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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128화 (128/170)

#128화, 걱정이 아닌 값싼 동정

아무런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독.

샤를로테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침실 바닥에 주저앉아 독이 담긴 병을 꽉 움켜쥐었다.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었고, 샤를로테의 머리카락처럼 새하얀 은빛 드레스는 쏟아진 찻물로 인해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틀린 거지? 도대체 로젤리아가 왜 용병단 장부를 가지고 있는 거야!

쨍그랑! 샤를로테는 찻잔을 집어 들어 벽으로 던졌다. 산산조각 난 찻잔처럼, 머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 독을 구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것도 독살하기에 딱 좋은 독. 그러나 루아 남작부인이 가져온 용병단 장부를 본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로젤리아가 용병단 장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아니면 저주를 걸고, 협박성이 짙은 쪽지를 보내겠는가. 가작 유력한 사람이 로젤리아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럼 칼라일과 로젤리아는 자신이 용병단을 고용한 것 또한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장부에서 어떻게 자신의 가명을 알아냈냐는 점이었다.

미엘르는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이기에 가명으로 사용했다. 칼라일이 알아본 건가? 이 사실들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용병단 장부는 또 어디서 난 거야…!”

장부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명을 알고 있다면?

그 장부에 죽인 1황녀의 이름이 있다면 확실히 의심할 만하다.

용병단과의 접촉……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나?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하지만 침착하게 생각하려 해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멈춰버리고, 오한이 들었다. 사실상 장부에 대해 퍼트려도 쉽게 손을 쓸 수 있겠지만….

왜 자꾸 모든 걸 들켜버린 기분일까.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데 속내가 낱낱이 드러내진 것 같다.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장부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아니면 왜 이러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러는 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침실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 곳곳에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쿵 하고 뛰면서 어깨가 떨렸다. 샤를로테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부여잡으며 문을 열고 들어온 아벨리와 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황후 폐하!”

아벨리가 환하게 웃으면서 아네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페르소나가 아이들을 보내줬나? 아니지, 일부러 못 만나게끔 해서 한동안 보지 못했다. 샤를로테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두 아이를 끌어안았다. 보내주었든, 아이들이 몰래 왔든 상관없었다. 아벨리와 아네트와 친분을 쌓아두어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찻잔이 쏟아졌으니 시종들을 불러 치우게 하렴.”

샤를로테는 하녀들에게 짧게 지시하고는 아네트와 아벨리의 손을 잡았다. 아벨리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마력이 기분이 차츰 나아졌다. 한동안 마력 흡수를 하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마력이 조금 쌓였나. 아벨리와 아네트의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예전에 칼라일이 말했던 마력의 흐름이라는 게 저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다 보니 아네트가 한동안 말이 없는 게 보였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벨리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는 마력.

하지만 아네트에게서는 마력을 빼앗아 올 수가 없었다. 뒤따라오는 이노 자작부인을 힐끗 본 샤를로테는 아네트의 손을 일부러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마력은커녕 아무것도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경계심이 심해서 그런가? 예전에 비하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아네트.”

“!”

“연구원들에게 들었단다. 성적이 아주 뛰어나다지? 잘하고 있구나.”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쓰다듬어주다 아네트는 오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살짝 웃었다. 샤를로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시시 웃는 아네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쩐지 심장이 꾹 눌린 것 같이 답답했다.

그때 아네트와 아벨리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샤를로테를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에게 숨었다. 샤를로테는 당황하며 오들오들 떠는 두 아이를 끌어안자 바로 뒤에서 거대하고도 몸이 절로 떨릴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카니엘 대공?’

언제 뒤로 온 거지? 숨이 턱 막혔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을 보는데도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카니엘 대공이 한 발자국 다가오자 아이들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마치 커다란 짐승을 마주한 것 마냥, 안겨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카니엘 대공.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군요.”

샤를로테는 아벨리와 아네트를 이노 자작부인에게 넘겨주었다. 아벨리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샤를로테는 웃으며 아벨리의 작은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렴.”

이카니엘 대공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피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샤를로테는 아벨리와 아네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저 아이가 그 아이들입니까. 제국의 보배라는, 마법사 아이?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군요.”

“아벨리 페리도트, 아네트 페리도트입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아이죠.”

“폐하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이라 그런지 더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폐하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

그 말에 샤를로테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감싸 안았다. 부른 배, 하지만 페르소나는 이제 잘 찾아오지도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 핑계인지 아니면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는 보러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아이는 보러 와야지, 아이만큼은. 아버지라면 이 아이를 더 잘 챙겨줘야지. 장차 후계를 이을 아이일지도 모르는데….

“폐하께서 건국제 축하 연회 때 아벨리와 아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장차 제국을 이끌어나갈 귀중한 아이라며 얼마나 칭찬을 하시던지.”

“폐하께서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렇다고 해도 굉장히 아끼시더군요. 마치 그 아이들의 아버지라도 된 것 마냥 말입니다.”

건국제 축하 연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어떤 말이 오갈지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하고 침실에 있었는데, 페르소나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샤를로테는 배를 꽈악 감싼 채 이카니엘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라고 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장차 후계자가 될지 모르는 그 배 속에 있는 아이……태어나서도 폐하께 사랑을 못 받을까.”

“걱정도 정도껏 입니다.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군요,”

“황후 폐하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 아닙니까?”

부정하고 싶지만 맞는 말이었다. 페르소나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보러 오지 않는다. 그의 핏줄임에도. 직접 찾아가 보면 아벨리와 아네트와 함께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카니엘 대공의 말대로, 아벨리와 아네트가 마치 그의 친자식인 것 마냥.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보러 와 달라 말해도 그날 하루가 끝. 그것도 두 시간 정도였나.

“참으로 안타깝군요.”

“…그쯤에서 그만 하세요, 대공. 무례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폐하, 저는 정말 걱정이 된답니다.”

걱정? 어이가 없었다. 걱정이라고 하기에는 마치 동정처럼 느껴졌다.

가엾은 샤를로테, 아이를 가졌음에도 버려졌구나. 네 아이와 함께 말이지. 네 남편은 네 아이가 아니라 다른 아이를 사랑하고 있단다. 과연 페르소나가 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기뻐할까?

‘샤를로테, 너는 황녀란다. 네 동생도, 너는 황실의 아이야.’

호흡이 멈췄다. 끔찍했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그려지는 그 순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 아니야, 그럴 리 없다.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이카니엘 대공을 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저 붉은 눈동자……샤를로테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페르소나가 사랑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내 아이가 황제가 될 것이다. 저런 값싼 동정을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내 아가, 너만큼은 어떻게든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겠어. 아가,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쓸데없는 걱정이로군요.”

“!”

“대공이 염려할 처지는 아니랍니다. 그 아이들이 사랑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이 제국의 후계는 내 아이가 될 테니.”

정중하게 잘 받아쳤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국 간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베논 제국은 적국이고, 이카니엘 대공은 그 적국의 사절단 대표였으니까.

샤를로테는 그대로 황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는 할 얘기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

“쓸데없는 걱정 같지는 않습니다, 폐하.”

그러나 뒤따라온 말이 샤를로테의 발목을 붙들었다.

“제 신분을 속인 것도 모자라 아이들의 마력까지 빼앗는 패전국 황녀 출신의 자식을 후계로 삼는 멍청한 황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

배정받은 궁은 님프 궁 다음으로 좋은 궁이었다.

적국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이득이 오고 갈 사이이니, 좋은 궁을 내준 건가. 이카니엘 대공은 보석과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진 의자에 앉으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한숨을 깊게 내뱉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그는 흑요석 같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직도 길들이지 못한 것들이 남아있었나.”

중얼거리듯 말하자 머리에 까만 베일을 씌운 여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시킬까요?”

“약한 것들을 본보기로 죽여라.”

“네,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슬슬 각하께서 걸어둔 마법이 풀릴 때가 되었습니다. 하루빨리 세뇌 마법을 다시 거셔야 합니다.”

여인은 들고 있던 서류 몇 장을 넘겼다. 그 서류에는 하나같이 피가 묻어있거나 찢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잠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이카니엘 대공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그자의 이름이 로웬 가넷이라 했나.”

“네.”

“왜 그자의 동생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은 걸까.”

“네?”

“내 마력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 여자한테는 아주 잘 통하던데.”

‘그 여자’라는 말이 이카니엘 대공의 입에서 언급되자 여인은 몸을 흠칫 떨렸다. 여인은 다급하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서류는 여인의 손안에서 구겨지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가넷 대공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하던데……만나보도록 해.”

“!”

“물론 네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대공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호위겠지만.”

여인은 자신의 손을 꾹 누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카니엘 대공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기적적인 가족 상봉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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