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틀어진 계획.
이렇게 된 이상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이카니엘 대공이 되었다.
로젤리아와 칼라일은 로젤리아의 이혼을 핑계 삼아 무엇이든 대응할 수 있었다. 정작 밝혀버린다 해도 13황녀임을 증명해줄 사람은 칼라일 뿐. 다만 칼라일은 이방인이었고……어찌 되었든 추문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카니엘 대공이 마음먹고 전부 밝힌다면?
그것도 이카니엘 대공은 안케도니아 황실을 무너트린 제국의 대공! 물론 손을 쓸 수야 있겠지.
하지만 과연 누구의 말이 더 효력이 있을까.
‘거짓말로 덮는 것도 한계가 있어.’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카니엘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거짓말과 추문을 모두 덮어주겠다고? 내 신분을 숨겨주겠다고?
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지? 내 마력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내 마력이 왜? 페르소나에게 세뇌 마법을 거느라 거의 다 써버린 그 마력이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지?
이 제안을……받아들여야 하나?
“물론 바로 답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
“건국제가 끝나는 날까지 대답을 주시면 됩니다.”
샤를로테는 한껏 경계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이카니엘 대공을 눈에 고정시켰다. 무슨 속셈일까. 내 마력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칼라일은 내 마력의 농도가 옅고 힘도 없다고 말했다.
마법을 쓰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그런 보잘것없는 마력. 하지만 이 마력을 내주고 진짜 권력을 얻는다?
지나치게 의심스럽다. 무언가 노리는 게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그런 걸 따질 처지일까.
이카니엘 대공의 말을 다르게 보자면, ‘제안을 받아들지 않을 시 모든 사실을 폭로해 버린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정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렇게 되면….
“아이를 생각하셔야죠, 폐하.”
“….”
“저도 들을 것은 다 들었습니다. 현 가넷 대공이 황후 폐하를 악랄하게 괴롭혔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신분까지 속이며 앉은 자리. 어떻게든 아득바득 올라온 자리를 쉽게 내어주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득바득 기어 온 자리. 그 말이 듣기 거슬렸지만 맞는 말이었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올라온 자리였다. 그 자리를 내준다고 누구 마음대로?
“신뢰가 없으시다면 먼저 제 쪽에서 도와드릴 의향이 충분합니다.”
“도와준다니, 뭘 도와준다는 거죠?”
“누구를 죽이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뭐? 죽여?
샤를로테는 그제야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이카니엘 대공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정확히 책상 위를 향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독을 향해.
온몸의 감각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샤를로테의 얼굴에 흐릿한 공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에 반해 이카니엘 대공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와 황후 폐하의 순조로운 계약을 위해 기꺼이 독살을 도와드리겠습니다.”
***
모습을 바꿨다고?
칼라일이 하는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여인의 눈을 덮고 있던 천이 칼라일의 손에 의해 벗겨졌다. 그의 손에 들린 천 조각이 사라지자, 여인은 황급히 눈을 가렸다. 하지만 손가락 틈 사이로 확실히 보였다.
금빛 눈동자가 아닌 보랏빛 눈동자가. 아니야, 분명 금빛 눈동자였는데.
그 순간 그녀가 깊게 쓰고 있던 넓은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 내가 무언가 잘못 본 것인가. 베논 제국에서 검거나 보랏빛인 머리카락은 아주 흔했다. 물론 눈동자도.
“……무례를 용서하세요, 레이디.”
내가 찾던 여인이 아니다. 분명 금빛 눈동자였어. 보랏빛이 아니라.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금빛 눈동자였다. 그래서 이카니엘 대공과 내기를 해가며 그 여인을 찾으려 했다. 물론 눈동자도 그렇고, 찾아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전 황후였던 몸,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있었던 사고를 들으셨겠지요. 그렇다 보니 신경이 한껏 예민해져 있었답니다. 그래서 칼라일이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그리고 레이디는 제가 찾는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착각했나 보군요.”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안절부절 검은 레이스 장갑으로 감싸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뭐지?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그녀의 태도가 확 변했다. 마치 내가 찾는 여인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 여인은 주춤거리다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각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여인을 제지한 사람은 칼라일이 아닌 그녀가 데리고 온 호위들이었다.
“각하께서 찾으시는 여인이 아니십니까?”
“내가 찾는 여인이…….”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 말을 자르는구나. 이제는 지적해주기도 귀찮았다. 그런데 문득 호위들의 자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인에게 가자고 재촉하는 모습이나, 팔을 잡아끄는 게…마치 죄수를 잡아가는 듯한 행동이었다.
“잠깐.”
“네?”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찾는 여인이 맞는 것 같은데. 레이디, 잠시 제 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여인을 향해 뻗은 손이지만 그녀의 호위가 다시 한 번 막아섰다.
“확실하십니까.”
“비켜라.”
“확실하지 않으시면….”
“지금 당장 비키지 않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이 너희 목을 비틀 텐데.”
그 순간 칼라일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어 나와 여인의 사이를 막던 호위의 얼굴을 콱 움켜쥐었다.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피가 묻은 날붙이처럼 점점 붉게 변하고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움직이면, 너는 죽는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가 전달되어 나조차 움찔거릴 정도였다.
그것을 느낀 기사들은 하나같이 당황하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였지만 칼라일은 고개만 살짝 기울 뿐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기사들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움직이지 말도록.”
“!”
“두 다리로 걸어 나가고 싶다면 말이야.”
호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여인은 그제야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살짝 겁에 질린 눈동자가 베논 제국 사람처럼은 안 보였다. 저 호위 기사들만 해도 칼라일의 위협에 기세가 누그러지기는 했어도 그 눈빛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뭔가……이상했다. 정말 베논 제국의 사람이 맞나?
“제, 제가 각하께서 찾으시는 여인이 맞다니 다행입니다.”
“!”
“하지만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리도 날카로워졌으니, 제가 정식적으로 두 분을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걸 받아주세요.”
여인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그녀가 차고 있던 팔찌를 건넸다. 베논 제국의 문양으로 조각되어있는 자수정이 가득 달린 팔찌. 여인이 내 손 위에 팔찌를 올려놓은 그 순간과 동시에 그녀는 내 손을 꽉 움켜쥔 채 자신의 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여인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웬 가넷을 대공에게 보내지 마세요.”
그 한마디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남겨두고 호위들과 떠나는 순간까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저 여인이 나에게 뭐라고 한 거지?
“로젤리아.”
“….”
“로젤리아!”
칼라일이 내 팔을 붙든 채 내 이름을 크게 외친 후에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여인이 한 말도.
방금 여인이 건네고 간 팔찌를 꽉 움켜쥐었다. 여인이 분명 말했다. 로웬 가넷을 대공에게 보내지 말라고. 그 대공이, 이카니엘 대공을 말하는 건가? 이카니엘 대공과 관련된 인물이라고? 그렇다면…….
“칼라일. 이카니엘 대공하고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있었지. 마력동맹국 협정을 제안해 온 나라니까.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인물이라고는 생각 못 했어. 애초에….”
칼라일은 잠시 망설이듯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자가 정말로 이카니엘 대공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어.”
“어째서?”
“너도 논의 때 있었으니까 알 텐데. 혹시 이카니엘 대공에게서 마력이 느껴졌어? 나도 루치아노에게 들어서 알아, 처음 본 순간 몸이 억눌릴 정도로 강한 마력이었다며.”
그래, 루치아노의 말대로 분명 강한 마력이었다. 테라스에서 만났을 때도 그 마력에 잠시 주춤하기도…….
‘어?’
그런데 왜 오늘은 아무것도 안 느껴졌지?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마력도 느끼지 못했어.”
“뭐?”
“그자가 이카니엘 대공인 게 확실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칼라일이 마력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칼라일은 예전처럼 마법을 쓰면 몸에 무리가 가는 일 따위 이젠 없었다. 바올 노예시장 사건이 계기가 되어, 다른 마법사들처럼 한계 없이 마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칼라일이, 마력을 감지하지 못한다니?
그럴 리가 없다. 나조차 알 수 있는 마력인데 그걸 칼라일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팔찌를 으스러트릴 듯 꽉 움켜쥐다가 이내 여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접근해야 할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 칼라일.”
이카니엘 대공이 모든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여인에 대해 먼저 알아내야 해.”
***
“아네트! 콜록, 이거 봐!”
바닥에 널린 선물 상자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아벨리는 에메랄드가 가득 박힌 보석함을 안고 아네트에게 뛰어갔다.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난감은 제쳐두고 오로지 고대 마력학 서적에만 눈을 빛내던 아네트는 아벨리가 가져온 보석함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보석함도 딱히 아네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콜록, 황제 폐하께서, 주신, 콜록! 건가봐!”
“브로치야. 폐하께서 우리 눈동자 닮은 브로치 주시겠다고 했잖아.”
“맞아! 엄청 예쁘다, 콜록, 그치?”
“응, 예뻐……그런데 아벨리 얼굴이 안 좋아. 막 새하얘. 기침도 하구.”
아네트는 마력학 서적을 내려놓으며 저번부터 계속 기침을 하고 안색도 창백한 아벨리를 걱정스럽게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서던 연구원에게 가자고 말해도 아벨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네트를 다독였다. 괜찮다며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 모습을 본 아네트는 문득 고아원에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고아원에 있을 당시, 아벨리는 한겨울에 다 찢어진 셔츠와 짧은 바지를 입고도 멀쩡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아벨리의 말대로 금세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이 정도는 금방 나으니까 걱정……콜록!.”
“…아벨리?”
“콜록, 켁, 커헉……!”
아벨리가 아네트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