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새로운 스캔들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리엘 공작부인.”
“어머, 미안하기는요. 안 그래도 심심한 차였답니다. 그리고 각하께서 이렇게 집무실로 직접 불러, 저를 찾으시는 건 분명 정보가 필요해서일 테니까요.”
리엘 공작부인은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리엘 공작부인을 찾아온 것은 단순히 수다를 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인에 대하여 묻기 위해서였다.
이번 연회는 외국 귀부인과 여식들을 모아 작게 열었던 사교 모임이었다. 비록 비공식적이고 작았지만, 그 모임의 중심은 역시나 리엘 공작부인이었다. 역시 헤레이스 왕국 사교계 전체를 휘두르는 부인다웠다.
그렇다면 그 여인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혹시 이카니엘 대공이 데려온 여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나요?”
“이카니엘 대공 각하 말씀이십니까? 여인이라면……아, 기억났습니다. 레이디 시슬리 양을 말하는 거군요.”
시슬리? 시슬리라니?
“레이디 시슬리…….”
“이카니엘 대공의 총애를 듬뿍 받는 보좌관이라지요.”
“베논 제국 출신인가요?”
“아뇨, 타국 출신이라 들었어요. 어디서 데려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검은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이라 다들 베논 제국 출신이라고 많이들 오해한다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각하의 호위기사도 검은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였죠. 그도 베논 제국 출신인가요?”
“아뇨, 아메 경은 베논 제국 출신이 아니라….”
마법을 모습을 바꾼 거지. 은발에서 금빛 눈동자를 가리기 위해.
‘…어라.’
그러고 보니 칼라일이 시슬리에게 모습을 바꾼 자의 말을 어떻게 믿냐고 그러지 않았나? 그럼 내가 본 금빛 눈동자가 마법으로 바꾸지 않는 ‘진짜’ 눈동자 색이라면? 그렇다면 시슬리는 내가 본 대로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게 맞는…데….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지. 말도 안 돼.
금빛 눈동자가 귀한 눈동자가 맞기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시슬리가 안케도니아 황족이라는 터무니없는 발상이라니. 그때 황족들은 다 죽었을 텐데.
“리엘 공작부인. 혹시 시슬리 양에 대해 더 아는 게 있나요?”
“글쎄요, 이카니엘 대공 각하께서 아낀다는 것과 마법에 능통하다는 점? 아, 머리가 비상해서 그의 연구를 바로 옆에서 도와준다고 해요! 그리고 이건 제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리엘 공작에게 들은 이야기? 베논 제국과 붙어있으니 그 나라의 정보에 대해 다른 국가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을 살피던 리엘 공작부인이 몸을 가까이 붙이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베논 제국에서 1년 전, 새로운 마법 연구를 시도했고, 그걸 성공했답니다.”
새로운 연구?
“그 연구가 어떤 연구였는지 아세요?”
“어떤 연구인데요?”
“상대에게서 마력을 흡수해오는 연구였대요.”
***
“베논 제국에서 주최한 특별 연회라….”
“베논 제국이 어떻게든 레이몬드 마력동맹국을 맺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따로 연회를 준비해줄 리가 없지요. 어쩐지 사절단을 통해 들어오는 물건 중에서 식재료가 많다고 했는데……다 연회 때문이었나 봅니다.”
세츠는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특별 연회’에 관해 토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베논 제국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던 그였지만 베논 제국의 우호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내보이자 긴장이 누그러진 듯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페르소나마저 긴장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베논 제국에 대해 어릴 때부터 꾸준히 들어온 페르소나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적국이었던 나라가 이렇게 태도를 돌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특별 연회를 허락한다. 베논 제국에게 편지를 써 보내야겠군.”
허락은 했지만 찝찝하긴 여간 마찬가지였다.
특별 연회. 마법사의 탄생과 건국제와 새로운 황후의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 그것도 건국제 마지막 날……. 어쩐지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단순히 착각으로 넘어가면 좋을 텐데.
“별다른 사안은 없나?”
“아……있기는 합니다. 샤를로테 황후 폐하와 관련된 추문 말입니다.”
“다른 사안.”
“네?”
“샤를로테 말고 다른 사안은?”
샤를로테의 이야기가 나오자 차갑게 단호하게 끊어냈다. 아예 듣기도 싫은 건가. 세츠는 순식간에 냉랭해진 페르소나의 태도를 보며 억지로 웃음을 토해냈다. 심지어 방금 샤를로테를 황후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아예 황후 대우도 해주지 않겠다 이것인가? 문득 자신의 누나인 아일라가 떠올랐다.
아일라는 샤를로테를 가엾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의 원흉을 샤를로테라 말하지도 않았다.
신분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로젤리아에 대한 거짓추문을 퍼트렸다. 시종들과 시녀들을 내쫓고 자신의 악행에 대한 입단속을 위해 사고를 조장해 끔찍한 비극의 결과들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모자라 용병단과 접촉하고, 기어코 건국제 때 국가적 망신을 당하게 만들었다.
이건 목숨을 바쳐도 모자랄 중죄.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악독하게 만들었을까.
페르소나는 아마 샤를로테가 13 황녀라고 말했어도 그대로 정부로 두었을 터. 시종들이 무례하고 굴고 예법을 갖추지 않았다면 페르소나가 알아서 손을 써줬을 텐데. 불법 용병단에, 로젤리아한테는 왜 그렇게까지….
끔찍하고 잔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의문이 들었다.
물론 지금 의문이 들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페르소나는 샤를로테가 아이를 낳자마자 떼어놓고 샤를로테의 몸조리가 끝나자마자 추방할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자신이 보좌하는 주군이라지만…….
‘솔직히 폐하도 잘못은 있다고 봐.’
‘누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폐하만큼은 각하께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어. 안 그래? 각하께서 보살이신 거지. 나였으면…….’
끝내 그 뒷말은 듣지 못했다. 솔직히 듣고 싶지도 않았다.
세츠는 아일라와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크론 왕국이 보내온 공식 항의서를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조차 무심하게 바라보며 한쪽 구석으로 밀어둔 페르소나는 생각에 잠긴 채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마력연구관은 지금 어디에 있지?”
“마력연구관님……둘 중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헬리오도르 백작은 마력동맹국 협정 조약을 검토 중이고, 바르셀민 백작은……폐하, 어디 가십니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르소나는 세츠가 뒤에서 불렀으나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문밖으로 향했다. 그놈이 연구소에 있다는 것은, 로젤리아가 혼자 있다는 소리니까. 이전에는 너무 감정에 휩쓸린 탓에 로젤리아를 끌어안고, 그녀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로젤리아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남편이 정부에게 푹 빠지고 억울하게 이혼한 셈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까지…….
아이를 생각하니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만 같았다.
샤를로테의 마법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지만, 마법이 풀리고 있는 지금은 달랐다. 괴로웠다. 로젤리아와 나의 아이. 빛도 보지 못한 채 불쌍하게 죽어간 우리의 아이.
만약 태어났다면 누구를 더 닮았었을까.
붉은 머리카락이었을까. 아니면 까만 머리카락이었을까. 눈동자는 녹색이었을까, 붉었을까.
불쌍한 내 아이. 샤를로테로만 아니었다면….
아이를 잃은 고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겠지.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위로를 해주자. 차분히 내 얘기를 하고, 돌아와 줬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할지도 몰라. 이번에야말로, 정말…….
저 옆에 있는 사람은 호위가 아닌가? 왜 저렇게 다정하게 웃고 있는 거지?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친구끼리 저렇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웃는다고?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평범한 대화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면서, 동시에 저 호위 기사에 대한 적개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저런 미소 거의 지어준 적이 없지 않나.
그런데 왜, 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리 환하게도 웃어주는 거야.
“겨우, 일개 호위 기사 따위한테…….”
칼라일이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인데 이제는 호위라니. 로젤리아는 그가 정부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거짓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저게 어떻게 친구 사이라는 거지? 저렇게 다정하게 웃는 게 어떻게 친구라는 거야.
심지어 저놈은 로젤리아를 칼라일 그놈과 비슷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설마 로젤리아를 마음에 담아두기라도 한 것인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둘을 떼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다시 감정부터 앞세운다면 로젤리아는 더 이상 나와 얘기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페르소나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시 집무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칼라일과 저 호위를 로젤리아로부터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
로젤리아는 이 제국의 황후, 다시 황후의 왕관을 머리에 쓸 여자였다.
그렇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호위를 먼저…….
‘그러고 보니 샤를로테가 그 호위 기사와 같이 있었지….’
……좋은 생각이 났다.
어차피 샤를로테는 이미 추문에 휩쓸린 상태였다. 그렇고 어차피 쫓아낼 상대가 아닌가. 차라리 그렇다면 로젤리아의 호위 기사와 샤를로테를 엮어서 스캔들을 만들어내면 되는 일었다. 나중에 그것을 빌미 삼아 장차 이 제국을 이끌어나갈지 모를 황족의 어머니로서 적합한지, 그 여부를 핑계 삼을 수 있고.
그 아메인지 뭔지 하는 호위 기사도 로젤리아에게서 버려지게 될 게 분명했다.
로젤리아를 가장 괴롭게 만든 샤를로테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식의 소문이 난다면, 로젤리아는 크나큰 배신에 휩싸일 테고 그럼 그 호위 놈은 다시는 로젤리아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그 친구라는 말도 안 되는 연도 단박에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는 집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이노 자작부인을 몰래 불러들였다.
다음날, 일간지에 어떤 기사가 올라왔다.
샤를로테 황후와 가넷 대공의 호위기사인 아메 경이 서로 불륜 관계라는 기사가.
***
“이런 일은….”
“….”
“전혀 예상 못 했는데.”
칼라일은 겨우 입을 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의 앞에는 일간지가 놓여있었다. 이미 구겨질 때로 구겨졌지만 적나라한 제목만큼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참으로 난감했다. 누가 이런 기사를 썼는지, 제정신이 아닌 이상 이런 기사를 쓸 리가 없다. 이건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서 쓴 글이었다. 칼라일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모르겠지. 자신이 엮은 사람이 사실 쌍둥이라는 사실을.
“차라리 정체가 드러나는 게 더 낫지 않나.”
“….”
“순간 그렇게 생각했어.”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루치아노였다. 그의 얼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다 못해 당장 누구 하나 죽여도 무방한 표정이었다. 누구라도 잘못 걸렸다가는 그의 손에 처참히 구겨진 일간지와 비슷한 꼴이 될 것 같았다.
“죽일 겁니다.”
“…응?”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요.”
벌써부터 기자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