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만약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연회장은 시끄러웠다. 처음에는 결혼식 축하 연회이니 그러려니 했다. 재혼인만큼 더 크게, 호화스럽게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몇 명 귀족들은 본인의 딸을 데려와 말을 걸며 소개시키기도 했다. 왜 데려오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황궁에서 배정받은 기사가 아니라 로젤리아와 칼라일이 직접 대공저에서 데리고 온 기사였다.
‘이래서 오지 말라고 했던 건가.’
그저 호위기사일 뿐인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와 말을 걸었다. 일개 기사한테도 이렇게 말을 거는 걸 보면 대공저에서 일할 수 있다면 돈을 주더라도 들어온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시벨이었나? 그 호위기사도 자작인데 이번에 백작 영애와 결혼 한다 그랬지.
어쩐지 더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얼굴을 살짝 가린 채 테라스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참으로 운도 없지.
하필 만나도 샤를로테를 만날 줄이야.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샤를로테를 향해 미리 배워둔 예법을 완벽하게 갖춰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샤를로테를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조금 큰 위험이 뒤따랐다. 몇 년을 만나지 않고 연을 끊었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주하면 알아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저번에 대공저에서 본 그 외국 귀빈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러나 몇 년 만에 바로 눈앞에서 샤를로테의 목소리를 들은 루치아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샤를로테가 맞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녀 샤를로테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쌍둥이 누나는 영락없는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 샤를로테 레이몬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 이 순간 황궁에 있는 샤를로테는 더 이상 네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야, 루치아노.’
칼라일이 말했던 게 무엇인지 알겠다. 황후 샤를로테라.
황족임에도 예법은커녕 품위조차 없었던 샤를로테. 아버지라는 놈은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샤를로테에게 교사를 붙여주었지만 그마저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혼자 드레스를 갈아입는 순서조차 몰랐다. 그리고 떼쓰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패악을 부렸다. 머리가 좋았음에도 전혀 응용하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불리해지면 곧바로 얼어붙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지?
“기사였을 줄은 몰랐네요. 대공저에서는 만난 이후로는 처음이죠. 경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네?”
“내가 너무 무례했었죠.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은데, 받아줄래요?”
샤를로테가 웃는다. 너무 환하게도 아니고, 억지로 짓는 것도 아니다. 딱 적당한 미소, 그래. 마치 로젤리아가 귀족들을 상대할 때 짓는 그런 미소…….
“우윽….”
“세상에, 아메 경! 괜찮나요? 혹시 몸이 안 좋은데 내가 붙잡아둔 건가요?”
걱정스러워하며 궁의를 부를 듯한 저 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속이 메스꺼웠다.
당장이라도 온갖 악행과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러가며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 기분이 어떤지 묻고 싶었다.
결혼식 때 너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 즐거웠어? 너는 내가 성에서 내쫓겨질 때도 웃고 있었어.
나를 내쫓는데 일조하고 황자들에게 칭찬을 받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도와달라고 끝없이 외쳤는데 너는 결국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돌아섰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너에게 찾아온 기회를 위해 칼라일의 삶을 망가트려놓고 로젤리아를 기어코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도 모자라 거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매수하고, 죽이고 사고를 조장하고 입을 열지 못하게 누명까지 씌웠다. 그 행위를 하는 내내 죄책감 따위는 없었나?
“몸에 안 좋습니다.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네, 그러도록 해요. 괜히 붙잡아둔 것 같아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아, 머릿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그때 샤를로테가 손수건을 꺼내더니 루치아노의 이마 부근에 조심스레 대었다. 샤를로테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만약 샤를로테가 땀을 닦아주는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얼굴을 붉히거나 샤를로테가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루치아노에게는 아니었다.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착각에, 자신도 모르게 샤를로테의 손목을 꽉 비틀어 쥐었다. 샤를로테가 짧게 비명을 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쳐냈다. 샤를로테의 머리카락과 똑 닮은 새하얀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샤를로테의 손목에는 흐릿한 멍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샤를로테와 닿았던 바로 그 순간, 루치아노는 상당한 양의 마력의 기운을 느꼈다.
샤를로테에게 이만한 마력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마력의 기운을 어디선가 느꼈었다.
‘대공, 이 자는 누구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폐하.’
‘허락되지 않은 손님은 황궁에 출입할 수 없다.’
머릿속에 스치는 대화, 그때 페르소나가 자신의 팔목을 움켜쥐었었다.
그때 느꼈던 마력. 샤를로테와 하루 종일 붙어있을 테니 마력이 희미하게 묻어났다고 생각했는데….
“황후,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폐하, 각하의 호위기사와 만났는데 몸이 안 좋은 듯 보여서….”
설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페르소나에게는 마력이 없다. 그런데도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은 샤를로테의 마력이 묻어났다던가, 마법에 걸렸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루치아노는 샤를로테의 손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작게 비소를 흘렸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본처가 있음에도 버젓이 첩을 들인 그가, 이혼한 후 갑자기 그렇게 돌변한 듯 매달리는 게 우스우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저렇게 돌변하듯 매달릴 수가 있나? 그렇게 본체만체하더니 이혼 서류를 받고 저렇게 매달린다고?
하지만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예전에 로젤리아가 해줬던 말이 불연 듯 떠올랐다.
‘샤를로테가 본인 입으로 1황녀라고 밝힌 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졌어요. 거의 죽어갈 정도로 고열을 앓았죠. 그 때문에 샤를로테가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페르소나가 놔둔 거고요.’
뜻하지 않게 샤를로테의 또 다른 만행을 알게 되었다.
‘샤를로테, 정말 황후의 자리에 앉기 위해 네 목숨마저 걸었구나.’
그 사이, 페르소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루치아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샤를로테가 또 어디서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기사를 시켜 찾게끔 지시했다. 더 이상 황실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행동은 막아야 했다. 왜 결혼식과 건국제를 앞당겼는데, 모두 샤를로테의 악행 때문이 아닌가.
앞당겨진 계획 때문에 두통이 몰려와 잠시 테라스로 나왔다.
그런데 왜 단둘이 있는 거지?
물론 샤를로테가 다른 남자랑 있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었다. 다만 그 상대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로젤리아의 외국 손님이라는 점이 충분히 거슬렸다.
“호위기사가 이렇게 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게다가 호위기사라면서 혼자 돌아다니다니. 저러다 로젤리아가 혼자 남았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저러지?
“각하는 이상한 자를 기사로 채용했군. 몸이 안 좋다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만 페르소나는 말을 미처 다 잇지도 못한 채 가까이 다가온 형체에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약간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루치아노가 돌연 손을 뻗어 페르소나의 팔을 움켜잡았다.
“지금 황제 폐하께 무슨 짓이냐, 당장 멈춰라!”
샤를로테가 제지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순식간에 바로 코앞까지 다가간 루치아노는 페르소나의 귓가에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샤를로테를 1황녀라고 믿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폐하께서도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왜 곧바로 1황녀라고 믿으신 거죠, 의심은 하셨습니까? 왜 곧이곧대로 믿으신 거죠? 정말로 샤를로테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뒤이어 따라온 말에 페르소나는 헛숨이 들이켰다.
순식간에 초록빛 눈동자 위로 희미한 공포가 떠올랐다.
페르소나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루치아노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곧바로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고, 잡아다가 처벌을 내릴 수 있었지만 페르소나는 그러지 못했다. 뒤늦게 샤를로테가 다가와 비틀거리는 페르소나를 부축했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샤를로테의 팔을 더러운 것이 닿은 듯 밀쳐냈다.
“폐, 폐하?”
샤를로테가 몸을 살짝 움츠린 채 페르소나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겁을 먹은 얼굴이었지만 페르소나에게는 더없이 역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 믿고 싶지 않다.
말도 안 돼, 아니야. 그저 일개 기사의 말이다. 들을 필요가 없어.
하지만, 칼라일 그놈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로젤리아와도 꽤 친근하게 얘기하는 것도.
만약 저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순식간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페르소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곧장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황후를 침실에 가둬.”
“네?”
“그리고 당장 바르셀민 백작을 집무실로 데려와라.”
따라온 기사에게 차갑게 명령하며 떨리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루치아노가 속삭인 마지막 말. 그게 사실이라면.
‘정신계열의 마법에는. 세뇌마법이란 게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샤를로테의 마법에 걸리셨습니다.’
로젤리아. 나는 도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한 거야?
***
로웬이 내어준 저택은 주변이 온갖 가시덤불로 이루어져 있었다. 닿기만 해도 살갗이 베여 피가 흐를 것만 같이 날카로운 덤불들이.
켈빈 부인은 그 덤불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로웬과 의문의 남자는 잠자코 소식을 전할 때까지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 자신이 샤를로테를 끌어내릴 중요한 수단이라고. 하지만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오늘이 결혼식이라 하지 않았나. 그럼 이제 정식으로 황후가 될 텐데, 게다가 건국제.
외국 귀빈들이 많이 몰린 그때, 모든 걸 말해버린다면 분명 샤를로테는 황실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이 베이고 찢겨도, 참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라벨을 위해서.
그렇기에 황궁으로 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가시덤불부터 헤치고 문밖으로 나가야 했다.
“……윽.”
멀리서 보았을 때도 날카로워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마치 날붙이에 까만 물감을 덧발라 놓은 것처럼 보였다. 살짝만 쥐었는데도 살갗이 얇게 베여버렸다. 과연 여기를 뚫고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안됐다. 건국제는 일주일이고. 이미 하루가 지나 6일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켈빈 부인은 라벨이 머물고 있는 것 근처의 저택에 있었다.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쓰러지려 하자 로웬이 특별히 배려하며 구해다 준 저택이었다. 라벨은 시골 영지에 있었고……적어도 황궁에 가려면 이틀은 족히 걸렸다.
“지금 가야 해. 지금….”
기다리라고 했지만 여기서 더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그리고 샤를로테의 성격이라면 라벨을 죽이라 용병이라도 풀 여자였다.
가시덤불을 살피면서 몸을 밀어 넣으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틈을 발견했다. 물론 살갗은 베이고 옷은 찢기겠지. 나가지 못하고 덤불에 머리카락이 거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더 이상 라벨이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켈빈 부인은 심호흡을 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숨을 참은 채 몸을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눈을 살짝 떠보니 이상하게도 가시덤불이 양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뭐지? 방금까지 앞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나? 게다가 발 앞에는 돈주머니가 놓여있었다.
아! 혹시 이게 로웬이 말한 그 ‘소식’인가?
‘이 돈으로 마차를 구해 황궁으로 오라는 소리인가?’
켈빈 부인은 돈주머니를 손에 꼭 움켜쥔 채 몸을 숙여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켈빈 부인은 마차를 구하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황궁으로 가야 한다는 집념 하나 때문에,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음을 켈빈 부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