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10화 (110/170)

#110화, 샤를로테를 끌어내려야 해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루치아노가 페르소나의 개인적인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서신을 자세히 읽고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좋은 기회, 그래. 좋은 기회긴 하지. 단순히 외국 귀빈들을 상대하는 일이 아닌, 자주 마주쳐야 하는 업무를 지시 받았으니까. 아무래도 베논 제국 사절단 대표와 자주 마주칠뿐더러, 대화할 기회도 얻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베논 제국에서 과연 누구를 사절단 대표로 보내느냐였다.

만약 마법사가 아닌 고위 귀족이 온다면 결국은 이 사건의 실마리를 얻기는커녕 결국에는 진실은 저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꼭 알아내고 싶었다. 로웬과 칼라일, 루치아노 이 세 사람이 연관된 일이니까.

다시 서신을 펼쳐 참여 인원을 확인했다. 베논 제국과의 마력동맹국에 관한 협정 논의이니 누가 올지도 분명 적혀있을 것이다. 손끝을 따라 리스트를 따라 내리자, 베논 제국이라 적인 글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카니엘?”

“응?”

“내가 아는 그 이키니엘인가….”

이카니엘 대공을 알아?

내가 그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칼라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분을 숨기고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간 적이 있어. 그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성이 이카니엘인 유학생이 있었어. 꽤 친했는데 갑자기 성격이 완전히 돌변하더니 공격적으로 변하더라고. 그때 그 애가 전공하던 게 흑마법이라, 부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연 그만두더라고.”

“그 이카니엘이 이 이카니엘이야?”

“으음, 아닌 것 같아. 그 애가……아, 그래. 타국 자작가의 영식이었어.”

“다행이네. 그럼 아니겠네.”

하긴, ‘그’ 이카니엘 대공일 리가 없다.

베논 제국의 누아르 이카니엘 대공. 제국 내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이자, 잔혹하고 가차 없기로 유명한 남자. 베논 제국에서 마법사들을 관리하는 단체의 소속이자,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것도 없이,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것을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마법사들은 물론 군사까지 꽉 쥐고 있는 사람이니, 이카니엘 대공이라면 확실히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겠지. 하지만 베논 제국의 대공과 레이몬드 제국의 대공으로 마주하는 이 자리는 루치아노의 말대로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페르소나가 한 짓은 짜증나지만.

“위험할 것 같은데….”

“응?”

“사절단으로 어중간한 실력의 마법사를 보낼 리는 없지. 강한 마법사를 보낼 거야. 그런 놈이랑 너를 단둘이 둔다니 걱정돼. 나도 일이 있어서 계속 네 옆에 있을 수도 없고.”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리고 황후 시절에도 몇 번 나는 이카니엘 대공을 종종 상대했어. 괜찮아.”

“하지만 평범한 호위 기사를 데리고 마주하게 하는 것은….”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물론 예전에 이카니엘 대공을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은 나도 마법사였다. 칼라일이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마력을 감지할 수 있으니, 이카니엘 대공의 마력에 짓눌리거나, 영향을 받아 몸이 악화 되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의 주변에 있는 호위들도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일 테고.

“그럼 제가 갈까요?”

“안 돼요.”

“…맞아, 안 돼.”

“그럴 줄 알았어요, 왜요, 샤를로테 때문에요?”

샤를로테와 더불어,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한 말이었다. 샤를로테와 닮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게 된다면 한껏 예민해진 샤를로테는 분명 확인하려 들 테고, 그렇게 된다면 용병이든 뭐를 쓰든 확인하려 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하지만 저만큼 베논 제국의 마법사에게 눌리지 않을 마법사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혹시 모를 때, 만약에 대치라도 하게 된다면 저라도 있어야지요. 물론 로젤리아님도 이제 마법에 능통하다지만 다른 마법사들보다는 아직 미숙한 것은 맞고요.”

확실히 루치아노의 말이 일리가 있기는 했다. 로웬과 베논 제국의 군사 지원. 안케도니아 제국의 멸망. 헬리오도르 가문. 이와 관련된 정보를 캐내는 것은 충분히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의 신분이었어도 쉽게 못 알아낼 것들인데….

“그리고 저는 샤를로테를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샤를로테가 벌을 받는 것이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저로서는….”

“그만.”

“칼라일님.”

“그만해.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절대로.”

칼라일은 서신을 무심하게 구기며 루치아노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네가 원한다면 로젤리아의 호위를 맡아.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만약 누군가, 특히 샤를로테가 네 정체를 알아본다면 곧장 돌아가.”

“…저를 너무 걱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걱정.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루치아노도 칼라일이 하는 말들이 단순히 걱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헬리오도르 가문의 일원이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

“나는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

가문이 멸문당할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칼라일은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

“뭐? 건국제가 앞당겨졌다고?”

샤를로테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궁의의 만류에 다시 천천히 누웠다. 건국제가 앞당겨졌다. 한두 달이나 남은 건국제가! 이렇게 갑자기? 그럼 결혼식도 앞당겨졌다는 건가? 갑자기 왜?

“설마 라벨 영애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하지만 그 일은 페르소나도 함께 덮은 일이 아니던가. 심지어 그때는 나에게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그럼 끝까지 이해해야지. 이렇게 태도를 바꾸자면 어쩌자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직접 와서 언급이라도 해주면 좋잖아. 도대체 왜 건국제가 앞당겨진 거지? 왜?

설마 로젤리아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나?

‘폐하께서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그날, 칼라일이 정말로 황후 폐하를 위협했냐고 말입니다.’

‘…뭐라고?’

‘그게 아니라면 폐하께서 칼라일을 위협했는데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인지…폐하께서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설마 정말로….

젠장,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필 이럴 때 의심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페르소나가 그 일에 대해 물어본다면 발뺌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까. 하지만 계속 불안함에 시달린 탓인지, 이제는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궁의에게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이제 지겨워졌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궁의를 내보낸 뒤, 일간지를 펼쳤다. 하지만 일간지를 펼치자마자 보이는 자신의 이름과 신분에 관한 기사들이 보이자 샤를로테는 울분이 터져 비명을 지르며 일간지를 구겨 벽에 던졌다.

건국제가 앞당겨지든, 결혼식이 앞당겨지든, 일단 이 일부터 잠잠하게 만들어야 했다. 페르소나가 나서주지 않는다면,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루아 남작부인.”

“네, 네! 황후 폐하.”

샤를로테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루아 남작부인을 불렀다. 며칠 만에 돌아온 루아 남작부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헬쑥해져 있었다. 왜 그리 스트레스를 받는지, 라벨 영애가 반쯤 미쳐서 난동부린 것 때문에? 아아, 그랬지. 몸에 불을 붙여 죽으려 했다고 그랬지 참. 겨우 그거 때문에 저러나. 자기 몸에 불이 붙은 것도 아니고.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샤를로테는 주소가 적힌 쪽지와 함께 편지와 보석꾸러미를 그녀의 발밑에 던져주었다.

“그 주소로 가면 뱀처럼 생긴 남자가 있을 거야. 그 편지와 보석꾸러미를 주고 다시 돌아와.”

“이,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전해주고 오면 네 막내딸 라비란느 영애에게 접근하는 그 변태 백작, 내가 없애줄게.”

그제야 반쯤 죽어있던 부인의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그제 정말이십니까?”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니라 없애주겠다고. 그게 편하잖아?”

“그, 그렇긴 한데….”

“이제 와서 백작이 불쌍하다느니 헛소리 내뱉지 말고 빨리 가. 그 백작, 요즘 정부를 더 들이고 싶어서 가난한 가문의 영애들을 살피는 것 같던데. 그렇게 예쁜 막내딸, 정부 안 되게 지키셔야지?”

또 정부를 들이려 한다는 말에 루아 남작부인은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라비란느가 그 변태 백작의 정부가 되게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곧 늪에 빠진 듯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쥐고 있는 이 편지. 이 편지에 적힌 것이 무엇일까. 혹시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져 있고, 그래서 이로 인해 죽는다면?

켈빈 부인이 죽은 것처럼 자살로 위장 당해 죽는다면? 이번에는 누구를 죽이려 하는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에 동참한다는 게. 편지를 쥔 손에 점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나는 어떡해야 하지.

그때 누군가 루아 남작부인의 손에 들려있던 편지를 빼앗아갔다. 샤를로테의 새 시녀로 들어온 이노 자작부인이라는 여자였다. 루아 남작부인은 뒤늦게 편지를 되찾으려 했지만 이노 자작부인은 말없이 쪽지와 보석 꾸러미도 앗아갔다.

“도, 돌려줘, 그건 황후 폐하께서 나에게…!”

“황궁에서 웬 소란이지?”

그때 바로 뒤에서 황금 장미가 그려진 부채를 든 아일라 영애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루아 남작부인이 그대로 굳어 곧바로 예법을 갖춰 인사하자, 아일라 영애는 미소를 지으며 샤를로테가 꺼낸 편지를 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커지다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건 내가 전달하도록 하지.”

“아, 그, 그건 황후 폐하께서!”

“알아. 그러니 내가 가져간다. 네가 뭘 받기로 했는지는 모르나,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이건 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화, 황제 폐하의 명…?”

“너는 두 시간쯤 후에 황후 폐하께 가서 일을 완수했다고 말하고, 다시 휴가계를 제출해라. 그리고 오늘 있던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발설할 시엔 네 혀가 온전하지 못 할 것이니.”

아일라 영애는 편지와 쪽지를 드레스 소매 안쪽에 넣고는 이노 자작부인과 함께 그대로 돌아섰다. 루아 남작부인은 아일라 영애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텅 빈 눈동자로 딸의 사진이 들어있던 목걸이를 매만지던 루아 남작부인은 정확히 두 시간 후, 샤를로테에게 가서 일을 완수했다고 말했다.

***

다음날,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울 만한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다.

「 정부를 15명이나 들인 뮬렌 백작이 본처인 뮬렌 백작부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백작부인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그녀의 화장대에서 정신병 진단서와 약들이 대거 발견되고 옷장 안에서 피 묻은 드레스를 찾아내면서 곧바로 뮬렌 백작부인을 체포했습니다.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굉장히 끔찍하게 훼손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 」

그 기사들을 읽는 샤를로테의 입가에는 고운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더 이상 신문에는 자신에 대한 신분이나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샤를로테는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같은 시각, 샤를로테와 같은 신문을 보고 있던 켈빈 부인은 책상을 쾅 내려치며 벽난로에 신문을 집어던졌다.

자신의 동생이 자살까지 결심하며 폭로하려 했던 샤를로테의 악행이 모두 묻혔다. 이 살인사건은 분명 샤를로테가 저지른 일임을 켈빈 부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벨은 어찌되는 것인가. 라벨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기사를 본 이상,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샤를로테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해….”

켈빈 부인은 눈을 부릅뜬 채 방안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이주가 흐르고, 건국제 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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