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드디어 미쳤구나.
‘미친놈….’
애초에 꿇으랬다고 정말로 꿇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한 제국의 대공이.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니엘 대공은 그제야 굽혔던 무릎을 피고 일어났다.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을 보자 어쩐지 도리어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이카니엘 대공은 테라스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샴페인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대공이 건네는 샴페인을 얼떨결에 받아들자, 등 뒤로 연회의 여덟 번째 곡이 들려왔다.
보통 레이몬드 제국의 연회에서 사용되는 곡은, 총 열 곡이었다. 물론 그 뒤에도 음악이 흘러나오기는 하지만 춤을 출 때 사용하는 곡은 아니었다.
칼라일과 다시 한 번 춤을 추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조용히 샴페인 한 모금을 마셨다. 원래 업무가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일부러 테라스 밖을 힐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바로 연락이 왔었을 텐데.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
“당황했습니다, 꽤나. 연회장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이런 건가 싶었고요.”
머쓱한 기분에 말없이 다시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자 테라스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짝을 지어서 발을 구르며 신나게 춤추는 것이 보였다. 흥겨운 춤사위에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카니엘 대공이 ‘흐음’거리며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듯 보여 섭섭합니다.”
그렇게 섭섭해 하는 얼굴은 아닌데….
“미안하군요.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저를 홀로 두고 가신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은 사과할게요. 누구를 좀……찾아야 했거든요.”
결국은 못 찾았지. 하지만 초대한 외국 귀빈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특이한 차림새였으니까. 눈을 베일로 가린 여성 귀족. 옷은 이카니엘 대공처럼 까만 드레스에 검은 보석으로 장식한 장신구를 하고 있었지. 머리카락은 커다란 모자로 전부 가려놓았고. 하지만 그런 차림새였다면 진즉에 알아차렸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이상해라.
“찾지 못했나요?”
“걸음이 빠르더군요.”
“그럼 제가 찾는 것을 도와드리도록 하죠.”
“제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보이네요.”
“알지도 모르죠. 만약 각하보다 먼저 찾게 된다면, 제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청을 말입니까?”
이카니엘 대공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리며 천천히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밤하늘을 등지고 있는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니 또다시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빛나는 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아니었던가.
“저에게 조금의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왜 그래야 하죠?”
“저는 각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데 영 관심이 없는 듯 보여서요. 매력 어필이라도 해야 각하께서 저를 봐주실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 내 쪽에서는 좋은 기회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접근했던 거니까. 그런데 이카니엘 대공은 왜?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무슨 이익이 따르지?
“대공 각하인 것을 확실히 입으로 직접 들었고, 뛰어난 업무 능력에 완벽한 예법에……한 왕국에 왕실 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이신 각하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카니엘 대공이 얻는 이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는 것은 곧 제국과도 친교를 맺고 싶다는 뜻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황실과 가장 깊게 연관된 인물이니까. 어찌 되었든 그의 목표가 이번 마력동맹국 협정이라면, 그에게 시간을 내주는 정도의 제안이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은 언제든지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런데 내가 먼저 그 여인을 찾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카니엘 대공의 눈이 다시 커졌다. 놀랄 만한 질문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의 커다랗게 변한 짙은 붉은색……아니, 한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까맣게 변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원하는 것을 들어드리겠습니다.”
“!”
“각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지 전부.”
내 머리카락을 살짝 쥔 채 입을 맞추는 이카니엘 대공은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그렇게 위험한 발언을 하시는 건가요?”
“무엇을 요구하실 생각입니까?”
거창한 것 따위 요구할 생각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베논 제국의 군사 정보.”
“!”
“……정도일까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경계할까. 순식간에 살기를 띄울까. 그의 마력이 울렁거릴까.
“어떻게든 먼저 찾아야겠군요.”
“군사 정보를 발설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까?”
“아니요, 각하.”
하지만 반응은커녕 도리어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각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요.”
“?”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각하의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이카니엘 대공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놈이란 사실을.
***
그 여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물론 일부러 찾지 않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이카니엘 대공과의 시간을 통해 마법을 쓰든 아니면 말로 잘 구슬리든 기사 보고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했으니까. 먼저 시간을 내주겠다는데 나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어쩐지 눈앞에서 사라진 여인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여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런 독특한 복장으로 연회장에 있었다면,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을 텐데, 마치 공기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도망치기까지 했고.
눈이 마주치기는 한 건가. 눈을 가린 베일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그냥 순전히 우연이었나?
이카니엘 대공이 나간 뒤 테라스에는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그러고 보니 루치아노에게 말도 없이 이카니엘 대공을 만나버렸다. 걱정할지도 모르니 나가서 데려와야 했다. 칼라일이 연회장에 도착했는지도 확인하고.
테라스 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 쪽으로 다가간 순간, 커튼이 확 젖혀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드디어, 찾았다.”
그리고 미처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도 파악하기도 전에 문은 닫히고 커튼도 다시 쳐졌다. 달이 테라스 안쪽을 비춘 뒤에야, 반쯤 취한 채 나를 찾아온 이가 페르소나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아니야.”
“네?”
“황제 폐하가 아니야, 페르소나라고 불러야지….”
취했구나.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흐릿한 포도주 향기에 뒤로 조심스레 물러났다. 들려오는 곡은 열 번째 곡이었다. 즉, 연회가 슬슬 끝에 다다랐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 귀족들이 많을 테니, 페르소나가 취한 상태로 테라스에 간 것을 목격한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취하더라도 남들 앞에서는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그이니 별로 신경은 안 쓰이지만….
“로젤리아.”
내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페르소나였다.
“내 얘기를 들어줘.”
“무슨 얘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얘기야.”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그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분명 업무가 아니라 샤를로테, 뒤늦은 집착과 후회에 관한 이야기일 테니까. 저번에도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었지. 무슨 얘기를 할지 알기에 피한 건데, 지금 피해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밖에는 몇몇 귀족들이 아직 연회를 즐기고 있을 테고, 나와 페르소나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면 또 시끄러워진다.
“언제부터지?”
“무엇을 말이죠?”
“마법. 언제부터 마법사가 된 거지?
……샤를로테에 관한 얘기가 아닌 건가.
하긴, 내가 마법을 쓸 당시 바로 옆에 페르소나가 있었다. 내가 마법을 쓰니 꽤나 당혹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충격받은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내가 마법을 쓰는 것을 지켜본 이가 페르소나였다. 찌푸렸던 미간을 누그러트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연구관과 함께 지낸 후, 그에게서 마법을 배웠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마법을 사용하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보고하지 않은 거야?”
“마법을 쓰더라도 정식적으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닌, 간단한 마법 몇 개만을 배운 것이니까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말할 순간이 없었지. 내가 마법을 배우게 된 계기가, 네가 칼라일에게 마력 제어 수갑을 채운 것부터였는데.
“그래도 나중에라도 말해줄 수 있었잖아.”
“죄송합니다.”
“…사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야.”
페르소나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려다 크게 비틀거렸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건가 싶었지만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법…….”
“….”
“마법을 배웠으면 알고 있겠네.”
페르소나는 한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샤를로테는 1황녀가 아니라 13황녀지.”
“….”
“알고 있었나?”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소나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가 지금껏 거짓말을 일삼아왔다는 것도?”
“네.”
“가련한 척 연기를 한 것도?”
“네.”
“……용병단과 접촉을 한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부 다 알고 있었지. 페르소나의 눈가가 점점 붉게 변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지?”
“말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요?”
“그래도 말했어야지. 너만큼은 나에게…!”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끝없이 말하려 했고, 그때마다 내 말은 듣지 않고 샤를로테의 말만 귀담아들은 게 바로 그였다. 내 말을 모두 시기와 질투로 바꿔 들은 것이 누구였더라? 전부 그의 업보였다. 페르소나가 자처한 일이었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그런데 너만큼은 나에게라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속이 뒤집혔지만 놀랍게도 그걸 표출해내고 싶다거나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그의 행동이 익숙해진 탓일까.
“황제와 황후의 일이면 모를까, 전남편과 불륜 상대에 관한 일은 저와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 상관이 없다고?”
“네, 상관없습니다.”
“황실의 이미지가 깎여 내려가도?”
“그때는 대공의 도리로서 최선을 다해 손을 써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정부를 들인 순간부터, 이미 예상한 것이 아닙니까.”
역시나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뿐이었다. 들을 가치가 없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말뿐이었다. 정말로 익숙해진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가 하는 말에 조금이라도 휘둘리는 것이 싫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가 내뱉는 변명 같지 않은 말들을 흘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페르소나는 나와 달리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만약 이 모든 게 내 의지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처절함이 묻어났다.
네 의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보아하니 너도 몰랐던 것 같은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그래, 모를 거야.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 순간 내 몸은 페르소나의 품속으로 끌려가듯 안겼다. 내 팔을 잡아 끈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진득하고도 달달한 와인의 향. 칼라일에게서 맡았던 싱그러운 향과는 정반대되는….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났다. 드디어 페르소나가 미친 걸까? 뒤늦게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페르소나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팔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세게 밀어내고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높이 들었지만 페르소나는 차라리 내가 폭력이라도 써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샤를로테가 나한테 세뇌 마법을 썼어.”
“…뭐?”
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안쓰럽기는커녕 붉어진 눈가와 열기를 띤 녹색 눈동자가 경멸스러웠다.
“나와 너를 포함한 모든 황궁 소속 사람들이 출신에 대해 의심하지 못하게, 네가 아닌 샤를로테를 사랑하도록 세뇌 마법을 걸었어. 결국 이 모든 게 샤를로테 때문인 거야. 네가 너를 무심하게 대한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도 전부……전부 다, 샤를로테의 마법 때문이었어, 로젤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