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34화 (134/170)

#134화, 뒤얽힌 사실

이카니엘 대공의 호위는 매 연회마다 해왔던 일이었다.

적국이라고 하대하면 그건 곧 국제적 분쟁으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잘 알 텐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걸까. 로웬은 칼날을 손질하다가 문득 심장 부근이 저릿한 것을 느꼈다.

통증은 약해졌지만, 종종 이렇게 저릿할 때가 있었다. 로웬은 가슴 부근을 꾹꾹 누르다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 의해 고개를 들었다.

“로웬님!”

“릴리 양, 늦었군요.”

통증으로 인해 찌푸렸던 로웬이 릴리를 보자 순식간에 환해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릴리를 위해 특별히 드레스 주문했었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디자이너에게 부탁한 드레스였다……일부러 자신이 입을 제복과 잘 매치 되는 디자인으로 부탁하기도 했고. 잘 어울릴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는데, 이내 정말 쓸모없는 고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웬님?”

아름다웠다. 분명 생각했던 모습은, 사랑스럽고 귀여운 그런……그런 걸 생각했는데? 로웬은 잠시 주춤거리며 입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터져버릴 것처럼 뛰었다. 칼라일이 왜 자신의 누이를 볼 때마다 얼굴을 붉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어울려서……다행입니다.”

겨우 한마디를 내뱉은 로웬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쭈뼛쭈뼛 다가온 릴리를 마주한 순간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른쪽 눈 밑 아래로 생긴 흉터. 멀리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게 알겠다. 이건 치료를 해도 지워지지 않을 흉터였다. 아마 온갖 좋은 약과 의사를 데려와도 지워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겨우 지우더라도 흐릿하게 흔적이 남겠지.

로웬은 조심히 손을 뻗어 릴리의 뺨을 더듬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 고운 얼굴에 상처를 냈다. 그것도 검으로, 사람을 지키겠다 맹세한 검을, 릴리에게….

“로웬님.”

“!”

“설마,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니죠?”

로웬은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아직도, 라니. 어떻게 자책을 안 할 수가 있을까. 평생을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건데. 로웬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릴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로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들어올렸다.

“다들 로웬님을 냉혈한에 검밖에 모르는 잔혹한 사람이라 그러시는 거 보면 정말 속상해요. 우리 로웬님이 얼마나 여리고 귀여우신 분인데.”

……응? 여리고 귀여워? 누가, 내가?

“또 셔츠를 풀어헤치고 계시네요.”

“네?”

“만져달라는 건가요?”

“네…?”

로웬은 그제야 자신의 셔츠 단추가 툭툭 풀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를 더듬는 릴리의 손길을 느낀 로웬은 조용히 단추를 잠갔다.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릴리를 보며 로웬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릴리 양은 정말……제가 자책을 할 틈을 안 주시는군요.”

“자책할 시간에 저를 좀 더 좋아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신 거죠?”

“로웬님의 고백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부터요.”

릴리가 대답 대신 살짝 발꿈치를 들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자 로웬은 다시 릴리의 어깨를 꾹 눌렀다.

“그,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제가 티도 안 내고 홀로 짝사랑했던 시간을 계산해보자면 당장 내일 결혼식 올려도 모자라는데요.”

분명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처음에는 막 생쥐 같고,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물론 좋기야 하지만. 로웬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릴리를 끌어안았다. 좋았다. 어쩌다가 해버린 고백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짝사랑이고, 이뤄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를 언제부터 짝사랑하신 겁니까?”

“로웬님께서 쥐새끼라고 하셨을 때부터요.”

릴리가 싱긋, 웃으면서 발랄하게 말하자 로웬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그건 아기 쥐를 말 하려다가 잘못 말해서…….”

“아기 쥐가 도대체 뭘 말하는 거예요?”

로웬은 잠시 손바닥을 펼치더니 손끝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예전에 사절단 파견을 갔을 때 만났던 공작가에서 본 쥐……어린 공녀가 손 위에 올려놓고 무슨 씨앗 같은 것을 주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생각나서….”

“혹시 햄스터를 말하는 건가요?”

“그게 햄스터입니까? 아기 쥐가 아니라?”

“햄스터는 다 커도 손바닥보다 작은데요.”

“만지면 터질 것처럼 작은 게 다 큰 거라고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던 로웬은 손을 살짝 오므렸다.

“어쨌든 햄스터 같아서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그래서 싫어요?”

“사랑스럽습니다.”

로웬은 잠시 머뭇거리다 릴리의 뺨에 조심히 입을 맞췄다. 릴리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로웬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눈동자와 똑같은 붉은색,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표정을 유지해도 금방 이렇게 얼굴이 빨개져 버리니….

릴리가 눈을 빛내며 로웬의 허리를 끌어안은 순간, 노크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 퍼졌다. 로웬은 자신의 침실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끔 지시했다. 그런데 누가?

“누구지? 아무도 오지 말라고 지시했을 텐데?”

“이카니엘 대공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각하께서 배정받을 호위기사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지금 당장 가주실 수 있을까요.”

이카니엘 대공의 기사들인가. 로웬은 릴리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어 주고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베논 제국의 지시라면 따르는 게 좋았다. 특히나 이렇게 우호적으로 나올 때는, 언제 태도를 뒤집을지 모르니 더 주의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릴리가 먼저 앞으로 가 문을 막았다.

“릴리 양?”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로웬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릴리에게서 낮에 화를 내던 로젤리아를 떠올렸다. 로젤리아도 분명 릴리처럼 베논 제국과 접촉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지 않았나. 도대체 둘 다 왜 그러는 거지?

“로웬 단장님. 나오시죠.”

밖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릴리는 로웬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로웬은 잠시 망설이며 릴리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무리 릴리여도 지금은 가야 했다. 특히 만약 호위 기사들이 이카니엘 대공에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거나,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다른 제국이면 모를까 베논 제국이니…….

“다녀올게요, 별일 아닌 듯하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줘요.”

“로웬님….”

“금방 올게요. 정말, 기다려줄 수 있죠?”

로웬은 그렇게 릴리를 안심시킨 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따라 이카니엘 대공이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

물론 릴리를 안심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로웬 뿐이었다.

릴리는 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자,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릴리도 이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베논 제국과 로웬이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기사단장이기에 일부러 적극적으로 붙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침묵과도 같은 십 분이 흐르자, 릴리는 과거에 한 번 겪었던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은, 자신의 언니가 그 망할 백작 가문에 팔려가듯 시집가던 날과 비슷했다.

그 순간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민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붙잡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니면 그의 앞에서 쓰러지거나 계단에서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로웬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릴리는 예상외 인물과 부딪혔다.

“괜찮으십니까?”

릴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루치아노를 올려다보았다.

“로젤리아님께서 간만에 같이 식사를 하셨으면 한다고 하셔서……로웬님은 어디로 가셨죠?”

“로웬님은……이카니엘 대공 각하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순간 루치아노는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 이카니엘 대공? 작게 중얼거린 루치아노는 다급하게 릴리에게 물었다.

“언제 갔습니까? 왜 간 거죠?”

“10분 정도 전에 기사들이 찾아왔고, 각하께서 배정받은 호위기사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역시 뭔가 잘못된 건가요?”

루치아노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통증을 호소하지는 않았습니까?”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로웬님이 돌아오자마자 저에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음에는 최대한 베논 제국의 기사들과 마주치지 않도록…해주셨으면 합니다. 로웬님이 릴리님의 말은 잘 들으니까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역시 가지 못하게 막아야 했구나. 하지만 왜?

릴리는 다급하게 말하는 루치아노의 옷깃을 꽉 쥔 채 물었다. 왜 막아야 하는지 알아야 대처할 수 있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 막을 수가 없었다. 괜히 막았다가 그의 기사단장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정말 싫었다. 머뭇거리며 알려드릴 수 없다고 말하는 루치아노를 릴리는 더 꽉 붙잡았다.

“알려주세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

“제가 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칼라일님이 로젤리아님과 처음 마주쳤을 때 왜 그렇게 다쳤는지, 샤를로테를 볼 때면 다친 부위를 꾹 누르는 행동. 하지만 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샤를로테와 꼭 닮은 외향을 하고 나타났을 때도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릴리는 루치아노를 방으로 끌어당기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로웬님이 출전한 적 없는 군사지원에 대해 말하다가 크게 싸워도 저는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고, 로젤리아님이 황궁에 보관된 기사 보고서를 가져와 복사본과 맞춰볼 때도, 저는 단지 로웬님과 베논 제국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정도만 알고 넘어갔습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 하고요.”

“릴리님.”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겠습니다. 로웬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루치아노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이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자 보랏빛 눈동자는 금빛으로 변하고, 머리카락은 눈이 쌓이듯 새하얀 은발로 변했다. 릴리는 말없이 샤를로테와 꼭 닮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을 때는 잘 모르겠더니, 이렇게 원래 모습을 보니까 그가 샤를로테와 쌍둥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는 안케도니아 황족이지만 황실에서 버려졌고, 저를 칼라일님께서 저를 거두었습니다.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당하는 순간까지 헬리오도르 가문의 일원으로 살았죠.”

“!”

“군사는 산 깊숙이 숨겨져 있던 헬리오도르 저택까지 왔고, 저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군사들을 홀로 막았습니다. 그리고 보았죠. 저택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사람들을요.”

릴리는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뭐지, 이 기분 나쁜 감각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금빛 머리카락에 은빛 눈동자라면 아랑곳하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하던…….”

설마.

“로웬님의 모습이 말입니다.”

……누가, 누가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로웬이? 그가? 아니야, 그일 리 없어. 로웬이 그런 짓을 했다고? 헬리오도르 가문을……잠깐, 그럼 칼라일은? 칼라일의 친척들을 로웬이 죽였다는 소리야?

“그 일 때문에 당신을 인질로 잡아 협박을……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내다 보니 뜻밖의 사실을 알았습니다.”

“뜻밖의 사실?”

“로웬님이 세뇌마법으로 조종당해, 그런 학살을 벌인 것을요.”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두려움이 온몸으로 퍼졌다. 루치아노는 그런 릴리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세뇌마법을 걸어서 로웬님을 조종한 사람이, 베논 제국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