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방법은 하나.
그날 페르소나가 지시한 업무를, 거절했어야 했었다.
건국제 축제 연회가 진행될수록 나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황후 시절 주관했던 건국제 때는 워낙 특이한 외국 귀빈을 많이 만났었다. 꽤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정말 처음 보았다. 명백한 협박임에도 그저 웃고만 있는 이 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제가 이곳에 오자마자 들은 것은 황제와 황후가 이혼했다는 것. 두 번째는 전 황후가 대공이라는 것. 세 번째는 그 자리가 허수아비 대공의 자리라는 것, 이 세 가지였습니다.”
“….”
“각기 말이 전부 다르니 혼동이 와 뭐가 진실인지 고민했던 겁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짙은 까만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이카니엘 대공은 내 손을 들어 톡톡 건드리더니 손목을 잡고 훑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꽤 진득했다. 그 손길로 몸을 주춤거리자 이카니엘 대공은 미소를 지르며 손가락을 얽혀오기 시작했다. 이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사과, 받아주시겠습니까?”
분명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상대방을 유혹하는 행위였다.
‘이카니엘 대공….’
건국제에 온 여성 귀족들이 전부 이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잘생기기는 했다. 잘생겼기에 여러 여인을 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 상황과 딱 들어맞은 상태였다.
이런 행동은 보통 유혹으로 보는데. 유혹……하는 것인가? 나를?
나는 어쩐지 점점 붉은색 변해가는 듯 보이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유혹하는 건가요?”
“그렇게 보이나요? 다들 그러시는군요. 제가, 유혹을 한다고.”
“….”
“원하신다면 유혹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카니엘 대공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또다시 손목 안쪽을 훑는다. 그때 남자에게서 칼라일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아침 칼라일은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는데,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부분이 딱 이카니엘 대공이 키스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하필 해도 칼라일이 한 곳에 하는 것인지.
대공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반짝이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쳐냈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적당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칼라일과 비슷한 말투라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손을 쳐내자 이카니엘 대공은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뿌리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가? 내 행동에 상당히 놀란 듯한 눈치였다.
“혹시 그런 겁니까? 아까 대공의 옆에 있는 남자가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대 황후가 이혼을 하면서, 정부가 황후 자리를 꿰차는 꽤나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고. 내가 허수아비 대공이라고.”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나는 이혼한 황후고요. 그래서 어디 한번 넘어오나 해볼까. 그런 겁니까? 그런 거라면 안타깝군요. 나는 이미 연인을 두었고, 돈도 많고. 남자가 아쉽지 않은 몸이라.”
“제 말을 먼저….”
“예의를 갖춰주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오해가 되는 행동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죠.”
참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이래서 연회 때 오고 싶지 않았다. 외국 귀빈들은 내 이혼 사실에 대해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당장 제국의 귀족들조차 거짓으로 소문을 만들어내는 상황에 어떻게 제대로 된 황실의 이혼 소식을 알겠어. 내가 대공이 된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허수아비 대공이라는 말까지 도니까 외국 귀빈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겠지.
이혼한 여성은 대부분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니 이렇게 쓰레기 같은 자가 꼬일 걸 알고 있었지만…막상 겪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애.”
영애라고?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대공.”
“!”
“확실히 해두죠. 나는 허수아비 대공 따위가 아니라, 정식적으로 후계를 이은 가넷 대공입니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자 이카니엘 대공은 조심스레 손목을 놔주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군요.”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니까 곧바로 사과하는군요.”
“아닙니다, 정말로 사과드립니다, 대공. 제 모국에는 이런 가벼운 스킨쉽이 인사로 취급되었습니다. 손목을 훑는 듯한 행동도요. 이 제국에서는 유혹으로 보일 수 있겠군요.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무릎을 꿇고 사과드리겠습니다.”
“….”
“이곳에 오기 전 어느 정도 예절을 배웠어야 했는데. 모두 제 잘못입니다. 무릎이라도 꿇어서 사과드리고 싶군요.”
베논 제국의 스킨쉽에 생각보다 개방적인 나라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서적을 읽어서 알고 있다. 이렇게 손목을 훑는 행위가 은밀한 행위로 치부되는 레이몬드 제국과는 달리 베논 제국에서는 정말로 흔히 알려진 유혹기술이라는 것. 그래도 여기서는 자중했어야지. 그리고 단지 행동만이 기분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칼라일에게 한 행동, 태도. 비꼬는 말. 그 모든 게 기분이 나빴다.
“그럼 꿇어보시겠습니까?”
“…네?”
“본인 입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꿇어서라도 사과하겠다고. 못하시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무릎을 꿇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카니엘 대공은 내가 말한 대로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어둠에 잠식된 듯 까만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나 살기가 없었다. 감히, 라는 표정도 없었다. 다만, 희열에 차 있었다.
“이제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한쪽도 꿇겠습니다. 대공.”
어이가 없어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대공이 살짝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내려다볼 때는 잘 몰랐는데 아래에서 보니 확실히 알겠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는 처음 봅니다.”
릴리가 종종 사용하던, 이런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있었다.
뭐라고 부르더라. 아, 기억났다.
‘미친놈,’
이카니엘 대공은 미친놈이었다.
***
연회가 시작되었지만 샤를로테는 그 연회를 즐길 수가 없었다.
샤를로테의 침실은 꽃병이 깨지고 커튼이 뜯어져 바닥에 널려있었으며,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모두 다 이카니엘 대공이 낮에 한 말 때문이었다.
“제국에 충성을 바친 가넷 대공이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라니…참으로 기쁘시겠습니다.”
말끝을 흐리던 이카니엘 대공은 분명 자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었다. 이게 전부 로젤리아 때문이었다. 언제 마법사가 된 거지? 도대체 언제?
이노 자작부인을 통해 수소문해본 결과, 로젤리아는 왕실 마법사를 뛰어넘는 수준의 마법을 구사했다고 한다. 분명 레이몬드 제국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로젤리아가, 누가 마법을 가르쳐준 거지? 칼라일이?
마력은 어떻게 개방한 걸까? 내가 지금의 마력을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눈웃음을 치며 마법사들에게 접근해 조금씩 얻어낸 마력이었다. 칼라일의 마력석을 빼돌려 얻은 마력까지 포함해서 꽤 모였었지만, 황궁 사람들에게 1황녀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페르소나가 좀 더 나를 사랑하게끔 쓰느라 마력을 모조리 써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겨우 어린아이들의 마력을 조금씩 빼돌려 다시 빈 마력을 채우는데……로젤리아 너는 왕실 마법사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건 불공평했다. 너무 불공평했다. 왜 로젤리아만 모든 걸 가져야 하지?
로젤리아는, 정말……정말 모든 것을 가지지 않았나.
황실 다음으로 버금가는 가넷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와 어릴 때부터 예비 황태자비로서 추앙받았으며, 순탄하게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심지어 그녀는 정략결혼이었음에도 페르소나와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 정말 그녀는 모든 걸 가졌다.
심지어 이혼을 한 뒤에도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 이혼한 여성은 가문에서 내쫓기거나 죽을 때까지 저택에서 못 나오는 게 당연한 것인데!
샤를로테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법사 황후라는 칭호도, 출산 후 마력연구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압박감이 들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로젤리아가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가진 것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다. 로젤리아와 비교함에 있어 그녀보다 더 뛰어났던 것이 마법이었는데, 로젤리아가 마법에서 조차 자신을 뛰어넘는다면….
“아아아! 도대체 왜! 너는 왜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는 거야!”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대공. 마법을 쓰는 전 황후.
모든 것을 비교당할 것이다. 업무 능력에서조차, 제국민들을 보듬어주는 공감력에서조차, 말투, 목소리, 예법, 지식, 그 모든 것에서 로젤리아와 비교당하고 비난당하고, 또 비교를 당하고, 그렇게….
‘샤를로테 황후는 역시 정부 출신이라 한참 모자라나 봐.’
신분까지 밝혀진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황녀라고 밝혀진 이상, 그 기대감은 더 커질 터. 황녀라는 이미지로 인해 나에게 기대하는 바는 더 거대해질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려고 해도 쉽사리 되지 않는다. 얼마나 노력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이상적인 황후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비교당한다면?
마법에서조차 로젤리아와 비교를 당한다면!
“아아, 아악! 아아아악!”
샤를로테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무력감에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울 수도 없다. 이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울면 분명 내일 눈이 부을 테고, 그걸 본 하녀들은 내가 울었다는 것에 여러 추측들을 붙여 퍼트릴 것을. 그렇기에 마음껏 울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끝없는 원망, 또 원망하고, 또 원망하는 것뿐.
로젤리아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로젤리아는, 지금쯤 칼라일과 즐겁게 연회를 즐기고 있겠지. 당장 다음날이면 붙게 될 왕실 마법사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 가넷 대공이라는 칭호를 기다리면서.
“이건 불공평해……너무해, 왜 나한테서 자꾸, 이제야 황후가 되었는데….”
마법을 누가 가르쳐줬을까. 마력을 준 사람은, 분명 칼라일이겠지. 그래, 칼라일. 너로 인해 모든 게 망가지고 있다.
칼라일 네가 없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로젤리아가 마법을 쓸 일도 없었을 테고, 언제 13황녀인 게 밝혀질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며, 내가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로젤리아, 그리고 칼라일……. 특히 칼라일, 네가 가장 큰 방해물이야.
샤를로테는 벌써부터,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구설수가 들려오는 것 같아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 벨라 오스틴, 네가 던지고 간 거대한 거짓말도 있었지. 참. 나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적이 없는데 너 때문에 전 황후를 시기한다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쓰게 되었어!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전부 칼라일 때문이지.
칼라일, 로젤리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샤를로테는 이를 갈며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을 희번득 빛냈다.
애초에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너희들이라면, 방법은 하나다.
차라리 칼라일과 로젤리아를 죽여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