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진짜’ 권력.
마력동맹국 협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베논 제국과 마력동맹국을 맺는다면 분명 제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적국이지만 대륙 내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 집단이 존재하고, 마력학 부문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니까. 잘만 한다면 적국 간의 관계를 깨트리고 새로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의심스러웠다. 그건 페르소나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베논 제국에서 보내온 협정안에 명시된 조약.
하나같이 전부 레이몬드 제국에 유리한 조약들뿐이었다. 당장 몇 달 전만 해도 적국이었던 제국에서 왜 이런 조약들을 제안했을까. 당장에 수락하기에는 너무 의심스러웠다. 관리들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정말로 이게 베논 황실에서 제안해온 조약이 맞소, 대공?”
“네, 폐하. 황실 측에서는 레이몬드 제국과 지난 과거들은 다 잊고 새로운 관계를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황실 마법사들도 다 동의한 조약들입니다.”
페르소나도 이를 승인해야 할지 말지 깊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베논 제국 측에서 아무런 수를 써놓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페르소나는 베논 제국에서 보내온 협정안을 툭툭 두드리다 결국 승인을 보류했다. 관리 중에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올바른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약들은 하나같이 유혹적이기는 했다.
베논 제국만 아니었다면 바로 승인했을 텐데.
‘마력동맹국 협정 조약…….’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법사 생산에 관한 공동 연구’에 관한 내용이었다. 현재 레이몬드 제국에서도 진행 중인 연구이지 않은가. 이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한다면 칼라일의 업무도 조금 줄어들 텐데. 말없이 공동 연구에 관한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 번에 끝날 논의는 아니었기에, 내일도 논의를 진행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베논 제국이 제안한 뜻밖의 조약 내용을 보아하니. 건국제가 끝난 후에도 논의는 계속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카니엘 대공은 귀빈으로서 레이몬드 제국에 계속 머물지 그 여부도 알 수 없다.
‘시간이 촉박했는데……잘 된 건가.’
마력동맹국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군사에 관한 내용도 살펴보려 했으나 업무 때문에 바빠서 이카니엘 대공과 다른 안건 관련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 자꾸 그 여인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왜일까. 내가 예전에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각하.”
“!”
“회의가 끝났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칼라일이 바로 옆으로 와 있었다. 방금 전의 위엄 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다시 사랑스럽게. 미소지으며 칼라일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일어나자, 이카니엘 대공과 대화를 나누는 페르소나와 눈이 마주쳤다. 칼라일과 맞잡은 손을 보고는 잠시 상처받은 표정을 짓던 페르소나는 이내 다시 시선을 이카니엘 대공 쪽으로 돌렸다.
이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샤를로테에게 조종당했다는 그 말.
……아직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일부러 칼라일의 손에 더 세게 잡은 채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로젤리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칼라일은 다시 나를 로젤리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칼라일의 목소리에 담긴 내 이름을 듣자, 어쩐지 불편했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자 칼라일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회의에 너무 집중했나 봐, 머리가 아파.”
“집중하기는 하더라. 집중한 모습도 그렇게 멋지면 어떡해.”
“가장 멋졌던 게 누군데, 당신이 일하는 모습이 그렇게 위엄있을 줄은 몰랐어. 나한테는 매일 실수했다, 아직 미숙하다 하면서……아까 룬 백작한테 그렇게 말한 것도, 일부러 그런 거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뺨에 홍조를 띠던 칼라일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룬 백작은 크론 왕국과 우호적 관계에 놓여있던 펠트 왕국 출신이었다.
‘그 연구가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애초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고, 단순히 이론만으로 성공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고, 사람에게 실험하기에는 위험한 실험입니다. 그렇기에 이론을 통해 성공 확률을 높이고 있는 겁니다.’
‘그럼, 사람에게 임상 테스트는 언제 시작하는 것입니까?’
‘글쎄요, 언제 시작해야 할까요. 백작께서 말씀해주시죠.’
‘그걸 왜 저한테 묻는 것입니까. 연구관은…….’
‘그렇죠, 연구관은 저입니다. 하지만 마치 마력연구관인것 마냥 연구원들의 설명을 몇 번씩이나 끊어 개입하고 이미 ’5번‘이나 설명한 내용을 재차 물으시고 아직 실험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고 서류에 작성되어 있는데도 계속 물으시길래 혹시 아시나 싶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통쾌하기는 했다. 아마 오스틴 공작과 관련된 인물인 것을 알고 일부러 그랬겠지. 칼라일 쪽으로 몸을 기대 잠시 숨을 고르자 이마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피곤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나를 끌어안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바로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놀라 뒤로 돌자 칼라일이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기사 네 명. 제복 위에 달린 특이한 문양의 브로치. 저 문양은 베논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카니엘 대공이 보낸 건가? 언제 온 거지?
“모시러 왔습니다, 각하.”
“모시러 왔다니?”
“각하께서 찾으시는 여인이 각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내가 찾던 여인이라면, 그 금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을 말하는 건가? 설마 베논 제국이 보낸 사절단의 일원이었나.
“로젤리아, 여인이라니?”
“그게 저번 연회 때….”
“어서 가셔야 합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기사가 대공이 하는 말을 끊은 거야?
차갑고 냉기가 서린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자, 내 말을 끊은 기사가 작게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대공으로 인식하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말만 대공이지, 다른 귀족가의 여식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 감정이 하나도 없는 눈동자. 마치 기계 같았다. 명령받은 일만 묵묵히 수행하는 기계. 내 팔을 움켜쥐듯 잡은 손에서 마치 시체와도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 감각에 움직이지도 못할 때쯤, 칼라일이 그 기사의 손을 낚아채 꺾어버린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이 참 마음에 안 드네.”
“!”
“일개 기사가 지금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댄 것인지, 인식은 하고 있나?”
손이 꺾이자 기사는 그제야 무표정하던 얼굴에 고통스러운 낯빛이 떠올랐다.
“베논 제국의 기사들은 이리도 무례한가 보군.”
“놔주십시오, 헬리오도르 백작님. 저희는 명령을 따라….”
“그 명령에 마법을 쓰라는 지시도 있었나?”
그럼 그 시체처럼 소름 끼치던 감촉이 마법이었나. 손자국이 남아있는 살갗 위로 손을 대자 그제야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력이라. 그럼 나를 마법을 이용해 데려가려고 했나? 내가 찾는 여인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나, 무례하게?
“만약 그 명령에 마법을 쓰라는 지시가 있었다면 이건 국가 분쟁으로도 번질 수 있는 문제인데.”
“!”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대들은 정말 이카니엘 대공 각하의 명령에만 따른 것인가?”
하지만 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물음에 대답을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각하.”
연회에서 보았던 검은색 복장에 눈을 가린 투명한 천. 내가 찾던 그 여인이 맞았다. 그녀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귀빈이었나? 귀빈이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인지.
여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내 앞에 서서 예법을 갖춰 보였다. 하지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와 달리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긴장한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정확히는 그 다급함을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것 같았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각하.”
“네, 맞습니다. 성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레이디.”
“제 이름은…….”
다짜고짜 이름부터 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건가. 내가 이름을 묻자 여인은 잠시 움찔거리며 말꼬리를 길게 늘렸다. 온몸을 가리는 것도 모자라 무엇을 망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기를 꺼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름은 들을 수 없었다.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내 앞을 가로막은 칼라일은 그 어느 때보다 냉기 어린 눈빛으로 여인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췄군.”
“!”
“모습마저 감춘 자가 말하는 이름이 진짜 이름인지, 가짜 이름인지 어떻게 알지?”
***
“이게 전부라고?”
“네, 황후 폐하.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게 전부…….”
“어디서 이걸 조사라고 해온 거지? 이딴 거 필요 없다. 다시 조사해 와, 지금 당장!”
샤를로테는 이노 자작부인에게서 받은 서류를 던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른 하녀들과 기사들은 그런 샤를로테의 모습에 굉장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지금껏 그들이 봐온 샤를로테의 모습은 따스하고, 상냥한 천사 같은 모습뿐이었을 테니까.
전속으로 배정된 자들이 아니면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샤를로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카니엘 대공, 이카니엘 대공! 그자가 도대체 누구길래 내가 아벨리로부터 마력을 빼앗은 것을 알고 있지? 어떻게 안 거지?
‘그건 명백한 협박….’
그래, 협박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마력을 빼앗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칼라일도 내가 마력을 빼앗는다는 것은 몰랐을 텐데?
만약 이 사실이 페르소나의 귀에 들어가면……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가 아끼는 마법사 아이를 건드린 셈이 되니까.
샤를로테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이카니엘 대공은 베논 제국의 대공. 칼라일과 로젤리아와는 달리 그가 이 사실을 말해버린다면 손 쓸 수 있는 방도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카니엘 대공에 대한 조사를 해와, 혹시나 약점 잡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 했는데 죄다 이상한 것만 가져오고!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 이 쓸모없고 천박한 것들!
통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카니엘 대공의 입을 막을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가시면, 안 됩니다……지금…….”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자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아차린 샤를로테는 조용히 하라 소리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들의 제지를 받고 있는 이카니엘 대공. 저자가……왜 여기에?
“황후 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마시라 하셨습니다.”
“글쎄, 나는 예외일 텐데. 다시 한 번 물어보지 그래?”
느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 이카니엘 대공은 순간 샤를로테를 향해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소름 끼치는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샤를로테는 고민했다. 문을 닫고 언제 퍼질지 알 수 없는 추문을 두려워하며 방법만을 찾는 것보다는 부딪히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카니엘 대공을 돌려보낸다 한들,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차라리, 지금……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샤를로테는 문을 벌컥 열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카니엘 대공을 노려보며 기사와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아무도 침실 근처로 오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카니엘 대공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그가 어제 했던 바로 그 말 때문이겠지. 내가 거짓으로 신분을 속인 것과, 마법사 아이의 마력을 빼앗는 것. 그리고 샤를로테의 예상은 적중했다.
“제가 어찌하면 좋을까요, 폐하.”
“….”
“이 사실이 퍼지게 되면 황후의 자리에서 결국 물러나야 할 텐데요. 아니면 폐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거나.”
두 주먹을 꽉 쥔 채 인상을 찌푸리던 샤를로테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해봐야 손해를 보는 건 나겠죠. 뭘 원하는 겁니까.”
“역시, 폐하께서는 상황 판단을 잘하시는군요.”
“본론만 말하도록 하세요, 대공.”
차갑게 쏘아붙이자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폐하, 제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제안?”
“저에게는 폐하의 마력이 꼭 필요합니다.”
……내 마력이 필요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샤를로테는 아까보다 더 인상을 거칠게 찌푸렸다. 한 줌조차 있을까 말까 한 내 마력?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면 폐하에게 권력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권력은…….”
“!”
“‘아무런 거짓도, 추문도 없는 황후의 권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아무런 거짓도 추문도 없는 황후라니.
……지금 내 거짓말과 추문을 모두 덮어주겠다고 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