 있을 테니까, 마음 놓고 쉬어.”
끈을 잡아당기자 금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여전히 싱그러운 향. 느리게 호흡하며 칼라일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을 잠깐 감았을 뿐인데 잠에 든 상태였다. 살짝 고개를 들자 칼라일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벌써 깼어? 더 자도 괜찮아. 피곤해 보이던데.”
침대 바로 옆에는 무수히 많은 서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정말 아직 피곤한 건지,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나는 말없이 칼라일의 손을 감싸 쥔 채 내 뺨에 가져다댔다. 살갗 위로 퍼지는 온기에 몽롱해질 때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슬리 양이었어.”
“응?”
“로웬에게 세뇌 마법을 건 사람.”
내 뺨을 쓰다듬던 손길이 얼어붙은 것이 느껴졌다.
“시슬리라면, 저번에…….”
“응, 그 여인. 이카니엘 대공의 총애를 많이 받는 비서래. 그 여자가 직접 말했어. 로웬에게 세뇌마법을 걸었다고.”
칼라일은 다시 말없이 내 말을 쓰다듬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마리를 찾았지만. 오히려 더 꼬여버린 느낌. 그 여자의 말을 정말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자세한 건 내일 자정, 님프 궁으로 직접 찾아온다고 말했어.”
“……만날 생각이야?”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와 관련된 일이니까.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은 채 칼라일이 입을 열기까지를 기다렸다. 꽤나 혼란스러워 보이던 그는 내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여전히 말은 없었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나는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만날지 말지의 여부는 네가 결정해. 다만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칼라일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에게 입을 맞췄다.
“내 가문과 관련된 일이지만, 나는, 네가 가장 소중해.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모든 탓을 네 탓으로 돌리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칼라일은 여전히 나를 챙겼다. 가문이 멸문하게 된 이유를 알아낼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나를 챙기다니.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다니. 어떻게 그래, 도대체, 너는….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에는 슬픔이 묻어나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그날의 참사는 없었다.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사랑스럽고 좋음에도, 일부러 내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에 씁쓸했다.
일부러 내 앞에서는 헬리오도르 가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이따금씩 죄책감에 눌리니까, 그걸 알아차린 칼라일은 되도록 그날의 참사에 대해 말을 줄였다.
로웬이 그의 가족을 모두 죽였는데, 나를 배려하다니.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가끔씩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칼라일이 나를 미워하지 않아서. 나를 배려해줘서.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시슬리 양을 만날래. 만나서, 모든 것을 들어야겠어.”
***
“내일이군요, 폐하.”
샤를로테는 배를 쓰다듬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아무도 오지 않는 곳으로 산책을 온 것인데, 어느샌가 이카니엘 대공이 옆으로 와 있었다. 이것도 마법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카니엘 대공은 끝없이 계속 따라왔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무슨 기분을 말하는 거죠?”
“그렇게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던 장애물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장애물.
“폐하와 폐하의 아기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들이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날인데, 즐겁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샤를로테의 걸음이 멈췄다. 그래, 장애물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언제 신분이 노출될지, 거짓말이 들통나게 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는 칼라일을 죽일 생각이었지만, 루아 남작부인에게 지시를 내리기 직전, 마음을 바꿨다.
칼라일이 아니다, 로젤리아를 죽여야 한다. 칼라일이 마력연구관이라 하더라도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은 로젤리아였다. 로젤리아를 죽이는 게 거짓말을 덮는데 더 효과적이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걱정되는 건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샤를로테는 다시 의자에 앉아 배를 쓰다듬었다.
“그래요. 즐거워야죠. 대공이 약속을 잘 지켜준다면.”
아이를 위해 또다시 독살을 주도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 황후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그러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약속대로 칼라일이 로젤리아의 독을 치료하지 못하게 마법을 억제하고, 내 거짓말을 도와 독살을 성공적으로 도와주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폐하의 마력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필요 없는 마력. 전부 가져가든지 해요. 대신 약속, 확실히 지켜요. 나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모든 거짓을 덮겠다고 한 약속.”
“그럼요, 폐하. 그렇게나 원하시는 권력…….”
이카니엘 대공은 짙은 미소로 화답했다.
“확실하게 폐하의 손에 쥐어드리겠습니다.”
그 미소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딱 한 번이면 되는 일이었다. 이카니엘 대공과 딱 한 번만 손을 잡는다면, 그래서 로젤리아를 확실하게 없앨 수 있다면……로젤리아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면!
‘아가, 걱정하지 마. 너는 나처럼 되게 만들지 않을 거야.’
로젤리아,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위협해왔어. 이제는 너도 똑같은 처지가 되어보는 거야. 나와 달리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태어난 네가, 죽음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 주겠어. 탄식을 내뱉으며 부채로 가린 입꼬리를 끌어올려줄게.
네가 독을 먹고 쓰러지면, 칼라일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으며 울부짖을까.
미약한 통증이 퍼져나가는 배를 감싸 안은 샤를로테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던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퍼트렸다.
이카니엘 대공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굳건하게 믿은 채.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음날. 연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