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들과는 다른.
샤를로테와 가넷 대공 호위기사의 불미스러운 관계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사람들은 의외로 입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더 부풀려지는 게 맞았지만 이쯤 되니 국가적 망신이라며 서로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외국 귀빈들을 마주하기 부끄럽다면서 되도록 샤를로테와 루치아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려 하는 희귀 현상이 벌어졌다.
살다 보니 이런 상황도 겪어보네.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내 쪽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 일을 꾸민 배후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샤를로테와 루치아노를 엮었지?
샤를로테가 원망스러웠나? 아니면 루치아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루치아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대신 경고를 해준 그 귀족들이? 아냐, 그들은 샤를로테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어. 그래 봤자 샤를로테에게 속은 거지만……그들은 아니야. 그럼 도대체 누가?
왜 건드려도 루치아노를 건드렸지?
삼십 분째 서류 한 장을 넘기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사이, 클로이가 노크와 함께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로젤리아님! 어떤 분께서 로젤리아님께 서류를 갖다 드리라 하셔서요.”
“서류라고? 협정에 관한 서류는 전부 전달받았을 텐데?”
클로이가 건넨 서류는 특별 연회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베논 제국의 주최로 열리는 특별 연회……?’
종종 타국에서 축하의 의미로 특별 연회를 여는 경우는 많이 보았지만, 주최자가 베논 제국 출신이라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협정에 우호적인 조약을 제시한 것도 모자라 특별 연회까지 열어준다고?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절대로 고개를 굽힐 베논 제국이 아니었다.
“베논 제국은 뱀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제국이라 들었는데 잘못된 소문이었나 봐요! 저번에는 실수로 베논 제국 출신의 호위기사와 부딪혔는데 얼마나 상냥하게 대해주시던지!”
“그래? 상냥하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상냥하게라니. 기계 같은 움직임, 감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아 보이던 그 눈동자. 짐승과도 같던 눈빛…. 베논 제국과 정말로 잘 어울리던 자들이었는데. 그에 비해 시슬리는 정말 베논 제국과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어. 타국 출신이라 그런가, 이카니엘 대공의 옆에서 총애 받는 비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류를 내려놓고는 시슬리가 주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보석이 좀 더 화려하게 반짝였다.
“아, 그리고 로웬님이 곧 황궁에 도착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로웬이? 쉬라고 했더니 기어코 참석하는군. 몸은?”
“네, 두통은 여전히 호소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번처럼 막 발작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어요.”
로웬……. 혹시 모르니 일부러 건국제는 참가하지 말라고 했다. 베논 제국과 마주치면 안 된다고 판단해서 어떻게든 참가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굳이 참가하겠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와? 물론 기사단장이니 하루 정도는 참가해야겠지만….
“하필 특별 연회를 앞두고….”
이마를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특별 연회면 기사들을 각 구역마다 배정할 텐데, 로웬은 기사단장이니 분명 하려고 나설 테고 그럼 베논 제국과 마주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시슬리, 그 여인이 한 말…….
‘로웬 가넷을 이카니엘 대공에게 보내지 마세요.’
그 말을 들은 지 겨우 하루가 지났다. 로웬 가넷을 대공에게 보내지 말라고?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로웬과 이카니엘 대공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보내지 말라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잠시, 시종을 통해 로웬이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슬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로웬을 이카니엘 대공과 마주치게 하는 것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보내든 말든, 애초에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지. 경고를 해주거나.
하지만 경고는 소용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도 호위를 맡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카니엘 대공 각하.”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틀어졌지?
황궁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카니엘 대공의 호위라니.
“레이몬드 제국은 군사강대국이니 그 군대를 이끄는 기사단장을 호위로 둘 수 있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 순간 이카니엘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데 왜 웃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마지 독사의 눈처럼 보였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눈, 그 눈동자가 로웬을 향했다가 다시 나로 향했다.
……시슬리가 나에게 했던 말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이카니엘 대공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만 살짝 꾸벅이고는 다른 호위기사와 함께 그가 머무는 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젠장, 손을 써보기도 전에 일이 벌어져 버렸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로웬에게 다가갔다. 내 얼굴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웬은 나를 보자 인사 대신 헛숨을 삼키며 주춤거렸다. 아마도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겠지. 실제로도 그랬고.
“전부 물러가라.”
로웬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을 물린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무릎을 발로 퍽 걷어찼다.
“로, 로젤리아?”
물론 몇 년째 전장을 누비고 다닌 그는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이카니엘 대공의 호위? 너 미쳤어?”
“대공의 호위는 매 건국제 때마다 했던 일이잖아.”
“거절했어야지, 너는 기사단장이잖아.”
“적국인만큼 내가 배치되는 게 더 옳아. 너도 베논 제국의 사절단으로 갔을 때 기사단장의 호위를 받았잖아.”
“네 몸을 생각해. 발작을 일으킨 건 기억 안 나? 당장 거절해.”
“그것까지 다 고민하여 이미 말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를 호위기사로 쓰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은 없었어.”
발작을 일으켰다는 것을 말했는데도 호위기사로 쓰겠다고 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굳이 로웬이었을까. 역시 이카니엘 대공과 로웬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둘이 무슨 관계지. 설마 기사 보고서에 적힌 내용, 로웬에게 걸린 마법. 그 모든 게 이카니엘 대공과 관련되어 있나? 시슬리는, 시슬리도 관여되어 있는 걸까.
만나지 말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보내지 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로웬이 이카니엘 대공의 호위가 되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시슬리를 찾아가서….
“대공 각하.”
“……시슬리 양?”
그 순간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슬리였다.
“누구십니까?”
로웬은 얼굴을 베일로 가린 여성이 나에게 다가오자 경계를 하며 내 팔을 그의 등 뒤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로웬은 경계해야 할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 그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시슬리가 아니었다. 이카니엘 대공이었다. 적어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각하, 저와 차를 마시겠습니까.”
만약 시슬리가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면 저렇게 불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로웬이 명백한 경계 태세를 내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그럼 제가 함께 동행…….”
“아뇨, 각하와 단둘이 마셨으면 합니다.”
시슬리는 로웬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내며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마셔주실 거죠, 각하?”
시슬리의 새하얗고 작은 손은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까.
루아 남작부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독 병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이에요, 부인. 이 일도 잘해준다면, 아주 큰 상을 내리겠습니다.”
“화, 황후 폐하.”
“그대는 아주 충신 가득한 신하이니. 상을 내리는 것과 더불어 원하는 것을 들어주죠. 라비란느를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위장시켜주죠.”
상을 내려? 라비란느를 구해줘?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지시를 내리는 것 자체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연회 때 각 자리마다 배치될 로젤리아의 잔에 독을 넣으라니.
어떻게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지? 잘못하다가는 모든 걸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공을 내릴 리가 없다. 샤를로테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충성을 바친 시종이라도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리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만약 샤를로테가 독살을 지시하면, 따르세요. 부인.’
‘네? 가, 각하. 그게 무슨…?’
‘나를 믿고 따라요, 부인. 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로젤리아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 다 계획이 있어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니 독살 지시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정말로 로젤리아가 죽어버린다면? 실수를 해서, 정말로 죽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부인.”
“네, 네. 황후 폐하.”
“따를 거죠? 부인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래, 따라야지. 하지만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독병을 집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숨을 꾹 참은 채 자리 배치도에 표시된 자리를 확인했다.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았다. 로젤리아는 따르라고 말했고, 분명 어떠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그 계획이 샤를로테를 끌어내릴 만한 계획이라면.
입술을 꾹 문 채 미소짓는 샤를로테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샤를로테의 침실에서 나와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여유롭게, 느긋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느릿하게….
“허억…!”
그리고 황궁을 빠져나와 님프 궁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루아 남작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독 병을 놓치지는 않았다. 무섭다. 손에 쥔 이 독병 안에 들어있는 독은 한 모금만 먹어도 사람을 여럿 죽일 강한 독이었다. 이걸 로젤리아에게 먹인다. 이것을, 로젤리아에게….
그 순간 루아 남작부인의 눈앞으로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펼쳐졌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죽어있던 감옥 바닥에 쓰러져 있던 켈빈 부인.
켈빈 부인은……죽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독병을 쥐니 켈빈 부인을 죽이려 했던 자신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다. 딸을 위해서 친우를 죽이려 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딸을 핑계로 어쩔 수 없었다며 타협을 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괴롭고, 끔찍했고,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으로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는 켈빈 부인이 나타났을 때조차 루아 남작부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지만 켈빈 부인은 말없이 루아 남작 부인을 끌어안았다.
“전부 들었고, 전부 이해해. 그러니 괜찮아. 네가 라벨을 챙겨줬다는 것을 들었어. 고마워.”
그 말에 루아 남작부인은 독병을 더 세게 쥐었다.
너는 그렇게 괴롭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라벨도 그렇게 비극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샤를로태의 지시에 이리저리 휘둘러 다니지도, 라비란느의 목숨으로 위협당하지도.
모두 샤를로테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독을 차라리, 샤를로테의 잔 안에 넣어버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