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19화 (119/170)

#119화, 나는 죄가 없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페르소나는 오스틴 공작과 그의 여식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강제 송환서를 작성했다. 송환까지는 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 탓이었다.

페르소나는 망설임 없이 송환 사유를 써내려갔다.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황실에서 주관하는 마력연구의 총책임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라고 작성했다. 공격당한 것치고는 상처 없이 말끔했지만, 마법을 써 타인을 다치게 한 건 맞았으니 송환 사유로 충분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황궁 내에서 샤를로테와 로젤리아의 소문이 떠돌고 있으나, 원래 소문이라는 게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불러온 결과가 너무 컸다.

게다가 소문을 귀족들에게 전달하고 퍼트린 오스틴 공작가의 여식이 본인 입으로 ‘황후 폐하’라고 말했다.

샤를로테가 그런 소문을 퍼트렸다고……회의나 논의에 참여시키지 않고 일부러 귀빈실에 앉혀둔 건 헛소문이나 퍼트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예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한꺼번에 퍼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되지 않나, 사람을 매수해서 소문내거나 하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었겠지만……그에 따른 변명은 미리 생각해뒀으니 이렇게 직접 본인 입으로 말한 거겠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페르소나는 작성한 강제 소환서를 세츠에게 건넸다.

“지금부터 떠도는 대공의 소문을 바로 잡아라.”

“대공의 소문은 이미 가라앉은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지금은?”“황후 폐하께서 대공을 깎아내리기 위해 일부러 외국 귀빈들의 입을 통해 소문을 퍼트렸다고….”

페르소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현 황후가 전 황후를 깎아내리기 위해 외국 귀빈들에게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이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지.

“소문을 바로 잡을까요?”

“아니다. 잡을 필요 없다.”

“건국제와 결혼식을 앞당기라 지시하셨을 때 하신 말, 정말로 실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세츠는 잠시 주춤거리며 페르소나가 말했던 ‘그 계획’을 언급했다. 그러자 페르소나는 잠시 세츠를 말없이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제와 결혼식. 그건 샤를로테를 정식 황후로 만들어야 그녀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황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필요한 절차였다.

만약 샤를로테를 그냥 내쫓는다면, 분명 그녀는 나중에 출산했을 때 자신이 낳은 아이가 황손이라며 떠들고 다닐 게 뻔했다. 목숨을 걸어가며 마법을 쓰고, 정부의 자리에 앉고 온갖 악행들을 저질러 가며 얻어낸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면 아마 샤를로테는 자신이 낳은 아이까지 이용해가며 다시 황궁으로 들어오려 할 게 뻔했다.

그러면 그보다 더한 망신은 존재하지 않겠지.

아예 샤를로테를 내쫓고, 그 연까지 끊어버리려면, 샤를로테가 품은 아이를 아예 정식 황족으로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명문 귀족의 자식으로 입양 보낼 수는 있지만 위험이 너무 크고, 차라리 황족으로 두어야 샤를로테가 접근하려 하는지 감시하기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황족으로 자녀를 정성껏 키우다보면, 샤를로테가 황후로서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얼마나 자처했는지 그 아이도 알게 될 시기가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황족으로 만들지 않아도 되겠지만……어찌되었든 아이에게는 죄가 없지 않은가.

‘……황위 계승권을 쥐어줄 수는 없겠지.’

하지만 페르소나는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 만큼은, 정식 황족으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생각이었다.

결혼식을 빨리 진행한 이유도 아이를 낳자마자 황후를 쫓아낸 비정한 황제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함이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악행을 저지른 샤를로테가 황손을 낳자 더 기고만장해져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이런 식으로 일을 꾸민다면 황실의 이미지가 그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싶으면 곧바로 그녀가 한 악행들을 근거 삼아 타국이든 시골 영지로든 쫓아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로젤리아를, 다시…….

‘아까 오스틴 공작 때문에 로젤리아에게 말하지 못했어.’

되도록 빨리 오해를 풀어야 할 텐데.

“샤를로테는 지금 어디에 있지?”

“…방금 막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산책을 나갔다고?”

“네, 죄송합니다. 제가……산책하셔도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산책?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나간 건가?

“지금 당장 황후를 방으로 데리고 가라. 나오지 못하게 가둬.”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황후 폐하께서 울음을 터트리셨습니다.”

“울었다고?”

“며칠 동안 방에만 있어서 힘들다고, 너무 서럽게 우셔서….”

임신한 몸이니 되도록 방에만 있으라고 말하긴 했지만…운다니.

예전에는 약간의 동정심이라도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소름끼칠 뿐이었다. 정말로 방 안에 있어서 힘들어서 운 것일까, 정말로 서러워서 눈물을 흘린 걸까. 오죽하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세츠가 가엾다며 샤를로테를 내보내 줬을까.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럼 로젤리아가 시녀들을 시켜 감시하는 것 같다고 울었을 때도….

‘샤를로테 저 여린 것이 시녀들이 감시하는 것 같다고 우는 것이 안 보이시오? 이제 제발 좀 그만하시오, 황후!’

’폐하의 눈에는 저게 우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궁의를 보내드릴 테니 제발 시력 검사를 한 번 받아보시지요.‘

으드득, 페르소나가 이를 갈자 세츠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샤를로테가 산책하는 곳이 어디지?”

“네, 연회장 화단 쪽으로…….”

세츠는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보니 오늘 그 화단에서 외국 귀빈들의 자제들이 모여 작은 티파티를 연다고 들었습니다.”

회의와 협정 논의에 바빠 뛰어다니는 귀빈들과 달리 할 일이 거의 없는 자제들이 모이면서 열린 티파티. 페르소나는 펜으로 책상을 두어 번 툭툭 치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산책을 나가게 둬라. 그리고 이노 자작부인을 통해서 티파티가 열리는 곳을 넌지시 알려주도록 해.”

***

아기를 생각해서 되도록 방안에만 있으라고?

하, 거짓말도 할 거면 그럴듯하게 해야지. 건국제 때 사고를 칠까 봐 걱정되어 하는 말이 아닌가. 회의나 논의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전부 내 능력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잖아!

그래서 되도록이면 로젤리아와 칼라일의 소문이라도 조장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렇게 갇혀버리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노 자작부인이 외부 상황을 종종 알려주기는 하지만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아네트와 아벨리와도 못 만나게 하니, 정말로 고립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왔는데 저렇게 호위들이 따라붙으면 불편해서 어딜 제대로 가지도 못하겠고, 자제들을 만나려고 해도 저 험악한 인상들 때문에 도망치겠네. 애써 배를 쓰다듬으며 연회장 화단 쪽으로 걸어왔다. 분수대에 앉아 지난번에 만들다 만 아기 모자라도 만들며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해볼 생각이었다.

관리들과 접촉을 해야 어느 정도 세력을 펼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시녀들 말고 좀 더 권력 있고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귀족들을 끌어 모아야 하는데.

호위들을 화단 입구에 대기시켜놓고는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분수대 쪽에 왜인지 사람이 많았다.

일부러 수풀 뒤로 몸을 숨기자, 앳된 영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무슨 행사라도 있었나? 나는 왜 못 들은 거지? 살짝 고개를 내밀자 쿠키와 차를 즐기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즐겁게 나누는 거지?

“저 영애는……아일라 영애?”

최근 사교계에서 유독 로젤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보인다는 그 영애가 아닌가? 보아하니 저 티파티는 아일라 영애가 주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단순한 작은 티파티일 텐데….

하지만 그 불안한 마음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그 소식은 들으셨나요? 샤를로테 황후 폐하께서 전 황후이신 가넷 대공 각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는 걸요.”

잠깐, 악의적인 소문이라니?

“네, 저도 들었어요. 아무리 전 황후가 더 뛰어나다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것도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견제인가요?”

“맞아요. 황후라는 위치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뱃속에 아이까지 있으면서 그런 천박한 말들을 내뱉었단 말이에요?”

“벨라 영애가 그랬다잖아요. 황후 폐하께서 한 말이라 전부 사실인 줄 알았다고요.”

벨라 영애? 벨라 오스틴? 그 년이 뭐라고 했길래?

연회장에서 칼라일에게 모욕을 당했다길래 일부러 접근해서 복수심을 키우기는 했지만……왜 나까지 걸고 들어간 거야?

“황후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못 들었어요.”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이혼 후 바로 정부를 들였다고, 각하보고 정말 헤픈 여자라고 했대요.”

“네? 그게 무슨,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제정신이 아닌 이상 누가 그렇게 말해?

손끝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상했다. 왜 내 이름이 거론되는 거지? 악의적인 소문은 뭐야. 절대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적이 없다.

애초에 내가 한 말이라고는 로젤리아가 독살로 아이를 잃었다. 그래서 이혼을 했다. 이혼 후 정부를 들였다. 이 중에서 거짓이 있나?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나? 악의적인 의도를 담았나?

저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자기네들이 직접 부풀리고 조장한 말들이 아닌가!

’아니야, 침착해.’

그때 내 옆에는 루아 남작부인과 이노 자작부인이 있었어. 나는 절대 저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분명 걱정이 담긴 톤으로, 로젤리아가 이혼하고 정부를 들였다. 이렇게만 말했지. 오죽하면 내 얘기를 듣던 이들도 더 말해줬으면 하는 눈치로 나를 보았었는데.

그들도 똑똑히 들었을 거야. 헤프다니 고고한 척했다느니, 그건 전부 벨라 영애와 다른 귀족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말이었다. 내가 지어낸 말들이 아니라, 모두 저들의 탓이었다.

곧바로 화단을 빠져나왔다. 루아 남작부인과 이노 자작부인이 있으니 증언을 해줄 사람은 충분하다. 따질 거면 따져보라지. 황후로서 황궁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제국에 파견 온 외국 귀빈들에게 알려준 것뿐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오히려 진실을 알려준 것이라고.

도망치듯 화단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시녀와 호위 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어디로 간 거지?

“이런.”

“!”

“제국의 고귀한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를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새까맸다. 심지어 손에는 까만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래서 인가, 어쩐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자는 누구지? 외국 귀빈인가?

“그대는 누구죠?”

차갑게 누군지 쏘아붙이자 남자는 예법을 차리며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저는 베논 제국의 사절단 대표.”

……뭐, 잠깐. 어디라고? 베논 제국?

“누아르 이카니엘 대공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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