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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133화 (133/170)

#133화, 실마리

“저는 좋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칼라일의 귓가 근처에 머물렀다. 칼라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그래’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다른 대답을 바랐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기에 변하지 않을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

“샤를로테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저 목소리가 처절하다거나 미약하게 흔들렸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루치아노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샤를로테를 끌어내린다는 것은. 루치아노의 쌍둥이 누나를,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것과 같았다. 루치아노의 유일한 가족인 샤를로테는 온갖 악행이 다 밝혀져 모두에게 질타 받으며 결국 죽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겠지.

그렇기에 루치아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루치아노가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귀를 막고 눈을 가려서라도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너는 기어코 보려고 할 게 뻔했다. 칼라일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독병을 툭툭 두드렸다.

루아 남작부인이 두고 간 독병. 그리고 샤를로테의 지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루치아노.”

“켈빈 부인이 루아 남작부인으로 위장하는 것에, 저는 찬성합니다.”

루치아노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한숨을 토해내며 독병을 꽉 움켜쥐었다.

1시간 전, 루아 남작부인과 켈빈 부인이 님프 궁으로 왔다.

켈빈 부인은 로웬의 도움으로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님프 궁으로 몸을 숨겼다. 현재까지 켈빈 부인이 숨어있기 가장 좋은 곳은 님프 궁이었고, 루아 남작부인을 만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루아 남작부인은 켈빈 부인을 죽이려 하려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으니 만나게 해주자는 게 로젤리아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만나게 해줬는데……루아 남작부인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로젤리아를 독살하려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니. 내가 아닌, 로젤리아.

칼라일은 어떻게든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샤를로테가 독살을 하려는 것을 알고 있던 상황이었고, 칼라일은 그 대상은 자신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로젤리아보다 자신을 죽이는 게 더 이득일 테니까. 그런데 로젤리아를 죽이라고 했다니.

이미 샤를로테는 독으로 로젤리아의 아이를 죽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로젤리아를?

마음 같아서는 로젤리아의 잔이 아니라 자신의 잔에 독을 넣고 싶었다. 그러나 샤를로테는 곧바로 루아 남작부인이 그녀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게 뻔했다.

선택권은 없었다. 독을 마시는 건, 로젤리아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루아 남작부인을 켈빈 부인으로 위장시키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루아 남작부인이 로젤리아의 잔에 독을 넣게 한 뒤, 샤를로테는 그녀를 잡아 어딘가에 가둬놓을 가능성이 컸다. 상을 내릴 리가 없다. 아니면 루아 남작부인의 딸 라비란느를 납치하게끔 손을 쓸 수도 있지.

그렇다면 루아 남작부인을 애초에 딸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루치아노를 루아 남작부인과 함께 있게끔 하려고 했다.

“샤를로테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간 후 루치아노가 꺼낸 말만 아니었다면.

‘몰락을 지켜보고 싶다고?’

루치아노는 종종 칼라일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칼라일도 마찬가지였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 정말로 샤를로테에게 애정이 남아있는지 없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샤를로테를 대하는 루치아노의 행동을 보자면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럼 결혼식 때는 왜 운걸까.’

무표정하게 울던 루치아노.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샤를로테가 몰락하는 모습만큼은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본인 입으로 몰락을 지켜보겠다고 말하니….

“루치아노, 샤를로테는 너에게 유일한 혈육이야.”

“….”

“샤를로테에 대한 나의 원한은 무척이나 깊어. 그래서 나는 아마도 샤를로테를 몰락시킬 수 있는 기회가 눈앞으로 다가오면, 잡을 거야.”

칼라일은 잠시 말을 멈춘 채 루치아노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칼라일님.”

“아니, 네가 보지 않았으면 해.”

“샤를로테를 혈육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루치아노.”

“그러니 저는 그 자리에서 샤를로테의 몰락을….”

“왜 보려고 하는 건데?”

그 순간 루치아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샤를로테가 너를 내쫓아서?”

“….”

“너를 동생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

“아니면 나와 로젤리아에게 미안해서?”

루치아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한 건지, 아니면 그저 하지 않은 건지.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숨 막히는 침묵이 방안을 가득 메웠을 때 즈음이었다. 루치아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지만, 보랏빛 눈동자는 금빛으로 변했고, 밤하늘처럼 까맣던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마법이 풀린 것을 루치아노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샤를로테의 결혼식에서 울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처럼.

“칼라일님이 저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신 것을 압니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저를 정말 가족으로 생각해주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제 이름의 옆에 헬리오도르의 성을 붙여주신 것도 기억합니다. 그러니….”

말라붙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흐릿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를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라면, 샤를로테의 몰락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세요.”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

시슬리가 나를 안내한 곳은 이카니엘 대공에게 내주었던 궁이었다. 함께 머무는 건가 싶어 궁 안으로 들어선 순간, 불쾌하고 소름끼치는 감각이 온몸으로 덮쳐오기 시작했다.

놀라서 주춤거리자 말없이 앞서가던 시슬리의 걸음이 멈췄다. 시슬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쩐지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방은 약간 어두웠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막 낡고 폐허 같은 곳은 아니었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가구들이 가득했고, 총애받는 비서라는 말이 맞았는지, 한쪽 구석에는 선물이 가득했다. 전부 이카니엘 대공이 준 건가?

하지만 어쩐지……감옥, 더 정확히는 호화스럽게 꾸민 새장처럼 느껴졌다.

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검은 마법진이 문 위에 새겨지고 있었다. 마법으로 문을 막은 건가? 시슬리의 손끝에서 떠다니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을 경계하며 손을 뒤로 숨겼다.

여차하면 마법을 써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하지만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시슬리는 전혀 예상 밖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그녀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은 채 무표정을 유지하며 시슬리에게 다가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내가 이곳에 차를 마시러 온 것은 시슬리 양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

“로웬 가넷을 이카니엘 대공에게 보내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이죠?”

시슬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뭔가를 알고 있으니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거겠지.

“시슬리 양. 다른 일이면 모를까, 혈육과 관련된 일이니 알아야겠습니다.”

더 강하게 몰아붙이자 시슬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른 침을 삼켰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는 건가? 도대체 뭐 길래? 그런데 그 순간 시슬리는 몸을 흠칫거리며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흐릿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발걸음 소리가 이내 들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얼어붙은 시슬리의 모습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지금 문 밖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차에 관심이 많으시다니, 뜻밖이군요.”

“네?”

“베논 제국은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지형이라 차를 접할 기회가 적을 텐데 말입니다.”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시슬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베논 제국은 광활한 영지에 비해 식물이 잘 자라지 않죠. 그래서 사절단 대표로 갔을 시절 접한 차는, 저에게 정말 큰 충격을 주었답니다.”

“그렇군요.”

“차에 박식하다 하시기에 이리 초대를 했답니다, 각하.”

시슬리는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떨림이 누그러진 듯했다.

“시슬리님.”

그때 문고리가 거칠게 철컥거리더니 문밖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슬리의 움직임도 멈췄다.

“안에 가넷 대공 각하와 함께 계신 겁니까.”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건가? 그 목소리는 마치 죄수를 감시하는 감시관의 말투와 흡사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무례한 어투로 시슬리가 차갑게 맞받아쳤다.

“지금 겨우 그런 질문을 하려고 노크도 없이 들어오려 한 건가? 내가 연구 도중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시슬리는 아까와 달리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로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각하도 계신 상황에서 어찌 그리 무례한 태도를 취하는 거지?”

“아, 저는 시슬리님께서….”

“각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시슬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슬리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쥐며 기사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지 마세요. 시슬리 양, 기사도 정신이 투철해서 벌어진 일인 듯한데.”

“죄송합니다, 시슬리님. 저는 다른 마력이 느껴져서….”

“이카니엘 대공 본인이 선별한 기사들이라 하던데 어찌 이리 무례하고 천박한지. 당장 꺼져라. 네 목 위에 있는 것을 거두기 전에.”

시슬리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기사의 말을 끊어내자 기사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복도 끝으로 기사가 사라진 순간, 시슬리는 문을 굳게 닫고는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뺨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에 만남을 기약하고….”

“미안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슬리 양.”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다음에 만남을 기약하자고? 그러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면?

“방금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로웬에 관한 것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안에 로웬이 겪은 일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아주 작은 것도 좋으니, 내가 지은 가정의 사실에 확신을 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로웬은 세뇌 마법으로 조종을 당했고,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켰다. 마법을 건 사람은 베논 제국 출신의 마법사…….

말없이 시슬리를 응시하자, 시슬리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말라붙은 입술을 꾹 물었다.

그 순간 시슬리는 손을 뻗어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살갗이 맞닿은 순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마력이다, 로웬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마력. 기사보고서에서 느껴졌던 그 차갑고 비릿한….

놀라 시슬리의 손을 뿌리친 순간,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네요.”

“!”

“제가 로웬 경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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