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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118화 (118/170)

#118화, 그대가 죽어버리면.

숨도 쉬지 못한 채 끅끅대는 오스틴 공작을 보며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공작의 목을 옥죄던 단단한 줄기가 사라지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해댔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감히 네까짓 게’라는 말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폐하, 보아하니 제 소문이 부풀려지고 부풀려지다 못해 이렇게 큰 피해를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칼라일과 나를 조롱하던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무리들을 바라보자 페르소나의 시선도 덩달아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그쪽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자,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짙은 불길이 벽을 타고 올라와 그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페르소나가 내 손을 감싸 쥔 채 천천히 내렸다. 이 이상은 나서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다.

“오스틴 공작, 이에 대해서는 크론 왕국에게 정식적으로 항의 요청서를 보내겠소.”

“항의 요청서라니요! 지금 공격을 한 건….”

“먼저 공격을 한 건 공작이지. 마력연구관이 아니잖소. 그리고 그대가 말하길, 마법사라면 이 정도 공격은 당연히 막아야 하지 않은가?”

단호한 그의 말에 공작은 시퍼렇게 멍이 든 목을 감싸 쥔 채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소문이라.”

“….”

“정확히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지?”

페르소나는 귀족들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내 뒤에서는 그렇게 잘만 나불대더니 정작 황제가 옆에 있으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마치 나에 대해서 전부 아는 것 마냥 굴더니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우스웠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는 이틀 전에 들었던 헛소문을 비롯해 이 연구소에 들어온 순간부터 듣게 된 나에 대한 소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이혼 후 바로 정부를 들였어. 정말 헤프다. 안 그래? 아이를 잃어서 이혼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일까?”

“….”

“저 마력연구관은 전 황후의 도움으로 저 자리를 따낸 거야. 아니면 어떻게 외국 출신인데도 저 자리에 앉았겠어? 게다가 정부라면서. 진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맞아?”

“….”

“정말 황후 폐하가 하신 말씀이 다 맞네.”

나는 싱긋 웃으면서 그들이 한 말 중 일부를 그대로 따라했다. 그 말 중 ‘황후 폐하’라는 단어가 들려오자 페르소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황후가 정확하게 뭐라고 했지? 대공,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지?”

“하도 많아서요, 폐하. 하지만 제가 지금 한 얘기들은 바로 어제, 벨라 영애가 다른 영애들과 하던 대화를 따라한 겁니다.”

그러자 페르소나는 살벌한 눈빛으로 벨라 영애를 똑바로 응시했다. 칼라일이 다친 순간에도 벨라 영애는 가장 열심히 나를 향해 헛소문을 계속 떠들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거부한 것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지. 안 그래? 내가 싱긋, 웃자 벨라 영애는 떨기 시작했다.

연구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애를 향하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렸다.

“그, 황후 페하께서 전 황후가 아기를 잃고 반쯤 미쳐서 악을 쓰며 이혼을 청구했다고….”

“….”

“그리고 이혼하자마자 정부를 들이고, 사치스럽게 놀아댔다고. 그 뒤로 권력을 잡기 위해 마법사인 정부를, 황궁으로 보내 마력연구관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었다고….”

“그 말이 다 사실이냐? 거짓이 있다면 왕국으로 보내지 않고 왕국의 법대로 처벌할 것이다.”

“지, 진짜입니다! 황후 폐하가 그러셨어요! 똑똑히 들었어요! 저와 함께 들은 다른 영애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황후가 전 황후에 대한 악담을 했다. 헛소문을 퍼트렸다. 이 얼마나 국가 망신인 건지.

페르소나는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새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후 폐하께서는 네게 다른 말은 안 하셨구나.”

“네, 네?”

“저자는 내 정부 출신이 맞다. 하지만 마력연구관의 자리는 내 도움이 아닌 노예시장 및 인신매매를 주도하던 범죄자를 잡아들이는데 큰 공을 기여하여 받은 자리이다.”

“하,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그리고 이혼한 후 뭐, 사치스럽게 놀아? 참으로 신기하군. 이 사람들 중 황실과 무역을 위해 가넷 무역 상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 상단을 설립한 게 바로 나다. 사치스럽게 놀았다고? 그럼 상단 설립은 물론이고 단기간 내에 후계자 교육을 받고 대공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겠지.”

정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골라 퍼트렸다. 놀라울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퍼트려서 무엇을 하려고 했지? 나를 매장시키려 했나? 나는 내내 움켜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은 채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귀족들은 눈을 내리깔고 나를 피해 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건 칼라일이었다.

칼라일의 상태는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심했다. 나는 눈물이 흘러나올까 꾹 참으며 천천히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런데 귀빈들 사이에서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치아노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아침에 루치아노는 내가 아니라 칼라일을 따라갔어.

그런데 왜 안 말리고 있었던 거지…?

루치아노는 입을 몇 번 벙끗거리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누군가 ‘어?’하고 외치며 칼라일을 가리켰다.

“아, 목에서 뚝 소리 났어….”

칼라일의 몸에 묻은 피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몸에 있는 상처도 아물었다. 아니, 아문 게 아니라 사라졌다. 부서진 벽은 칼라일이 몸을 일으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할 때쯤 다시 원상복구가 되어있었다. 마치 공격당한 게 모두 거짓이라는 것처럼.

“헛소문이라는 게 밝혀졌어?”

“카, 칼라일. 다친 게…아니야?”

“안 다쳤어. 다친 것처럼 보이게끔 마법을 쓴 거지.”

칼라일은 나를 천천히 일으켜주며 드레스 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 주었다. 그러고는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내 눈가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가르쳐준 대로 잘 쓰네. 어디 가서 마법 실력으로 지지는 않겠어.”

“……다친 줄 알았는데.”

“다치기는 무슨, 마법이 너무 느려서 눈에 훤히 보이던걸.”

칼라일은 멍청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오스틴 공작을 보며 혀를 찼다.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하지 마시죠. 마력도 별로 없으면서.”

“이, 이에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오스틴 공작,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그때는 강제 송환을 할 것이오.”

아직까지도 얼굴이 창백했다. 페르소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칼라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방금 전까지 넝마짝이었는데, 몇 초 만에 멀쩡하게 변한 칼라일을 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되었든 오스틴 공작은 칼라일을 공격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칼라일이 꾸민 짓 같지만, 칼라일을 걸고 넘어가자니 외국 귀빈과의 갈등은 제국 이미지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페르소나가 칼라일마저 걸고 넘어가기 전에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제국의 대공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리고 이를 가지고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레이몬드 마력연구관을 마법으로 공격했습니다.”

“….”

“페하께서 현명하게 처리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소. 대공.”

페르소나는 착잡한 얼굴로 나를 보내주었다. 외국 귀빈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마무리도 지어야 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린 샤를로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테니까.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나왔다.

곧장 칼라일의 팔을 잡고 마차로 갔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얼마 걷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떻게 궁으로 왔는지도 모르겠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이미 님프 궁 침실에 와 있었다.

침실이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자 루치아노가 조용히 일어났다. 내가 뭘 원하고, 어떤 상태인 건지 바로 파악한 듯 보였다. 루치아노는 방을 나간 후 문을 잠갔다. 그리고 문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의 겉옷을 거의 뜯어내듯 벗겼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했다. 칼라일이 놀라 내 손을 붙잡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친 채 셔츠를 풀어헤쳤다.

분명 가슴팍에 관통당한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멀쩡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크게 다친 줄 알았어.”

“로젤리아.”

“안 다쳤으면 안 다친 상태로 있지, 왜, 왜…!”

화를 못 참고 버럭 소리치자 칼라일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칼라일이 다쳤던 그 모습. 분명 루치아노가 강하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나 때문인가. 이틀 전에, 칼라일을 제지하지 말았어야 했나 싶어 심장이 철렁이다 못해 바닥을 구르는 것만 같았다.

울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가 칼라일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잡아들이는 게 급선무였다. 오스틴 공작을 제압하고, 헛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는 와중에서도 칼라일이 죽으면 어쩌나, 저대로 숨이 끊어질까 걱정을 했다. 그렇다고 울며 다가가 끌어안을 수는 없었다. 그게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로, 로젤리아. 미안해, 나는, 그러니까….”

칼라일은 움켜쥐었던 내 손목을 꽉 놓아주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이 정도로 날카로운 반응을 보일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는지 너무 당황스러워했다. 그게 더 미웠다. 그럼 가만히,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미안해, 나, 나는 이렇게까지 놀랄 줄 몰랐어. 헛소문을 잠재워야 하니까, 일부러 그런 거였어.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몸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자 칼라일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을 거야.”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말고….”

“이런 소리 듣기 싫으면, 다시는 그러지 마.”

팔을 뻗어 그의 등을 세게 끌어안자 칼라일은 나를 안아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자 칼라일은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때마다 칼라일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지금 느껴지는 이 온기가 차갑게 식어버릴까, 다시는 느끼지 못할까 두려웠다.

칼라일이 죽는다,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죽는 건 더더욱.

그를 꽉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뜨거워진 눈가가 가라앉을 때까지 칼라일은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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