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금붕어보다 못한 기억력
“황궁에 마차가 그렇게 많이 도착했나 봐.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많은 외국 귀빈들이 왔다고 하던데?”
문틈으로 시종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부터 외국 귀빈들이 도착을 했다고? 올해는 더 많은 귀빈들이 미리 왔다고 했다. 물론 건국제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미리 제국에 도착하여, 황제와 협정이나 무역에 관해 논하다가 건국제 날 이를 축하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로젤리아. 준비 다했어?”
타국의 마법사가 마력연구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까.
마법사가 단 한 명도 없는 군사강대국 레이몬드 제국에 마법사가 생겼다. 이는 타국들이 충분히 경계할만한 사안이었다. 마법사와 더불어 군대까지 갖추게 된다면 자칫 잘못하면 먹힐 가능성도 커지니까. 아마 그것 때문에 더 많이 온 거겠지. 미리 동맹을 맺거나 평화 협정을 이루기 위해서.
“매일 수수한 드레스만 입다가 화려한 거 입으니까 더 예쁜 것 같아.”
“너무 화려하지는 않아? 장식을 덜 붙일 걸 그랬나.”
“무슨 상관이야, 너무 예뻐, 결혼식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쓰지 마. 굳이 우리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드레스가 흰색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굳이 전남편과 정부의 결혼식 때문에 눈치 봐가며 드레스를 골라 입고 싶지는 않았다. 흰색으로 입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배려였다. 분명 무슨 말이 나오겠지만 괜찮았다. 그들은 내가 결혼식을 축하해주면 속으로는 저주한다 할 것이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미련이 남았다, 말할 테니까.
“아, 잠깐만 기다려봐.”
서랍에서 붉은 보석으로 장식된 붉은 끈을 꺼내 느슨하게 그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풀고 있는 게 더 매력 있지만 아무래도 느슨하게 묶어주는 게 더 깔끔할 것 같았다. 칼라일은 머리를 묶어주는 내 손을 감싸 쥐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황궁에 가면 외국 귀빈들 앞에서도 저렇게 웃게 될 텐데….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분명 외국 귀빈들은 마력 연구소를 보고 싶어 할 테고, 칼라일은 마력연구관이니까….
“걱정하는 거라도 있어? 왜 그래?”
“그냥. 여러 가지로.”
“혹시 이혼 때문에 그래?”
“그런 것도 있고, 네 걱정도 있고.”
“제국의 이미지가 떨어질까 봐 그래? 하긴 말이 오고 가겠죠. 멸망한 제국 출신의 마법사가 마력연구관 자리를 맡았으니까.”
“황후였다면 제국의 이미지를 더 신경 썼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러면?”
끈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소문의 중심에 있어서 수군거리는 게 얼마나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칼라일이 단지 멸망한 제국 출신의 마법사라는 것과 더불어, 내 정부였다는 것까지 귀빈들이 알게 된다면 그렇게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같이 있고 싶지만, 대공이다 보니 그럴 수는 없다.
“로젤리아 옆에 함께 있고 싶은데.”
“나도 그래. 하지만 이번 일 열심히 준비한 거 아니까. 잘 하고 와.”
정확히는 즐겁게 준비했지. 칼라일은 마법 연구한다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식사하러 내려오지도 않고 바르셀민 백작이 지금껏 연구한 보고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을까.
“일에만 너무 빠지면 안 돼.”
나는 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
“안 아프면서.”
“아닌데, 진짜 아픈데….”
칼라일은 내가 꼬집은 볼을 감싸 쥐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힘주어 꼬집기는 했는데, 진짜 아픈 건가 싶어 그의 뺨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살짝 빨개진 것 같다고 생각한 그 순간, 입술 위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진짜 미쳤나 봐!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며 그의 어깨를 휙 떠밀었다. 하지만 칼라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좋기는 한데….
일곱 번 정도 입을 맞췄을 때쯤, 손을 들어 그의 다가오는 입을 막았다.
“스킨쉽에 너무 야박해.”
“네가 너무 자주하는 거야.”
“한 번도 직접 해준 적 없잖아.”
“자꾸 사람들 많은 곳에서 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단둘이 있을 때는 해도 된다는 거야?”
정말 한마디도 안 지는구나. 칼라일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하필 시녀들이 세팅을 완벽하게 해놓은 탓에 오늘따라 더 잘생겨보였다. 얼굴에 뭐 바른 거야? 피부가 왜 이렇게 깨끗하지? 속눈썹은 왜 이렇게 길고….
나는 그의 뺨을 감싸 쥔 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어?”
눈을 보고 할 자신이 없었다. 다이아몬드 같은 눈을 볼 때마다 얼굴이 자꾸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재빠르게 손을 치우고 방을 나가려는데 나를 곰인형 끌어 안 듯이 안은 채 허리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약간 뭐랄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얼굴이 보였다.
“한 번만 더 해줘.”
“싫어.”
“눈은 왜 가렸어, 한 번만 더 해줘, 응?”
“이, 이제 나가야 하니까 마저 준비해.”
“아직 시간 있잖아. 준비 다 했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마말고….”
나를 올려다보며 귀엽게 애교를 피우던 칼라일의 눈이 문을 향했다. 뭔가 당황스러워 하는 눈빛이라 나도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네다섯 정도의 하녀들과 칼라일 못지않게 차려입은 루치아노와 눈이 마주쳤다.
루치아노는 가만히 나와 칼라일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루치아노?”
“루치아노, 웃으면서 나가지 말아요!”
그를 밀치고는 문을 열자 얼굴을 붉힌 채 수군거리는 하녀들이 보였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어쩜 그렇게 알콩달콩 하시지?”
“진짜 예쁘고 잘생긴 두 명이서 그러고 있으니까 눈앞이 반짝반짝해.”
하녀들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이제 또 시종들 사이로 ‘대낮에 두 명이서 진득한 애정행각을 벌였다.’라는 소문이 퍼질 걸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문 잠그고 하세요, 칼라일님.”
“건국제 끝나면 문부터 바꿀 거야.”
태평한 그의 말에 말없이 그를 노려보던 찰나, 루치아노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과 금색이 조화된 제복에 허리춤에는 검이 있었다.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샤를로테와 닮은 얼굴 때문에 황궁에서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불안했지만 이렇게 보니 또 마냥 샤를로테와 비슷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 번만 더 말할게요. 나는 가넷 대공이니, 업무 수행 도중 샤를로테와 만날지도 몰라요.”
“괜찮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요. 보더라도 원망 밖에 안 들것 같아요.”
과연 정말 그럴까…. 하지만 지금 와서 하지 말라고 해도 순순히 따를 그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황궁으로 갈 시간이었다.
샤를로테와 페르소나의 결혼식까지도 이제 3시간 남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황궁에는 이미 많은 외국 귀빈들이 와 있었다.
건국제가 아닌데 이렇게 많이 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력연구소를 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협정 때문에? 저 중 몇 명은 이번 일로 우리와 척을 지려고 할 수도 있고 평화 협정을 맺으려 할 수도 있다. 마차 창문으로 보이는 귀빈들 중 몇 명은 익숙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차 창문을 통해서 보니 페르소나가 몇 명의 귀빈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그의 얼굴을 보자, 내리기가 싫어졌다. 이 귀빈들은 페르소나와 내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까? 따로 황후를 들일 거라는 것도? 전 황후인 내가, 그를 도와주는 것도?
내리기 싫다. 정말 싫다. 어떤 말이 오갈지 짐작하니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안 내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만이다. 국교 논의와 마력연합 동맹 회의의 대리참석이 끝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야지.
“로젤리아, 괜찮겠어?”
“안 괜찮아. 안 괜찮은데, 어쩔 수 없지.”
소문이라면 지겹다. 지겹지만... 그래, 이것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정리한 채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페르소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을 휙 피해버렸다.
“저런 놈과 널 같이 두어야 한다니 치가 떨릴 정도로 싫지만….”
“나는 괜찮아. 어서 가.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칼라일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정말 가기 싫은 듯 보였지만 억지로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아까부터 칼라일을 기다리고 있던 바르셀민 백작은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칼라일과 함께 마력연구소로 향했다. 칼라일이 사라지자 어쩐지 곁이 쓸쓸해진 느낌이었다. 그나마 루치아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로젤리아님.”
“?”
“황제가 오고 있어요.”
루치아노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로 페르소나가 내 눈치를 보며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대공.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 샤를로테는 없었다. 왜 없지? 결혼식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귀빈들과 인사는 나눠야 할 텐데. 일부러 데리고 나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나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걸까.
“황후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지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소문이 퍼진 겁니까?”
“소문?”
“어떻게 퍼졌습니까? 제가 정부를 시기해서 쫓겨난 것으로 퍼졌습니까, 아니면 제가 폐하께 이혼을 선언한 것으로 퍼졌습니까?”
그놈의 보호 명분인가? 샤를로테가 귀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상처 입을 수 있다. 이건가? 벌써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지 피곤해 보이는 눈을 문질렀다.
“황후는 지금 다른 귀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소. 그리고 알다시피 임신 때문에 몸이 무거워서….”
“그렇군요. 부디 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임신 얘기가 나오자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내 앞에서 샤를로테의 임신 얘기를 꺼내다니. 나는 페르소나와의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페르소나를 피해버리면 분명 소문은 더 커질 게 분명했다. 보아하니 내가 이혼을 먼저 말한 게 아니라, 황제가 이혼을 제안한 것처럼 소문이 퍼진 것 같은데…이혼한 황후 주제에 아직도 자신이 황후인 줄 안다, 그런 속 긁어놓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회의실로 미리 들어가 있자는 생각에 루치아노를 데리고 그를 지나치려는데, 페르소나가 루치아노의 팔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대공, 이 자는 누구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폐하.”
“허락되지 않은 손님은 황궁에 출입할 수 없다.”
정말 시시각각 시비를 거는구나. 나는 페르소나와 루치아노를 떨어트려 놓았다. 루치아노는 자신의 팔목을 말없이 털어내고 있었다.
“제 호위 기사들이 모두 휴가를 간 탓에 오늘만 일일 호위 기사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호위기사라고?”
“아메 티스트라고 합니다. 저번에 저택에서 한번 뵈었지요. 저를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텐데 어쩐지 루치아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손님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설마 예전처럼 또 다른 정부를 들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 작게 헛웃음을 내뱉으며 반박하려는데 루치아노가 눈을 크게 뜬 채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세상에. 폐하의 기억력은 정말 금붕어보다 못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