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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126화 (126/170)

#126화, 아주 조금만.

저주 마법은 그렇게 많은 마력을 앗아가지 않는다.

다만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 나쁜 감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거북함까지.

……사람을 죽이는 저주는 더하겠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약간 그을려져 있다. 저주의 영향인가. 루치아노가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그랬지….

일부러 움직이기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나는 궁 근처를 돌아다니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어젯밤, 샤를로테에게 저주를 걸었다.

물론 목숨을 위협하는 저주는 아니었다.

내가 샤를로테에게 걸어둔 저주는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저주였다. 샤를로테는 영악하고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머리를 아주 잘 쓰는 그녀는 자신의 예상과 완전히 어긋날 때, 순식간에 생각이 많아지면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못 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칼라일이 아닌가. 죽인 줄 알았지만 살아있었고, 내가 칼라일을 정부라 말했을 때, 모두의 앞에서 칼라일의 풀네임을 말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지.

그래서 그 점을 노리기로 했다. 샤를로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게 만드는 것.

쥐는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샤를로테가 용병단 장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가명을 쓴 것마저 들켰으니까. 저주는? 아마도 불안해하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저주의 영향 때문에 아마 괴로울 정도로 불안해질 것이다.

다만 샤를로테가 더 불안해할수록,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 전에 저지른 일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산책로 근처를 서성거리다 다시 님프 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치아노가 쉬라고는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압박을 넣어, 샤를로테가 자신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리게끔 만들어야 했다. 아예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각하.”

“!”

“여기 계셨군요.”

이카니엘 대공이 왜 여기에?

“대공. 여기에는 어쩐 일이죠?”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걸 드러낼 수는 없겠지.

“저번에 한 내기에 대해서 확인하고자 할 게 있어서요.”

“내기라면?”

“금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을 찾아라……라고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만.”

“보기와 다르게 작명 센스가 없군요.”

“이런.”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는데, 이카니엘 대공은 잠시 중얼거리다 주머니에서 얇고 투명한 천을 꺼냈다. 은색 실로 자수를 놓은 천은 분명 그 여인이 얼굴에 두르고 있던 그 천이었다. 설마 벌써 찾은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카니엘 대공과 천을 번갈아 바라보자 대공은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천을 내 손 안에 쥐어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내기는 제가 이긴 듯합니다. 이제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벌써 찾을 줄은 몰랐는데……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죠?”

“저에게 관심을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기를 제안한 건데, 여전히 저에게 관심은 없으신 듯 보입니다, 각하.”

“그 관심, 여인을 만난 뒤에 드리도록 하죠. 안내해줬으면 하는데.”

천을 만지자 흐릿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마법사인가 싶어 멍하니 부드럽고 매끄러운 천을 손으로 쓸자니, 바로 앞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나에게로 뻗은 그의 손이 보였다.

“안내하겠습니다.”

“!”

“제 손을 잡으시지요.”

매일같이 검은 장갑을 끼고 다니던 이카니엘 대공이 장갑을 벗었다. 이 전에도 절대 살갗을 노출하려 하지 않는 듯 목까지 전부 검은색 복장으로 가리던 그 아닌가. 게다가 그의 손은 흉터가 가득했다. 보기와 다르게 가느다랗게 무척 예쁜 손인데, 마치 채찍에 맞은 듯한 흉터가 있었다.

“각하.”

그때 이카니엘 대공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다. 이카니엘 대공은 분명 검은 눈동자였다. 검은 눈동자에 피 한 방울을 떨어트린 듯한 그런 눈. 그런데 왜 이렇게 선명한 붉은색인 걸까.

아무리 햇빛 때문이라지만 이건 너무 선명하잖아.

문득 칼라일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칼라일도 은빛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지.

그래, 마법을 쓸 때마다 그랬어.

“이카니엘 대공.”

“네, 각하.”

“지금 나한테 마법을 걸고 있는 건가요?”

그 순간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붉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도로 검게 변하며, 대공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요.”

그 순간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눈 위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싱그러운 풀내음이 느껴졌다. 내 눈을 가린 손을 더듬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지금 제 부인에게 뭐 하는 짓입니까, 각하.”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지만.

‘근데, 뭐? 잠깐. 어?’

부인? 부인이라고?

황급히 칼라일의 손을 내리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이카니엘 대공만을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말 실수를 한 건가? 아니면……아니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카니엘 대공과 칼라일은 서로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꽤나 안 좋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적국의 마법사끼리 대치 중인 거나 다름없었다. 일단 이 상황을 중재해야 했다.

”시간.“

”?“”시간 내주시기로 한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각하.“

하지만 중재하기도 전에 이카니엘 대공이 먼저 뒤로 물러났다. 잔혹하고 심기에 거슬린 사람들은 곱게 돌려 보내주지 않는다는 대공이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나는 게 이상했지만, 다행이었다. 적국과 척을 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물론 저 미소가 정말 웃고만 있는 것인지 속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이카니엘 대공도 칼라일과 척을 지려 하지는 않겠지. 손해라는 것을 잘 알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니엘 대공은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는 까만 그을림만이 남아있었다. 이제 남은 건 칼라일인가….

”부인.“

”!“

”방금 그 자가 너에게 해꼬지 한 건 아니지? 다친 곳은 없어?“

또 부인이라고 부른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건가?

”저자가 왜 여기에 온 거야. 기분 나쁘게 남의 부인 손등에 입이나 맞추고….“

”칼라일.“

”응?“

”방금 뭐라고 그랬어?“

지금 칼라일은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부인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분명 낯간지러운 말을 하더라도 목덜미나 귀만큼은 꼭 빨개지던 그가 아닌가. 일부로 고개를 돌리자 칼라일은 왜 그러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 얼굴이 빨간데.“

”칼라일.“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열이라도 나?“

”칼라일!“

더 이상의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버럭 외치자 칼라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호칭 좀……어떻게 해봐.“

”호칭?“

”방금 나를 지칭하던 그 호칭 말이야. 당신 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

”그야 부인…이라고…불렀는데…….“

그제야 칼라일이 나를 ’부인‘이라는 단어로 불렀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의 새하얀 피부가 붉은 꽃잎처럼 점점 붉게 변하더니 이내 손끝마저 전부 붉게 변했다. 정말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싶어 붉어진 그의 뺨을 톡 건들자 칼라일은 화들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 아까 리엘 공작부부가 와서……그런데 리엘 공작부인께서 마도구가 신기하셨는지 이것저것 설명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활발하신 분이지.“

”그래서 부인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었나 봐. 다른 귀부인도 많이 왔었고. 정말 몰랐어, 어쩐지 네 얼굴 엄청 붉더라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물론 부인이라는 칭호로 불린 게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칼라일에게 그렇게 불리니 몸을 주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부부가 된 느낌이어서 그런가, 어떻게든 얼굴의 열을 식히려 했지만 후끈거리는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온몸이 붉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좋은 시간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루치아노?“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한 손에 쇠사슬을 들고 있는 루치아노의 얼굴이 가장 붉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갰다. 피범벅이었다. 칼라일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진 것은, 루치아노를 그렇게 만든 용병이 갇혀있는 지하실로 들어간 후였다.

“그러니까, 탈출하려고 했다고?”

“네. 세뇌 마법을 거느라 잠시 사실을 푼 사이 탈출하려고 했나 봅니다. 용병은 용병이네요, 마법으로 막을 새도 없이 뒤에서 쇠사슬로 목을 조르고 허리춤에 있던 검으로 찌르려고 하는 바람에….”

칼라일은 말없이 루치아노의 상처를 마법으로 지우며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 부모님이 당하신 거겠지.”

소매로 피를 닦던 루치아노의 얼굴이 아주 살짝 굳어졌다. 칼라일이 덤덤히 부모님의 죽음을 언급하자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격하게 반항하는 용병을 본 칼라일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이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내가 지하실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용병을 납치해왔다는 것을, 들켰기 때문인가.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다른 이유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나가줬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하면, 그래 줄 거야?

“이유를 말해준다면.”

“……용병을 납치해 온 건 말해주려고 했어. 이미 들켰지만, 오늘 말해주려고 했어.”

말해주려고 했다. 그래, 그건 알고 있었다.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면 아예 루치아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했겠지. 이렇게 님프 궁으로 데리고 왔을 리도 없고.

“이 용병은….”

“네 부모님을 죽인 그 용병, 그리고 도망친 놈. 맞지?”

“응. 그래서 납치했고, 가둬둔 거야.”

“그런데 나가줬으면 하는 거야?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칼라일은 대답 대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뭔가……이 상황 자체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나가줬으면 하는 이유와 관련 있는 건가. 그때 칼라일의 고개가 기계처럼 돌아갔다.

칼라일은 용병에게서 시선을 고정한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으로 입가를 더 꾹 눌렀다.

“당장이라도 이 자의 머리를 터트리고 싶어.”

그 말에 용병을 포함한 나와 루치아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물론 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럴까 봐 무서워. 억누르고 있지만, 네 앞에서 끔찍한 짓을 저지를까 봐. 지금 이런 생각을 너에게 말해버릴까 봐 두려웠어.”

칼라일의 눈에 저 용병은 그의 부모님을 죽여놓고는 도망가서 뻔뻔하게 잘 살던 놈이었다. 저 용병은 칼라일을 알아보기나 할까. 칼라일의 부모님을 죽였던 것을 기억하기나 할까.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괜찮지 않을까. 너라면 이해하지 않을까.”

칼라일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결코 미소가 아니었다. 그걸 그도 아는지 칼라일은 더 세게 입가를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네 눈앞에서 이 자의 다리나 팔을, 조금만 부러트려도, 네가 이해해주지 않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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