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더러우니까.
루치아노가 울고 있다.
왜 울고 있지?
놀라 루치아노를 바라보았고, 이를 본 칼라일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루치아노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샤를로테를 바라보면서.
연화장에 오는 내내 재혼이 아니라 불륜혼이라면서 조용히 욕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우는 거지? 혹시나 아직 샤를로테에게 가족애가 남아있어서?
그때 루치아노가 나와 칼라일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분명 울고 있는데…….
그때 커다란 종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부부의 맹세를 위한 키스. 샤를로테와 페르소나가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둘이 키스를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둘 중 한 명이 넘어져 굴러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속으로 이제 막 결혼한 부부에게 하면 안 되는 말들을 조용히 내뱉던 순간, 페르소나와 눈이 마주쳤다. 페르소나의 초록빛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전남편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그렇게 썩 유쾌하지 못했다.
고래를 돌려 다시 루치아노를 곁눈질로 살폈을 때, 루치아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신의 뺨에 묻은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연회장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뺨에 묻은 물기의 출처를 찾으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소매로 거칠게 뺨을 닦았다.
뭐지? 울고 있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분명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루치아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왜 울었냐는 내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천장에서 물이 샜나 봅니다.”
“천장이요?”
“네. 그렇게 호화롭게 꾸며놓더니 예상외로 부실공사였나 봅니다.”
황제의 결혼식이다. 그것도 재혼. 부실공사일 리가 없었다.
아니면 울지 않았다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하지만 그때 우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분명 연회장을 빠져 나왔거나. 눈물을 빠르게 닦아냈겠지. 하지만 루치아노는 자신의 뺨에 묻은 물기를 눈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루치아노.”
“네.”
“괜찮아요?”
“네? 뭐가 말씀이십니까?”
루치아노는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루치아노가 보인 이상한 증세가 찜찜했지만 더는 물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물음에 루치아노가 진지하게 나와 칼라일을 아픈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클로이가 아셀라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화려했던 내 모습이 더 화려해진 것은 결혼식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클로이가 내 드레스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했던 악세사리와 구두를 보고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셀라를 내가 머물고 있는 님프 궁으로 데려왔다. 어떻게 데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스무 벌의 드레스와 차마 다 세지 못한 악세사리를 달았다가 빼기를 반복하느라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옆에서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던 칼라일도 마찬가지였다.
시종들의 손에 의해 옆방으로 끌려가는 칼라일을 보며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아셀라와 클로이가 모두 만족한 모습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방을 나오고 보니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치아노의 짧은 감상평과 함께 곧바로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다행이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연회의 첫 춤을 장식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칼라일과 나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앉아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로 향했다. 굳이 그가 잘 보이는 곳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루치아노의 외향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2층은 자리가 꽉 차버렸으니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 앉았다. 나를 막 곁눈질하고 수근대는 사람은 없었다. 칼라일과 루치아노 덕분인지, 오히려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두 손을 맞잡고 함께 홀 안으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함께 춤을 추던 귀족들은 그 둘의 주변으로 물러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샤를로테의 은발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저 완벽한 걸음걸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은 공식적인 자세였다.
그 순간 칼라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노래가 반쯤 흐른 상황에서 손을 내민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칼라일의 손을 잡고 홀로 걸어 나갔다. 나와 칼라일이 춤을 추러 나오자 춤을 추고 있던 귀족들은 이내 흩어져버렸다. 페르소나도 우리의 등장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샤를로테와 함께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로젤리아.”
“응?”
“춤 리드는 나한테 맡겨볼래?”
칼라일은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바닥을 구두로 두어 번 두드리더니 배운 적 없는 스텝으로 리드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제국에서 가르치는 형식적인 춤이 경쾌하고 즐겁게 추는 춤이라면, 칼라일이 리드하는 춤은 무척이나 유연하고 우아했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완성되는 춤인 것처럼.
“헬리오도르 가문의 일원들만 알고 있는 춤이야.”
“!”
“생각보다 잘 추네, 로젤리아.”
헬리오도르 가문의 춤. 그럼 종종 카렐리아가 인형을 들고 추는 게 이거였나?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칼라일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사람들은 나와 칼라일의 춤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레이몬드 제국에서 추는 춤과는 거의 정반대라 그런가. 그리고 춤이 끝났을 때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가 곧바로 잠잠해졌다. 페르소나와 샤를로테도 함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인지 귀족들은 두 번째 노래가 흘러나오자 서로 짝을 지어 빠르게 흩어졌다.
샤를로테가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린 채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굳이 그쪽을 보지는 않았다. 꽤나 화가 난 듯한 샤를로테가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예전처럼 빽빽, 소리 질렀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그런 행동이 독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지 샤를로테는 이내 일그러졌던 표정을 빠르게 미소 짓는 얼굴로 바꿨다.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시녀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테라스로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흡족한 마음과 함께 칼라일과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루치아노가 없었다. 기사들에게 배치된 자리에도, 구석에도 없었다. 나는 샴페인을 받아들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루치아노를 찾았다. 하지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루치아노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시선들이었다. 특히, 외국 귀빈들.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 다가오고 싶어 하는 느낌인데….
“오랜만입니다, 각하.”
“아, 리엘 공작부인.”
헤레이스 왕국에서 사절단을 보내왔다더니, 그 사람이 리엘 공작과 리엘 공작부인이었나? 부부가 이렇게 함께 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그것도 리엘 공작부인은 헤레이스 왕국 사교계의 꽃이었다. 사교계를 휘두를만한 힘을 가진 그녀가 일주일의 기간 동안 진행되는 건국제에 남편과 함께 왔다니. 그 사이 샤교계에 영향력을 뻗으려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 리엘 공작부인이 그걸 모를 리도 없고….
“가넷 대공이라니. 황후 페하라는 호칭보다는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고마워요, 리엘 공작부인. 이번 사절단에 남편분과 함께 오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엄청 고민했답니다. 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이에요. 하지만 간만에 각하도 뵙고 싶고, 무엇보다 각하의 정부였던 자가 연인이 되고 마력연구관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 저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답니다.”
……왜 왔는지 알겠군.
나는 가볍게 실소를 터트리며 자연스럽게 칼라일의 팔에 내 팔을 걸치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로젤리아?”
“리엘 공작부인. 그 옆에 있는 남자가 리엘 공작. 마력석 수출을 담당하고 있는 부부야. 보아하니 이번 마력협정 논의에 참여하러 온 것 같은데, 어떡할래? 너랑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머리를 기대는 척 속삭이자 칼라일이 이내 입꼬리에 미소를 걸었다.
“어떡했으면 좋겠어?”
“괜찮은 사람들이야. 한번 얘기해봐.”
분명 내 이혼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런 게 뭔 상관이냐는 듯 곧바로 가넷 대공으로서 대우를 해주는 것을 보면, 오히려 우리 쪽으로 호감을 쌓아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내가 허락의 의미로 미소를 짓자, 칼라일은 곧바로 리엘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엘 공작. 건국제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리오도르 백작이라 불러도 괜찮을지요, 백작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마력연구관이자, 굉장히 유능한 마법사라고.”
“그렇게 유능하지는 않습니다.”
“겸손하기까지 하군요, 각하 한 명으로도 버거운데 유능한 인재가 또 늘어나서 참 난감합니다. 각하의 마력석 수출 개선안은 잘 보았습니다. 정말 빈틈이 없더군요. 제 모국과 레이몬드 제국이 동시에 이익을 취할 수 있으면서도 적절히 협박이 담긴……보면 볼수록 탐나는 능력입니다. 물론 백작의 능력도 말이에요.”
“각하께서 워낙 뛰어나신 터라 그 명성에 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칼라일이 리엘 공작과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자 주변에 조금씩 몰려있던 귀빈들이 점차 리엘 공작과 칼라일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리엘 공작에게 말을 건네려는 척, 칼라일과도 말을 섞어보려는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다.
‘군사강대국에 마법사까지 겸한 제국과는 어떻게든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 테니까.’
리엘 공작 같은 사람은 얼마 없겠지, 아무래도.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자 리엘 공작부인이 어느샌가 옆으로 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마력연구관의 소식을 들으면서 흥미로운 다른 얘기도 들었었습니다.”
“흥미로운 얘기?”
“마력연구관의 외모가 그렇게나 아름답다는 얘기 말이에요. 그리고 확실히 외향이 참으로 수려하네요.”
수려하기는 하지. 잔을 입가에 댄 채 칼라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위치 때문인지 몰라도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어머. 오스틴 공작도 이번에 왔군요.”
“….”
“그의 딸도 함께 왔고요.”
저게 무슨 상황일까.
기억하기론 저 영애는 분명 크론 왕국의 왕실 마법사인 오스틴 공작의 딸, 벨라 영애였다. 꽤나 강한 마법사에, 크론 왕국과는 동맹 국가라 종종 사절단으로 오기는 했다……꽤나 오만한 성격이라 별로 탐탁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안 좋아지고 있었다. 공작은 왜 칼라일에게 저 영애를 소개시키고 있는 거지? 영애는 왜 칼라일에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거고? 꽤나 불편한 상황에 기분이 안 좋다 못해 불쾌해지려던 순간, 벨라 영애가 칼라일의 팔 위로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올려두는 게 보였다.
분명 리엘 공작부인이 칼라일이 내 연인이자 마력연구관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저게 무슨 예의 없는 경우지?
순식간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칼라일이 계속 벨라 영애를 밀어냈지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더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문득 벨라 영애에게서 샤를로테의 모습이 보였다.
샤를로테가 정부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 페르소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저렇게 친근하게 스킨쉽을 하는 게…….
“‘적당’이라는 것을 모르시는군요.”
“!”
“그만해주셨으면 합니다, 벨라 영애.”
싸늘하다 못해 경멸적인 어조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반쯤 몸을 일으켰다. 벨라 영애의 손을 날카롭게 쳐낸 칼라일이 억지로 화를 누르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저는 그저 옷에 먼지가 묻은 듯하여….”
“먼지가 묻었다 하기에는 너무 더듬더군요. 어찌나 더듬으시던지, 제 옷이 꼭 먼지로 이루어진 줄 알았습니다.”
“푸훕….”
리엘 공작부인은 입가를 부채로 가린 채 어깨를 들썩거리다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보십시오. 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지, 리엘 공작부인께서도 웃음을 못 참고 저렇게 어깨를 들썩거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듬는 행위는 그만해주셨으면 합니다, 벨라 오스틴 영애.”
끝까지 예의를 갖춰 벨라 영애를 상대한 칼라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없이 올려다보자 칼라일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각하께서 선물해주신 옷이 더러워져서.”
“어디가 어떻게 더러워졌는데요?”
“여기서 보여드리기는 그렇고, 괜찮다면 가서 직접 확인해주셨으면 하는데….”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격식을 갖추고 예의 있게 다른 여자를 쳐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러는 걸까. 잔을 내려놓고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자 칼라일은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맞잡았다. 은빛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게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리엘 공작부인. 괜찮다면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그럼요. 빨리 돌아가야 할 듯싶은데요? 어서 가보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칼라일은 내내 손을 잡고는 살짝 끌어당겼다. 그때 얼굴이 한껏 붉어져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벨라 영애가 보였다. 저 영애, 분명 다른 영애들과 함께 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리엘 공작부인이 나에게 다가올 때도 가까이에 있었고. 그렇다면 칼라일이 내 연인이라는 것을 들었을 텐데….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지는 얼굴을 한 벨라 영애가 겨우 고개를 든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비소가 터져 나왔다.
“영애, 몸에 먼지가 묻었습니다.”
“!”
“빨리 가서 떼어내는 게 좋겠군요. 더러우니까요.”
연회장을 빠져나오기 직전, 등 뒤에서 누군가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