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앞당겨야겠어.
연회가 점점 끝나간다.
창밖으로 귀빈들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꽤나 즐거웠는지 다들 웃고 있었지만 샤를로테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나쁘다 못해 저 밑바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이노 자작부인이 전해준 이야기를 곱씹으며 비소를 흘렸다. 어쩜 내 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페르소나는 침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 지시했고, 외국 귀빈들에게는 전 황후를 시기하면서 악담을 퍼트린 여자로 낙인찍혔으며 로젤리아와 모든 면에서 비교당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제국 최초의 마법사 황후.
그 칭호가 ‘전 황후에게 마법에서조차 밀린 황후’로 변하기까지는 몇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증스러운 것들. 그렇게 칭송하고 상냥하게 대해줄 때는 언제고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버리다니. 진정하기 위해 마시던 차가 쓰게만 느껴졌다. 아니, 역겨웠다.
심지어 연구소 측에서조차 자신이 아닌 로젤리아에게 연구를 맡기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아예 연구소에 불을 지르고 싶었다. 마법사인 게 밝혀졌을 때 부디 자신의 마법 재능을 연구에 써달라며 글을 써 올리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로젤리아가 마법사인 게 밝혀지자 이제는 전부 로젤리아 쪽으로 돌아섰다.
화가 났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더 화가 났다. 이가 갈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찻잔을 바닥에 내던지기 위해 손을 높이 든 순간, 어디선가 부드러운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작고 하얀 새가 창틀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이노 자작부인이 놓쳤다던 그 새!
샤를로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새가 노래하는 것을 보자니 우울했던 기분이 천천히 회복되었다.
새를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는 부리를 살살 긁어주던 샤를로테는 미리 준비해둔 금빛 새장을 가져왔다. 기분이 나쁠 때마다 이 새를 볼 생각이었다.
알아서 새장으로 들어가는 작은 새를 보며 미소 짓던 샤를로테는 문득 새의 다리에 묶여있는 쪽지하나를 발견했다.
“누가 새에게 이런 짓을….”
가엾은 마음에 묶여있던 쪽지를 풀어줬다. 그리고 쪽지를 펼친 순간….
「 철저하네. 가명을 다 쓰고 말이야. 미엘르라니, 참 예쁜 이름이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미엘르라니, 가명…?
‘용병단…!’
너무 놀라 쪽지를 툭 떨어트렸다. 뭐야, 이거 누가 보낸 거야? 가명을 쓴 것을 누가 알고 있지? 누구야?
단순히 누군가 장난으로 묶어놓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샤를로테는 두 손을 모은 채 비틀거리며 새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샤를로테는 숨을 멈춘 채 멍하니 새를 바라보았다.
“안 돼….”
자신을 꼭 닮았던 금빛 눈동자가 녹아내리고, 부드럽던 털이 썩어 들어가더니 이내 새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썩어버린 살점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뼈가 드러났다. 너무 놀라 샤를로테가 주춤거리다가 새장을 툭 치자 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뼈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새가 죽었다. 하지만 단순히 모종의 이유로 죽은 게 아니다. 이 현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주?’
저주였다.
방금 그건 분명히 생명을 바쳐 상대에게 저주를 내리는 마법이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샤를로테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새 사체의 잔해로 더럽혀진 새장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새하얗고 푹신한 털,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형체,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와 꼭 닮은 금빛 눈동자. 그런데 모두 저주로 인해 처참하게 생명을 빼앗겨 사체 또한 온전치 못 하게 되어버렸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살점과 뼈를 겨우 주워 모은 샤를로테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손수건으로 사체를 조심스레 감쌌다.
아아, 불쌍한 새. 가끔 내 숨통이 되어주던 새가 저주의 제물로 바쳐져 끔찍한 형상으로 변하다 못해 죽어버렸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저주를 걸었지?
샤를로테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몸을 앉혔다. 나에게 저주를 건 이. 저주를 걸만한 대상은 많다. 당장이라도 특정 지을 수 있는 사람, 로젤리아와 칼라일. 하지만 일단은 이들을 배제하고 살펴보자. 이미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저 터트리면 되는 일을, 굳이 저주를 사용한다? 그들은 가장 유력하면서도 유력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내쫓은 시종들……중에서 거액을 들여 나에게 저주를 사주했을 수 있지.
하지만 저 불쌍하고 새하얀 새를 저주의 제물로 사용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저 새는 자주 샤를로테의 침실로 드나들었다.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아예 작정하고 노린 걸까? 만약 후자라면 저주를 시도한 자를 특정할 수 있는 범위는 순식간에 줄어든다.
황궁 소속의 사람들, 전속 하녀나, 시녀들……루아 남작부인?
“황후 폐하. 루아 남작부인입니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가장 아닐 것 같은 사람이 때때로 범인이기도 했다. 루아 남작부인이 아닌 것 같지만……죽은 하얀 새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용병단과 접촉하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새의 발목에 묶인 쪽지는 용병단과 관련된 내용이었으니 의심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샤를로테는 손수건을 책상 안쪽으로 밀어두고는 쪽지를 주워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아 남작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아악!”
부어오르는 뺨을 붙잡은 채 주저앉은 루아 남작부인은 샤를로테를 눈물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일 제대로 처리한 게 맞나?”
“네, 네?”
“일 처리 하나 제대로 못 해서 황후인 내가 이런 저급한 쪽지를 받아야 하나?”
샤를로테는 루아 남작부인의 얼굴에 쪽지를 던지며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쪽지를 확인한 루아 남작부인은 손을 파르르 떨더니 창백해진 입술을 꾹 물었다. 샤를로테의 눈에는 그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더 자극했다.
저주와 별개로, 어떻게 일 처리를 못 했으면 이런 쪽지가 오게 만드는 걸까.
물론 이번 의뢰도 가명을 썼다. 루아 남작부인을 대리인으로 보내 의뢰를 할 때 신분을 완전히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라고 쪽지에 적어서 보냈다. 루아 남작부인을 ‘황후를 뒷배로 둔 채 권력을 누려보려는 사람’으로 만든 셈이었다. 물론 루아 남작부인은 그것을 모르겠지.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새가 황후의 침실로 온 것도 모자라 저주에 걸려있었다는 점이었다. 누구지? 혹시 그 자인가? 용병단 아비를 둔 그 하녀? 이름이 뭐였더라, 용병단과 접촉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입막음을 한 채 내쫓은 터라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설마 그 년인가?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아끼던 하얀 새를, 정말 우연인가?
제물을 바칠 때 저주 대상과 비슷하게 생긴 생물체를 제물로 바치지. 그저 나를 닮은 새라서 고른 건가?
침착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루아 남작부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내 믿음을 이렇게 돌려주다니. 정말 고마울 따름이네요, 루아 남작부인.”
“폐,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
“기회라니. 어떻게 기회를 주겠습니까. 이렇게 일처리도 못하는데.”
“잘하겠습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딱 한 번의 실수였습니다. 그러니….”
“왜요, 라비란느가 용의자로 몰릴까 두렵나요?”
온화하게 웃으며 말하자 루아 남작부인은 애원하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라비란느를 지독히도 쫓아다니던 백작이 죽고, 백작 부인이 잡혀갔지만 부인이 조사받던 도중 자살을 했다. 억울해서 도저히 못 살겠다는 유언과 함께 죽자, 다시 재조사가 펼쳐졌다. 그리고 용의자 중 라비란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백작이 라비란느를 지독히도 쫓아다녔고, 라비란느는 그때마다 괴로워했으니까. 백작을 죽여 놓고 백작 부인에게 덮은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제기된 것이었다. 쓸 만한 패라서 일부러 처리하지 않고 가만히 나두었는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네.
“부인의 사랑스러운 막내딸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습니다,”
“네?”
“가서 용병단 장부를 가져오세요?”
물론 못 가져오겠지. 어떻게 일개 시녀 따위가 용병단 장부를 가져오겠어?
“화, 황후 폐하, 그, 그건….”
“아니면 독을 구해오세요. 한 모금만 마셔도 죽을 독.”
“독 말씀이십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내게 가져오세요. 물론 장부를 가져오면 내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 지어줄 것이고, 독을 구해오면 라비란느의 사교계 활동은 보장해주죠. 어느 쪽이든 자비로운 기회라 보는데.”
일부러 독을 선택하게끔 유도했다. 용병단 장부보다는 독이 훨씬 구하기 쉽고, 무엇보다 ‘내가 구해온 독으로 누군가 죽는다’라는 죄책감을 씌우기 위해서였다. 쓸모없이 착한 심성. 이용하기 쉬우며 쉽게 약점이 될 수 있는 그 심성. 짧게 혀를 차며 나가라고 신호를 보내자 루아 남작부인은 아까 맞았던 뺨을 감싼 채 비틀거리며 침실을 나갔다.
이제 남은 건 용병단 장부, 그리고 방금 가져오라 지시한 독.
칼라일과 로젤리아가 용병단 장부에 대해 알고 있을까?
용병단에 접촉했음을 알고 있는 시종들은 전부 입막음을 톡톡히 해두었다.
알고 있을지, 모를지…. 하지만 알고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폭로하지도 못하게, 더 이상 방해물이 되지 않게 그 독을 칼라일에게 먹일 거니까.’
***
드디어 황궁이다.
켈빈 부인은 로브를 꾹 누른 채 마차에서 조용히 내렸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중간에 마차의 바퀴가 고장 나는 바람에 걸린 탓에 초조했지만 알맞게 도착한 것 같았다. 켈빈 부인은 일부로 골목 사이를 지나가며 대공저로 향했다. 대공저로 가서 로웬을 만나고, 황궁으로 숨어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테의 악행을 낱낱이….
그러나 걸음을 빨리 재촉한 탓인지 그만 발이 꼬여 크게 휘청거렸다. 로브를 손으로 꾹 누르고 있던 켈빈 부인은 비틀거리다 벽에 어깨를 부딪혔다. 그런데 문제는 부딪힌 것에서 끝나지 않고 몸이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크게 부딪힌 켈빈 부인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벽에 부딪혔는데, 어째서 문이 있지? 이 골목은 자주 다녔던 골목이었다. 하지만 문이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켈빈 부인은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지하실인가 싶던 찰나, 손에 축축한 게 만져졌다. 설마 이마가 찢어지기라도 했나 싶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자꾸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켈빈 부인은 입을 틀어막았다.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괴물, 지하실이라기에는 너무 거대한 공간.
쇠사슬에 묶인 괴물들은 켈빈 부인을 보자 쇠사슬을 끊어내려 거대한 이빨을 들이밀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켈빈 부인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지하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켈빈 부인은 그대로 골목을 달렸다.
괴물, 왜 괴물이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얼굴만한 괴물의 눈과 마주친 순간 공포에 질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등 뒤로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켈빈 부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문이 저절로 닫히고, 이내 문이 있던 자리가 벽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