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덫
나와 왜 마주치려 하지 않았는지 알겠다.
단순히 용병을 납치해 온 것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었어.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 그게 어떤 심정이었는지 잘 알기에, 말없이 칼라일에게 다가가 떨리고 있는 그의 팔을 꾹 눌렀다.
그의 목소리에서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기 싫었는데.”
미안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나도 칼라일과 비슷한 마음이었으니까. 부모님을 죽인 놈이다. 아무리 샤를로테가 의뢰했다지만 저 남자에 대한 원망은 지울 수 없겠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용병의 입에 물려놓았던 재갈이 바닥을 굴렀다. 역시 용병인가, 쇠로 이루어진 재갈을 발로 툭 치자, 용병은 한껏 충혈 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씨발, 당장 이거 풀어! 풀라고!”
이럴 때는 입을 다물어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이 자를 기억하나?”
칼라일을 가리키자 용병은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네가 이자의 부모를 암살했다.”
“뭐?”
“기억은 하나? 네가 죽인 자들의 얼굴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어갔는지, 남은 자들은 너로 인해 지옥에서…….”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나 했더니, 겨우 그딴 거였어?”
“…뭐?”
“암살 의뢰 들어온 타겟은 항상 다 개 같은 것들이었지, 평소 행실이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저놈 부모를 죽이라는 의뢰가……!”
용병 중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저놈이 하는 말은 다 개보다 못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감히.”
콱! 뻣뻣하게 쳐들고 있던 고개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향하면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루치아노가 남자의 머리를 잡고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다시 고개를 들려고 하면 더 세게, 이마가 바닥에 닿다 못해 으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를 뚝뚝 흘리는 용병에게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칼라일이 너에게 생각보다 많은 자비를 베풀었구나. 그게 아니면 이렇게 혀를 놀릴 리도 없지.”
“끄윽, 윽, 으으…….”
“샤를로테에게 복수를 위한 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놔둘 리도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거의 죽지 않았다.
……정말로 머리를 터트릴까.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졌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자를 굳이 복수를 위해 살려둬야 할까. 어차피 이미 샤를로테를 끌어내릴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 차라리.
손끝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튀기듯 따가운 감촉이 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손을 움켜쥔 칼라일이 다급하게 나를 그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뜨거웠던 손을 내려다보자, 손끝이 살짝 그을진 것이 보였다. 나 정말로 저 남자의 머리를…….
귓가에서 멀어지던 소리가 차츰 돌아왔다.
그때 지하실 문틈 사이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서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린 순간, 루치아노가 먼저 달려가 몰래 엿보고 있던 자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샤를로테, 이 영악한 것.’
바닥으로 내던져진 사람은 다름 아닌 루아 남작부인이었다.
이제는 시녀에게 감시까지 시키는 건가? 실소를 터트리며 루치아노에게 신호를 주자, 그는 지하실 문을 굳게 닫으며 자물쇠를 걸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메우자 루아 남작부인은 몸을 흠칫 떨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 가, 각하! 저는, 그게, 훔쳐보려던 게 절대 아닙니다!”
“그렇죠, 훔쳐보는 게 아니라 감시하러 온 것이겠죠. 샤를로테의 명으로.”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 심부름을…!”
심부름?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해야지. 말없이 루아 남작부인을 내려다보자,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떨기 시작했다. 루아 남작부인, 켈빈 부인과 친했던가. 황궁에서 오래 일한 탓에 눈치도 좋고 상황 파악도 빠른 그녀가 샤를로테의 명을 받아 감시하러 왔다? 그것도 가넷 대공이 머무는 님프 궁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용병 때문에 불쾌한 마음은, 더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로젤리아님. 어떻게 할까요?”
“….”
“지하실에 가둬둘까요? 아니면 저 용병처럼 쇠사슬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둬둘까요.”
“….”
“그것도 아니라면, 마수의 먹이로 던져줄까요.”
루치아노는 일부러 켈빈 부인의 두려움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벽에 걸려있던 기록 두꺼운 쇠사슬을 들어 올렸다. 녹이 가득하고 여러 칼날이 달린 것을 본 루아 남작부인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특히 머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상태로 정신을 잃은 용병을 보자 다급하게 기어와 내 드레스 자락을 붙들었다.
“잘못했습니다, 각하, 저는 그저 명령을 따르느라…!”
“방금은 아니라 하지 않았나요?”
“아, 아…….”
“역시 샤를로테의 명으로 나를 감시하러 온 것이었군요. 그래, 루아 남작부인. 샤를로테가 또 어떤 지시를 내렸죠?”
루아 남작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칼라일의 발 앞으로 굴러가자, 루아 남작부인은 곧바로 유리병을 도로 주우려 했지만 루치아노의 검이 더 빨랐다.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 루아 남작부인의 목에 댄 루치아노는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버릴 것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루아 남작부인은 덜덜 떨면서도 유리병으로부터 시선을 못 떼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루아 남작부인?”
“카, 칼라일님! 돌려주십시오!”
“반응을 보아하니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하고.”
칼라일이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았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지, 잠시 유리병 안에 든 내용물을 말없이 보더니 이내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칼라일이 목을 부여잡으며 통증을 호소했다.
“역시, 이거….”
그에게서 유리병을 빼앗아 목 부근에 손을 대었다. 마법으로 통증을 없애면서, 찡그려진 칼라일의 얼굴에서 과거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건….
“독이구나.”
순식간에 독을 마셨던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도 모르게 유리병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렸다.
“샤를로테가 구해오라 시켰습니까.”
“허억, 헉…….”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경고로 안 끝납니다.”
칼라일이 내 손을 감싸 쥔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루아 남작부인은 입술을 꾹 물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용병단 장부를 구해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부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독이라도 구해오라고…….”
독을 구해오라 했다. 이걸 누구에게 먹이려고 했지?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은 언제 받았습니까?”
“독을 구한 뒤에, 황후폐하는 저에게 님프 궁으로 가서……각하께서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장부 비슷한 것이 있다면 훔쳐 오라고도 하셨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루치아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낸 새, 새에 걸어둔 저주, 그리고 샤를로테가 용병단에게 의뢰하면서 사용한 가명이 적힌 쪽지. 나의 계획이 통한 샘이었다. 샤를로테가 스스로 덫을 펼치게 한 계획이 성공했다. 그리고 용병단 장부가 나에게 있다고 의심하게 하는 것도. 그렇다면 이 독은….
“독을 구해오라는 지시에 왜 따르셨습니까, 부인.”
“네, 네?”
“이 독으로 누구를 독살할 줄 알고 구해온 것인지 물었습니다.”
뚜껑을 굳게 닫은 유리병을 루아 남작부인에게 던져주자 그녀는 마치 불에 닿은 듯 흠칫거리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샤를로테가 감시하라고 한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이었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신 겁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면…!”
그 순간 루아 남작부인은 눈물을 터트리며 유리병을 꽉 움켜쥐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채찍질이 낫지요, 지시를 거부하면 저는 불구가 되거나, 제 딸 라비란느가 처참한 꼴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을 겁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불구가 되다니요. 라비란느라면, 부인의 막내딸이 아닌가요?”
“황후 폐하의 명을 거부한 이들은 모두 내쫓겨져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모두 황후 폐하로 인해서요. 그, 그래서, 저는 지시를 따랐고, 결정적으로 황후 폐하에게, 약점이 잡힌 상태라….”
샤를로테가 사고를 조장했다고? 시종들을 내쫓고, 사고를?
설마 자신의 지시를, 악행을 퍼트리지 못하게? 라벨 영애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고?
피해자가 한둘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쫓겨진 시종들은 열 손가락을 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샤를로테에 의해 비극을 맞게 된 이들이 몇 명이란 말인가.
“뮬렌 백작 사건, 그 백작이 제 딸 라비란느를 정부로 삼으려고 계속 위협을 가했고, 저는 황후 폐하와……그 백작을 없애주는 대가로…….”
“대가로?”
루아 남작부인은 말을 흐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까지는 샤를로테의 끔찍한 악행을 도왔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뒤늦게 정신을 붙잡았는지,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해요, 부인.”
“….”
“샤를로테가 두렵나요?”
루아 남작부인은 샤를로테의 악행을 도왔다. 샤를로테의 독살을 위해 직접 독을 구해왔다. 하지만 그 처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샤를로테가 라루아 남작부인의 딸을 약점으로 쥐고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날카로웠던 태도를 누그러뜨리자, 루아 남작부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대답했다.
“켈빈 부인에게 독을 먹여 자살로 위장하라는, 지시와 용병단의 의뢰를 대신….”
심장이 쿵 떨어졌다. 켈빈 부인에게 독을 먹이려 했다? 켈빈 부인을 죽은 척 위장시키고 빼돌린 사람은 로웬과 루치아노였다. 만약 로웬과 루치아노가 켈빈 부인을 빼돌리지 않았다면, 켈빈 부인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것도 오랜 친우의 손에, 피를 토하며 홀로 죽어갔겠지.
루아 남작부인은 오랜 친우인 켈빈 부인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이건 루아 남작부인만의 죄가 아니었다. 루아 남작부인에게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켈빈 부인은 부인을 걱정했습니다.”
“네…?”
“샤를로테에게 시달리고 있을 부인을, 아마 지금도 걱정하고 있겠죠.”
그 순간 루아 남작부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가, 각하. 호, 혹시. 혹시……켈빈 부인이….”
더듬더듬 토해내는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용병단 장부를 가져와 루아 남작부인에게 안겨주었다.
“용병단 장부입니다.”
“!”
“샤를로테에게 님프 궁에서 찾았다면서 가져다줘요. 내가 시켰다고 말하지 말고. 샤를로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내 말을 따라요, 부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아 남작부인은 직감적으로 켈빈 부인이 살아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장부와 독이 담긴 유리병을 끌어안은 채 흐느끼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결심을 한 얼굴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지하실에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살짝 휘청거리자 칼라일이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그냥, 나는….”
당장이라도 샤를로테의 악행을 모두 밝혀버리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까. 칼라일의 부축을 받은 채 다시 똑바로 자리에 섰다. 이제 생각하자, 생각해.
샤를로테, 용병단 장부. 그리고 루아 남작부인을 이용해 구한 독.
그 독을 먹일 상대는, 칼라일과 나. 둘 중 한 명이겠지.
덫을 놓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진행할 줄은 몰랐다. 피해자들도 생각보다 너무 많고. 더 이상의 피해는 없어야 한다.
흐느끼는 루아 남작부인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때 루치아노가 숨 막히는 적막을 깨며 입을 열었다.
“샤를로테가 덫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그 목소리는 굉장히 담담하고 조용했다.
“복수를 앞당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