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카니엘 대공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루치아노 때문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꾹 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페르소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채 어떻게든 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 이 제국의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저를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아까 한 말과 전혀 다른 말 같은데.”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조차 완벽했다. 페르소나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루치아노를 황궁에서 내쫓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혹여 제가 큰 무례라도 범한 건지….”
“…아니다. 에르비앙 왕국은 이 제국과 언어가 다르니. 그럴 수도 있지.”
루치아노는 지금 ‘에르비앙 왕국에서 온 외국 귀빈, 아메 티스트.’였다. 에르비앙 왕국은 그 왕국만의 언어가 따로 있었다. 루치아노는 그 점을 이용하고 아주 잘,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페르소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루치아노를 보며 걸음을 돌렸다.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순수한 얼굴로 묻지 말아줄래요?”
루치아노는 웃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나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미소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루치아노와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온몸 구석구석으로 벌레가 기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에 숨을 참아야 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기분 나쁘고, 끈적한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 느낌, 마력이었다.
이렇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분 나쁜 마력의 기운은 처음 느꼈다.
그걸 루치아노도 느낀 건지, 허리에 찬 검을 꽉 움켜쥐었다, 루치아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제 막 황궁 앞에 도착한 마차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는 까맸다. 마치 불에 그을린 것처럼 까맸고, 마차에 달린 문장은 오묘하게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저 마차는 이미 여러 번 보아온 마차였다.
“베논 제국의 마차….”
녹슨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차와 똑같은 색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온몸이 까맸다. 머리카락도 까맸고, 눈동자도 까맸다. 아닌가, 살짝 붉었다. 그리고 황후 시절 때는 몰랐는데…엄청나게 기분 나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세 명의 마법사도 마력이 꽤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젤리아님. 저 남자가, 혹시….”
“네, 맞아요.”
이날만을 기다리게 한 장본인.
로웬이 걸려버린 마법에 대한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 모를 그 남자
‘이카니엘 대공.’
황후 시절에는 그저 뛰어난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양이 상당했다. 루치아노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기분 나쁜 마력, 어디서 많이 느껴본 마력인데…?
“마수 같네요.”
“마수?”
“마수의 마력과 비슷해요. 저 정도면 마법사가 아니라, 마수라고 봐도 무방하겠어요.”
그 정도라고? 그러고 보니 루치아노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있었다. 검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페르소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카니엘 대공을 계속 눈으로 쫓고 있었다.
“루치아노.”
“….”
“루치아노. 나 봐요.”
그의 팔을 잡고 내 쪽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이 이카니엘 대공에서 나에게로 옮겨져 왔다.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두려워서 그러나?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 무서운가? 루치아노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팔을 손으로 꾹 누른 채 어떻게든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걸음을 떼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 등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숨도 쉬지 못한 채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분명 페르소나와 대화하고 있던 이카니엘 대공이 바로 내 뒤에 서있었다. 사실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랜만이군요, 황후 폐하, 아니지. 로젤리아 영애.”
“……이렇게 매번 건국제 때마다 와주니 고맙군요. 이카니엘 대공.”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칼라일이 왜 걱정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짐승이 눈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대의 마력에 잡아먹힌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하지만 그 위압감에 겁을 먹거나 몸을 움츠리지는 않았다. 이 정도 마력이면, 로웬에게 걸려 있는 마법 정도는 충분히 다룰 수 있겠지, 딱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애? 지금 나에게 영애라는 호칭을 쓴 거야?
이혼 소식과 결혼식에 관한 것은 들었어도 대공이 되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나 보군.
“날이 갈수록 더더욱 아름다워지시는 군요, 영애.”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기분이 점점 더 불쾌해지고 있었다. 과연 이 사람이 단순히 이혼 소식만 들었을까? 그 누구보다 레이몬드 제국의 흠을 잡아내기 위해 애쓰는 베논 제국의 사절단 대표인 그가?
하지만 이카니엘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굽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예의를 차리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손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감촉과 마력이었다. 직접 만져보니 알겠다. 로웬에게서 흘러나오던 그 마력과 비슷하다. 비틀린 입꼬리를 억지로 피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고맙군요. 대공. 오늘 건국제를 즐겁게 보내기를 바랍니다.”
차갑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쩔 수 없다. 실마리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와 좋은 관계, 우호적인 인상을 유지해야 했다. 루치아노와 함께 황궁으로 들어가는 내내 뒤에서 끈적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 신경써야 하는 것은 이카니엘 대공이 아닌, 루치아노였으니까.
이카니엘 대공과 대화하는 내내 좋지 않던 그의 얼굴은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토해냈다. 루치아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랬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테라스 난간을 잡고 비틀거리던 루치아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틀어막았다.
“루치아노, 괜찮아요?”
“저, 저는 괜찮아요. 그냥, 놀라서…마력이 너무 강해서….”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얼핏 보인 그의 손목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손으로 팔을 꾹 누르고 있는 건 보았는데 얼마나 세게 누르고 있었으면 멍까지 들까. 루치아노는 자신의 손목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일까요?”
“?”
“안케도니아 제국을 침공할 때,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이요.”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이카니엘 대공을 지칭할 때는 언제나 잔인하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전장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에 붙은 칭호였다. 전쟁을 지휘하면서 그가 침공하고 멸망시킨 소국들이 꽤 여럿 된다고 들었다. 그러니 어쩌면 안케도니아 제국의 멸망도 이카니엘 대공에 의해 벌어진 일일지도 몰랐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죠. 그리고…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엄청 기분 나쁜 마력을 두르고 있더라고요. 마력량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건가요?”
“정확한 측정은 어렵지만 저보다 많고, 마력 자체가 거대하고, 강합니다.”
루치아노의 마력도 평균 마법사들보다 월등히 많다고 들었는데?
“얼마나요?”
“마법으로 대결을 하게 된다면, 질 거예요.”
“아마도?”
“아니요, 제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요.”
“…그럼 칼라일은요?”
이카니엘 대공이 칼라일보다 마력이 많을까?
내 물음 루치아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
샤를로테는 마주 앉아있는 외국 고위귀족들을 보며 황후가 되었음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페르소나가 나오지 말고 귀빈실에만 있으라기에 살짝 불안했다. 하지만 그 불안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빈실에는 외국 귀족의 영애들이 오기 시작했다. 페르소나가 왜 자신을 여기에 남겨두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외국 고위귀족을 상대하는 것 또한 황후의 일이라고 들었다.
물론 무역이나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조금 버벅거렸지만 점점 그 대화들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한참 대화가 진행될 때쯤, 샤를로테는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몬드 제국은 강대국이니, 묻고 싶어도 쉽사리 물어볼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바로 이혼에 관한 이야기.
“폐하와 전 황후인 대공 각하는 원래 사이가 안 좋았어요. 그러다가 독살 사건에 휘말리면서 아이를 잃으셨죠.”
“세상에, 아이를요?”
“어쩜 그런 끔찍한 일이….”
샤를로테는 일부러 눈물을 훔치는 척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혼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심스러웠던 점은 그들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 묻는 경우였다. 물론 물어본다면 1황녀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극적인 것만 골라 말해준다면 내 신분에 대해서는 알아서 묻어져 갈 것 같았다.
“아이를 잃고 나서는요? 어떻게 되었나요? 이혼은 누가 먼저 말했나요?”
크론 왕국이랬나? 크론 왕국에서 온 왕실 마법사의 딸. 벨라 오스틴이었나. 아직 어린 티가 풀풀 났다. 데뷔탕트도 이제 막 치른 것 같은데, 가쉽거리 몇 개 던져주면 알아서 퍼트릴 것 같았다.
“이혼을 먼저 제시한 건 황후 폐하셨어요. 독을 마시고 아이를 잃으셨던 탓이었죠.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각하를 보듬어주려고 했지만, 결국 이혼을 하시게 되었네요. 한동안 슬퍼하셨죠.”
“세상에,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이혼을 하셨는데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으셨다고요?”
“네, 그리고……정부를 들이셨어요.”
영애들이 정부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긴, 여성이 남자 정부를 들이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게다가 바로 이혼한 직후. 이혼한 황후가 다음날 바로 수려한 외모의 남자 정부를 들였다.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아주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샤를로테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정부의 얼굴은 보셨나요?”
“네, 봤죠. 왜냐하면 그 정부가…아.”
샤를로테는 입을 막으며 ‘이런 말하면 안되는데….’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영애들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나, 어서 듣고 싶어서 안달 난 눈치들이었다. 영애들은 샤를로테를 재촉했다.
“말해주세요, 황후 폐하. 저희도 알아놔야 혹시 모를 일에 대비라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혼했는데 정부라니. 이혼한 게 혹시 정부를 들이기 위해서인가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정부가 누군지는 안답니다.”
그런 영애들을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됐다. 이대로라면 이번 건국제는 이혼이 아닌, 로젤리아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 정부가, 이번에 마력연구소에 임명된 마력연구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