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21화 (121/170)

#121화, 그대를 어찌하면 좋을지.

“마법사라니, 마법사라니! 어째서 말씀해주지 않으셨던 겁니까, 각하!”

“세실리아와 똑같은 말을 하는 군요, 백작. 일단 진정해요.”

첫째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더니. 세실리아의 외향뿐만 아니라 성격마저 꼭 닮은 바르셀민 백작을 보며 얼얼해진 귀를 매만졌다. 벌써 열한 번째다. 어째서 마법사인 것을 진즉에 밝히지 않았느냐며 말하는 이들이.

그나마 바르셀민 백작이니까 나았다. 뒤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 뒤늦게 친근하게 다가오려 하는 이들보다는 훨씬.

“각하께서 마법사라니.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백작, 혹시 웁니까?”

“레이몬드 제국에 마법사가 벌써 다섯이라니…!”

감격하면 우는 것도 닮았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손가락에 걸쳐있던 찻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져버렸다. 떨어지는 찻잔을 잡을 새도 없었다.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몰아쉬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밖에 아무도 없는가!”

“윽……괜찮습니다, 백작. 아무도 부르지 마세요.”

그날 귀빈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놓은 마력농축액을 전부 마셔버린 탓일까.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 속, 자꾸만 이물질 같은 것이 크게 요동치면서 이렇게 통증을 동반했다. 대부분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참으려 해도 버틸 수 없는 통증은 꽤 힘들었다.

“내일 있을 협정 논의에 참여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누가 참가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백작.”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칼라일님이라도….”

“지금 칼라일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 아닌가요, 부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시종을 불러 깨진 찻잔을 치우도록 지시했다.

칼라일이 협정 논의로 바쁜 탓에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다. 칼라일이 납치해왔다던 용병에 대해 그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언질조차 없었다.

결정적으로 어젯밤, 나와 함께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님프 궁을 빠져나갔다. 밤마다 그렇게 빠져나갔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치아노의 추측대로라면 칼라일은 마수를 가둬놓은 지하실로 갔을 것이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런데 협정 논의는 그렇다 쳐도, 건국제 축하 연회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정확히 뭐라고 하던가요?”

걱정을 내비치는 것을 보니 꼭 좋은 말만 오고 가는 것은 아니었나. 물론 이번 사건에 대한 좋은 반응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좋은 얘기가 더 많습니다만, 아무래도 각하께서 마법을 사용하신 상대가 헤레이스 왕국의 왕실 마법사이다 보니, 귀빈들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냐는 등의 말이 많습니다. 칼라일님도 각하의 정부 출신이었던 것이 밝혀지면서 꽤 안 좋은 말이 많습니다.”

“정치 쪽에서는 어떤가요?”

“마법사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았던 게 맞는지 의문을 품은 자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 짐작을 빗겨나간 것은 하나도 없구나. 걱정했던 것들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리 큰 소란을 일으켰다 하나 오스틴 공작은 왕실 마법사. 왕실 마법사에게 마법을 사용할뿐더러 강제 송환까지 했으면 몇몇 외국 귀빈들은 그 태도가 좋지 않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한 제국의 대공인 내가 마법사인 것이 밝혀졌으니, 정말로 마법사가 없는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일이 피곤해질까 일부러 밝히지 않았었는데….

“곤란하게 되었군요,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거짓 소문을 조장하는 귀빈들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경고라니요?”

“안 그래도 각하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하던 귀빈이 있었는데, 폐하께서 그 이상 말할 시 본국으로 송환시키겠다고 하셨답니다.”

폐르소나가 드디어 미친 걸까? 외국 사절단들에게 그런 위협적인 말을 하디니. 안 좋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것인데! 항상 방관만 하다 소문이 잠잠해질 때쯤 뒤에서 손을 쓰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드는 이유가 뭐지?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이 오가든……건국제 축하 연회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참가해야죠.”

“이번 연회는 필참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참가하려고 합니다.”

샤를로테와 페르소나의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이카니엘 대공과 다시금 접촉하기 위해서. 결혼식 이후 이카니엘 대공을 찾아갔지만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 것인지 쉽사리 마주칠 수가 없었다. 건국제는 일주일뿐이고, 벌써 3일이 지났다. 만약 건국제가 끝나자마자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기사 보고서에 대한 실마리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될 테니, 건국제 축하 연회에서만큼이라도 그와 어떻게든 접촉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내 고민과 달리, 건국제 축하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나에게 춤을 청한 사람은 바로 이카니엘 대공이었다.

칼라일은 연회가 시작된 이후에도 일이 끝나지 않는 탓에 루치아노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칼라일이 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리거나 이카니엘 대공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다니.

루치아노가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시간은 촉박했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루치아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는 이카니엘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가 내민 손을 잡은 순간 손끝이 얼어붙는 감각에 몸을 흠칫 떨었다. 마치 시체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음악이 흘러나오자 이카니엘 대공은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이카니엘 대공은 놀라울 정도로 춤을 잘 췄다. 보통 타국의 춤까지 익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이카니엘 대공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그에게 말을 건넬 타이밍을 잡는데 그 순간 커다란 모자와 함께 눈을 까만 베일로 덮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구석에서 이카니엘 대공처럼 온몸을 까만 옷으로 치장한 여인은 어쩐지 나와 이카니엘 대공을 빤히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베일 위로 금빛의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금빛, 금빛이라고? 눈동자 색이 금빛….

눈동자가 금빛인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금빛이라니.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인지, 여인은 잠시 몸을 주춤거리다 이내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음악이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여인이 간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이카니엘 대공이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어쩐지 저 여인을 붙잡아야 할 것만 같았다. 시야에서 여인이 사라지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연회장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이 내려앉은 연회장 화단뿐이었다.

금빛 눈동자는 아주 드문 눈동자로 분류되었다. 그 탓에 안케도니아 황족들은 생김새는 특이 외향으로 구분되었고, 종종 그 때문에 배척받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눈동자가 금색인 여인이라니. 이상했다.

한참을 산책하는 척 여인을 찾아다니다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네 번째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자 뒤늦게 이카니엘 대공이 떠올랐다. 여인을 쫓아가야겠다는 마음에 음악이 끝나자마자 연회장을 나와 버렸지. 확실히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나는 춤을 추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테라스 쪽으로 나왔다. 이카니엘 대공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무안하게 만들어버렸으니….

하지만 테라스 쪽으로 걸어오자 보랏빛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대화를 얼떨결에 엿듣는 순간, 이카니엘 대공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허수아비 대공이 아니겠습니까. 여성이 대공이라니요. 애초에 이혼한 여성 아닙니까. 그것도 정부에게 자리를 빼앗긴 명예롭지 못한 여성이 어찌 대공이 된단 말입니까. 분명 허수아비 대공일 겁니다.”

“그럼 대공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러니까 그게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진짜 대공은 어디에 있고, 허수아비 대공에게 예법을 갖추자니 저희들 쪽에서 난감하고, 물론 예의를 갖추기는 할 테지만….”

“흥미롭군. 허수아비 가넷 대공이라.”

흥미로워? 흥미롭다고?

‘하….’

이런 소리를 들어가면서 굳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 하지만 칼라일과 로웬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많이 겪어보기도 했고….

하지만 역겹다. 뒤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면서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한다는 것이.

커튼 사이로 살피자 이름 모를 귀족과 이카니엘 대공이 보였다.

‘로젤리아, 네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

문득 칼라일의 말에 나도 모르게 드레스 커튼을 확 젖히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흥미로운 얘기라.”

“대, 대공 각하!”

“그 흥미로운 얘기가 무엇인지 저도 들어봐도 될까요?”

듣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

이름 모를 귀족은 갑자기 내가 나타나자 방금까지 잘도 놀리던 입을 다문 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안색이 새파래진 채 주춤거리는 귀족과 이카니엘 대공을 향해 조용히 웃었다.

“참 재밌는 이야기네요.”

“가, 각하 이건, 그러니까….”

“변명은 됐습니다. 허수아비 대공에게 하는 말이야 뻔하죠.”

이름조차 모르는 귀족. 외국 귀빈은 아니다. 그렇다면 레이몬드 제국의 귀족이란 소리인데…뭐,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카니엘 대공에게 건네던 말이나 어투를 보아 그저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류의 귀족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끌려 했나 본데….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합니다.”

“가, 각하, 제 말을 먼저…!”

“아, 허수아비 대공의 말이라 듣지 않을 생각인가요?”

할 거면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지.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있지만 사실상 축객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귀족을 황급히 테라스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드디어 이카니엘 대공과 단둘이 남았다. 그런데 딱히 이 상황이 반갑지는 않았다. 저 예법도 제대로 못 갖춘 귀족과 이카니엘 대공이 나눈 대화를 생각하자면 그도 똑같이 뺨을 쳐주고 싶지만 그는 적대국의 대공이자, 화는 나지만 어떻게든 우호적으로 지내야 하는 상대였다.

화를 낼까, 아니면 한마디라도 할까.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사이, 이카니엘 대공은 바로 한 발자국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귀족이 소문이라도 내시면 어쩌시려고….”

“내라고 하세요. 상관없습니다.”

이카니엘 대공은 눈웃음을 흘리며 정말 상관없습니까? 라고 되물었다.

“나는 이 제국의 귀족들에 대해 모두 아는데, 내가 모르는 걸 보면 분명 막 작위를 받은 하위 귀족이거나 시골 영지의 귀족이겠죠. 그런 자가 악담을 한들, 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몸을 사리겠죠. 기껏 얻은 작위, 귀족모욕죄로 다시 회수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전부 고려하신 겁니까. 대단하시군요.”

“압니다, 대단한 거. 그래서 그 대단한 머리로 고민 중이랍니다.”

이카니엘 대공의 코앞으로 다가가, 그를 따라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나에 대해 거짓 소문을 조장하는데 동참한 대공을, 어찌하면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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