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용병단의 장부
베논 제국?
안케도니아 황실을 멸망시킨 바로 그 제국?
숨이 턱 막혔다. 왜 베논 제국의 사절단이 레이몬드 제국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베논 제국이 레이몬드 제국과 정반대로 마법 강대국이자 적대국인 것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니 건국제에 올 수 있으리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왜, 왜…….
‘아니야. 정신 차려.’
이건 페르소나를 탓할 게 아니야. 베논 제국이 올만한 명분은 충분했다. 외국 귀빈들에게 보낼 초대장들을 작성할 때 귀빈 리스트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내 탓이다. 왜 못 오겠어. 내 불찰이다. 왜 베논 제국을 생각 못 했을까. 칼라일과 로젤리아에게만 정신이 팔린 탓에 미처 또 다른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카니엘 대공이랬나?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저 뒤로 마법사로 추정되는 호위 둘. 사절단 대표로 어중간한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논 제국의 목표는 마력연구소와 마법사 아이, 아벨리와 아네트일 테니까. 제국 내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를 보냈겠지.
“만나서 반갑군요, 대공.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죠?”
“대연회장의 분수대가 그렇게 아름답다더군요. 그래서 잠시 바람도 쐴 겸 나와 보았는데, 이렇게 황후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 지금 영광이라 그랬어?
만약 이 자가 안케도니아 제국을 침공할 당시 군사를 지휘했다면, 그렇다면 분명히 나를 알아볼 것이다. 안케도니아 황족에게만 내려오는 은빛 머리카락과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금빛 눈동자를 가졌으니까. 미소만 띠고 있는 터라 이카니엘 대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날 알아봤을까. 아무리 내 출신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려 해도 어떻게든 퍼지기 마련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안케도니아 제국의 제 1황녀였다.
본래 타국을 침공하거나 멸망시킬 때 죽여야 할 대상 중 하나가 황족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황실의 핏줄을 잇게 될 테니까. 혹여나 그 아이가 자라 군사를 이루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황족들을 죽인다. 아마 1황녀, 미엘르는 죽었겠지. 황제와 황후, 황태자 다음으로 권력을 가진 자가 바로 1황녀이니까. 뭐, 그래 봤자 이름뿐인 권력이지만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가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라는 것은, 분명 베논 제국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죽은 황녀가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가 되니 셈일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몸을 움츠러트리거나 도망칠 수는 없다.
나는 어찌 되었든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였다. 패전국의 황녀 출신이더라도 황후에게 손을 댈 수는 없다.
“이곳 제국 내 가장 뛰어난 실력의 정원사를 데려와 가꾼 화단이죠. 대공의 마음에 들었으면 합니다.”
“이미 충분히 마음에 듭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 흥미로운 것들에 나도 포함이 되나?
그가 내뱉는 말의 의도가 역겨웠지만 미소를 거두지는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이카니엘 대공이 침공 당시 참가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설령, 이카니엘 대공이 레이몬드 제국의 신뢰와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내가 1황녀가 아니라고 밝혀버리게 되더라도 나에게는 변명거리가 충분했다.
황실의 피를 이은 진짜 1황녀를 도망치게 만들고, 사생아를 1황녀인 척 내세우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런 류의 변명을 하면 되는 거였다.
1황녀, 미엘르. 너는 황태녀였지만, 황자가 아니니 더욱 행사나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지. 1황자는 멍청했고, 너는 그렇게나 보수적이었던 교사에게 기어코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했으니까. 1황자를 밀어내고 네가 황위에 앉을까 급급해하던 황제는 너를 괴롭히고 구박하고 탑에 가두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너의 얼굴을 아는 외국 귀빈은 거의 없었어! 행사에 나가게 되더라도 아주 잠깐 머물다 황제의 명에 의해 다시 황궁에 갇히듯 돌아가야 했지.
흥미로운 것에 내가 포함되든 안 되는 상관없었다.
베논 제국은 확실히 변수지만, 잘만 한다면 충분히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대였다. 다만 나를 내려다보듯 보는 것이 거슬릴 뿐이었다. 안케도니아 황실을 무너트린 것도 꽤나…….
‘하.’
그렇게 싫어하던 안케도니아 제국. 그래도 모국이었다 이건가. 그 제국에서 그렇게 괴로웠는데도 이렇게 적개심이 들다니.
“폐하, 안색이 창백합니다.”
“최근 푹 쉬지 못해 그런가 보군요.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모셔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대공.”
대공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기를 암묵적으로 지시했다. 그러자 이카니엘 대공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나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조용히 그에게 손을 내밀자, 이카니엘 대공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췄다.
“원하신다면 저희 쪽에서 치료마법에 능통한 마법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하지만 저희 쪽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레이몬드 제국에는 이미 훌륭한 마법사가 다섯이나 있으니 말입니다.”
……마법사가 다섯 명이라고? 왜 다섯 명이지?
칼라일, 아벨리. 아네트. 그리고, 나. 네 명일 텐데. 남은 한 명이 누구지?
“제국에 충성을 바친 가넷 대공이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라니….”
말끝을 흐리던 이카니엘 대공은 이내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기쁘시겠습니다.”
***
“지금 사교계가 얼마나 뒤집힌 줄 아십니까, 각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아일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내 두 손을 꼬옥 감쌌다. 사교계가 뒤집힐 정도인가? 물론 전례가 없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벌써 몇 명째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법을 쓰지 말 걸 그랬나? 나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는 아일라의 손을 진정하라는 의미로 천천히 토닥였다.
아일라의 말대로 사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모두 내가 마법을 사용해 오스틴 공작을 제지한 것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 당시 그 사건을 지켜보던 이들은 많았다. 당장 연구원들과 마력연구소를 둘러보기에 모여 있던 외국 귀족들. 이미 그 수만 이십은 훌쩍 넘으니 소문도 빨리 퍼졌다. 게다가 오스틴 공작이 웬만한 상급 마법사들보다 강한 마법사였다는 것을 뒤늦게 들은 나는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느껴야 했다.
물론 마법을 쓴 것을 일부러 다른 사람들도 보게끔 한 것이었다. 이 일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지, 싶어서. 하지만 결정적으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칼라일이 나에 대한 헛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퍼지면서 꽤나 난감하게 되었다.
“그래요. 아일라 양. 혹시 이 일이 기사로 나가지는….”
“….”
“이미 나갔군요.”
그래, 안 나가는 게 이상하겠지.
당장 조금 있다가 시작할 회의는 어떻게 참석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것도 마력동맹국 협정에 대한 논의 아닌가. 그걸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마법사인 것을 밝히는 일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오히려 악영향으로 다가올지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각하, 저번에 부탁하신 일 말입니다.”
“그 쪽지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용병단 회원 장부 말씀드리는 겁니다.”
용병단 회원 장부. 그럼 아일라가 가지고 왔던 저 낡은 책자가 그 장부인가? 피인지 아니면 다른 액체인지 모를 것이 잔뜩 묻은 책자를 건네받았다. 어쩐지 손끝에 닿은 감촉이 소름끼칠 뿐더러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샤를로테가 용병단과 꾸준히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로, 아일라를 통해 용병단의 회원 장부를 구해다 주기를 부탁했다. 위험한 일이니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얼마 걸리지 않았다. 책자를 펼치니 먼지가 풍기면서 그 사이로 검붉은 글씨가 보였다. 몇몇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두어 장 정도 넘기자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칼라일을 공격한 그 날, 내가 페르소나에게 이혼을 선언한 바로 그 날짜 아래, 미엘르라고.
‘하필 가명을 써도….’
용병단을 고용하면서 진짜 1황녀의 이름을 갖다 썼다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웃을 때가 아니었다. 내 예상대로 샤를로테는 가명을 썼다. 그렇다면, 샤를로테가 용병단을 고용했다는 증거는 사라지는 셈이었다. 차라리 샤를로테와 만난 용병을 직접 납치해 와 물어보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용병도 색출해내기가…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장부를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고마워요. 아일라 양.”
“어렵긴요. 칼라일님께서 도와주셔서 훨씬 수월했어요. 역시 마법사는 다르네요!”
응?
“누가 도와줬다고요?”
“칼라일님이요…로젤리아님이 칼라일님에게 보내주신 거 아니었나요?”
“내가요?”
“그럼 그, 칼라일님이 각하의 명령으로 잡아간 용병은…?”
내 명령으로 용병을 잡아갔다고?
칼라일을 아일라 쪽에 보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아일라에게 한 부탁을 칼라일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한다면 또 나서서 해결하려고 할지 모를 일이니까. 그래서 아일라 측을 통해 장부를 구해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칼라일이 어떻게 알고 아일라를 도와주러 갔지? 용병을 잡아갔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야?
“아메.”
“네, 대공 각하.”
“그 용병, 지금 어디에 있니?”
문 바로 옆에서 호위기사인 척 서 있던 루치아노는 아주 잠깐 말이 없더니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는 저도 금시초문이라 잘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하는 곳은 있습니다.”
“어디일 것 같은데?”
“마수를 넣어놓은 지하실로 추측됩니다.”
***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깨어난 남자는 눈앞에 펼쳐진 시꺼먼 어둠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자신의 몸을 뒤덮고 있는 쇠사슬 때문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다른 용병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함과 함께 술을 마시던 용병의 머리가 터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때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 보았던 것은….
“일어났군.”
눈앞에 앉아있는 저 귀족.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은빛 눈동자를 보며 흠칫 몸을 굳혔다. 시선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살기. 오랫동안 용병 일을 하면서 원한이 담긴 눈빛은 많이 보았지만 저렇게 적나라한 살기는 본 적이 없었다.
몸이 덜덜 떨리다 못해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장 풀라고 고함을 지르기는커녕 입술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이 위압감은?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묻지.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면 된다.”
“그, 그, 그게 무슨, 다, 당장 이거 풀지 못…아악!”
겨우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벅지에서부터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했다. 사람을 여럿 죽인 용병이었고, 이런 상황에는 수없이 놓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포에 몸이 휘감기는 것인지.
“내 가족들이 죽었을 때.”
“허억, 큭….”
“나는 그때 나를 찾아왔던 암살자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그중에는 너도 있었지. 부모님이 검을 맞고 쓰러지자마자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내가 마법을 쓰자마자 누구보다 빨리 도망치던 버러지. 그래, 기억해….”
용병의 다리에 검을 찔러 넣은 귀족, 칼라일이 한참을 중얼거리며 그때의 기억에 손끝을 덜덜 떨었다. 그때 마주친 암살자들 중 살아서 도망친 놈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이야. 칼라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꼬리를 서늘하게 끌어올리며 남자의 목을 비틀었다.
“누가 시켰는지 말해. 샤를로테인가? 샤를로테지?”
“커억, 흐억…!”
“당장 대답해. 대답하지 않는다면 너를 죽이고, 다시 되살리고, 또 죽이고, 스스로 죽여 달라고 말하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되살려주겠다.”
목을 놓아주자 남자는 낯빛이 새파래진 채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 없습니다. 샤를로테라는 사람은……아아악!”
“정말 없었어?”
“없었, 큭, 정말로, 없었, 습니다……!”
검을 하나 더 찔러 넣은 칼라일은 작게 탄식을 하며 피에 흠뻑 젖은 검 두 개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지하실이 크게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마수가 울부짖으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마수를 보며 다시금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고양이형 마수라 하더라도 영락없는 괴물로 비춰졌던 건지, 칼라일에게 살려 달라 빌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뭐, 뭐든 하겠습니다!”
“뭐든지?”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악!”
마수가 남자의 앞으로 다가와 입을 쩌억 벌리자 남자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마치 칼날처럼 번쩍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마수는 ‘크르르르’ 소리를 내며 당장이라도 남자를 씹어 삼킬 듯 위협적으로 굴었다.
“그래, 그럼 살려주도록 하지, 대신에.”
하지만 칼라일이 마수의 머리를 두어 번 천천히 쓰다듬자 마수는 이내 크게 부풀렸던 몸을 바짝 낮추며 그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건국제 마지막 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칼라일은 혼절한 건지 미동조차 없는 남자를 보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