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건국제와 결혼식이 이렇게 앞당겨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적어도 한두 달 정도 남은 건국제 아니었나.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에 따르면 결혼식을 우선적으로 진행하고, 건국제를 그 뒤에 진행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두 행사를 진행하는 날짜가 당장 이주 뒤라는 것이었다. 일정이 맞지 않거나 부득이하게 건국제의 날짜를 조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앞당기는 것은 드물었다.
‘그 이유는 샤를로테 때문이겠지만.’
아일라에게 부탁해 샤를로테에 대한 쪽지를 보낸 날, 건국제를 앞당긴다는 소식을 듣게 되다니. 지금쯤이면 황궁이 난리가 났을까. 아니면 페르소나는 또 이 일로 인해 홀로 끙끙 앓고 있을까.
“왜 웃고 계십니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나는 그대로 눈을 또르륵 굴리며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치아노가 피가 묻은 손을 손수건에 닦아내고 있었다. 칼라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칼라일이면 모를까, 루치아노에게 샤를로테가 곤경에 처한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의 누나인데.
“일이 잘 풀리다니요? 사업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하지만 워낙 감이 좋은 그였다. 숨기려 해봤자 금세 들통 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사실 어제 아일라 양이 찾아왔었어요. 아일라 양이 페르소나의 명을 받아 샤를로테에게 시녀를 붙여두었다더군요.”
“감시용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샤를로테가 불법 용병단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루치아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용병단, 분명 그 전에도 접촉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용병단을 이용해서, 칼라일의 부모님을….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감시용 시녀를 붙여둔 것을 보면, 페르소나가 샤를로테에 대해 뭔가를 의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저번에는 정말 샤를로테가 칼라일을 공격했냐고 묻기까지 했으니까요.”
“제가 물어본 것은 그게 아닙니다.”
루치아노는 잠시 망설이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퍼뜨리셨나요?”
“…루치아노.”
“그 아일라 양이, 남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 맞나요? 어제 온 그 여인분이시죠. 그런데 왜 아직 알리지 않으셨죠? 루비 양을 불러서 지금 당장….”
“루치아노.”
“정말로 황제가 샤를로테를 의심하고 있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아니요. 나는 알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이럴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알리지 않을 거라 말하자 루치아노의 눈이 다시 커졌다. 나에게 이유를 묻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묻고 싶은 것은 나인데. 왜 이렇게 샤를로테 얘기만 나오면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인지.
심지어 자신을 공격한 로웬과 손을 잡아가면서까지, 몸을 혹사시키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면서까지 샤를로테에게 타격을 입힐 만한 계획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가끔 보면 루치아노의 적의는 칼라일보다 더 거대하고 느껴졌다. 분명 자신의 혈육일 텐데. 쌍둥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궁에서 내쫓고 연을 끊고 살았다지만 이렇게까지 남처럼 생각하고 어떻게든 무너트리려 안간힘을 쓰나?
“내가 하지 않아도 페르소나가 알아서 처리하려는 것 같아요. 봐요. 건국제와 결혼식이 당장 이주 뒤에 시작된다고 공표되었어요.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물어요. 아마도 이렇게 빠르게 시작하는 이유가, 샤를로테 때문일 가능성이 크고요.”
건국제와 결혼식 관련 기사를 톡톡 두드렸다.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운 기사에는 페르소나의 초상화와 샤를로테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었다. 한참을 기사를 들여다보던 루치아노는 샤를로테의 초상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적의로 가득 찼던 그의 눈동자에 옅은 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샤를로테를 바라보는 눈빛은 건조했다.
“로젤리아님은 워낙 현명하시니 옳은 선택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지만 아주 미세한 떨림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는 로젤리아님이 가진 무기를 쥐고만 있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다가올 건국제 때 모든 것을 터트려주세요……저는 그럴 생각이거든요.”
그럴 생각이라니?
“켈빈 부인을 건국제 때 데려갈 생각인가요?”
“켈빈 부인의 안전은 제가 보장합니다. 라벨 영애도요. 그게 맞는 거잖아요.”
“…샤를로테의 악행은 끔찍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해요. 하지만 그 일을 루치아노 그대가 주도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샤를로테의 쌍둥이 동생이라서요?”
“나야말로 물어보죠. 샤를로테에게 정말 단 한 조각의 마음도 남아있지 않나요?”
가족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끈끈한지. 당장 부부인 나와 페르소나와의 연도 이렇게 질기고 질겨서 제대로 끊어내지 못하는데, 가족애는 더 심하겠지. 루치아노는 직접적으로 묻는 내 질문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치아노의 말대로 나는 이 무기를 계속 쥐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칼라일도 망설이고 있던 것.
아일라를 통해서 샤를로테가 13황녀라고 밝히게 한 이유는 그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것이었다. 때마침 아일라가 와서 그 계획을 앞당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최종계획은 건국제 때 샤를로테의 모든 만행을 밝히는 것이었다.
아일라가 전해준 말을 곧바로 신문사에 직접 제보하지 않은 것은 불안감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단지 샤를로테에게만 복수하는 것이 아닌, 페르소나에게도 절망을 맛보게 하기 위해. 나는 황후였고, 황후를 위해 어린 시절을 모두 바쳤다.
나는 황후의 자리를 자의로 내려온 것이지만 사실상 페르소나의 변심으로 인해 한참을 괴로워하다 뺏긴 셈이나 다름없었다. 페르소나가 뒤늦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가슴이 찢어지게 괴로운 것도.
한쪽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잘라내는 게 맞았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 전남편? 그저 샤를로테와 나란히 손을 잡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건국제가 앞당겨진대. 결혼식도 그러니 그때 샤를로테의 악행을 모두 밝혀버리는 것은 어떨까.’
‘….’
‘샤를로테가 한 짓은, 이미 선을 넘었어. 너에게 한 짓과 더불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댔으니까……혹시 칼라일 네가 싫다면 나 혼자 할게.’
‘…그럴 리가. 너와 지내면서 행복했지만, 한 번도 샤를로테를 원망하는 것을 그만둔 적은 없어.’
루치아노와 몇 년을 함께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도와준 것도 많았고,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대 중 하나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칼라일과 나의 원망. 황실의 몰락, 샤를로테의 몰락을 바라고 있다고.
그러나 샤를로테를 끌어내리는 것은 루치아노의 하나 남은 혈육의 몰락을 지켜보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가만히 루치아노를 바라보았다. 루치아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샤를로테에게 단 한조각의 마음도 없냐는 내 질문에 루치아노는 뭐라고 대답할까.
루치아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저로 인해 망설이지 마세요.”
입고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린 루치아노는 그제야 샤를로테의 초상화를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망설이지 말라니.
‘이미 건국제 때 모든 것을 밝힐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만약 루치아노가 마음이 있다고 대답하더라도, 나는 아마…그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두리뭉실한 그의 대답을 들으니 속이 약간은 답답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로웬.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이 상황에서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다리는 게 답이었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건국제 당시에는 분명 외국 귀빈들을 마주할 것이다. 특히 베논 제국의 대표 마법사들을 직접 마주하게 될 것이다. 기사 보고서에 묻어있던 마력, 그 마력이라면 분명 티가 날 것이다.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라고 했으니, 대표로 올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은 로웬이 발작을 일으킨 후, 칼라일이 했던 말이었다.
‘로웬에게는 이중 마법이 걸려있었어. 아마 고통스러워하던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이중 마법?’
‘단순해. 마법이 두 개 걸려있었다는 거지? 기억을 억지로 눌러두고, 조종하게 만드는 마법까지. 둘 다 세뇌 마법이자, 흑마법이야. 루치아노는 이중 마법인 것을 모르고 치유 마법을 썼고, 그로 인해 역으로 다시 마법이 발동된 것 같아.’
‘기억이 억지로 지워진 것은, 그래. 이해해. 그럼 조종 마법은….’
‘확실하지는 않아. 다만 로웬에게 걸어놓은 마법 술식이 워낙 까다로워서…하지만 그게 정말 조종 마법이라면….’
‘….’
‘헬리오도르 가문의 멸문 지시, 그건 로웬의 의지가 아닐지도 몰라.’
로웬의 의지가 아니라니. 그럼 그건 누구의 의지였지?
애초에 베논 제국으로의 군사지원도 배후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차라리 기사 보고서를 더 뒤져본다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또 페르소나의 집무실에 잠입하여 보고서를 빼올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여러 가지 상념 때문에 서류에 영 집중하지 못한 채 저녁이 되었다. 그 사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온 릴리가 대공저로 돌아왔다.
릴리의 눈은 실명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큰 흉터가 남을 거라는 게 의상의 진단이었다. 얼핏 본 상처는 잠시 보아도 깊게 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릴리는 몇 달간 왼쪽 눈에 붕대를 감은 채 생활해야 했다. 딱히 불편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문제는 로웬이었다.
“로웬님이 갑자기 왜 그렇게 변하신 거예요?”
릴리는 로웬이 자신을 공격하고 큰 흉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보다 로웬이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 더 충격인 것처럼 보였다. 어떤 부상을 달고 와도, 심지어 마취도 없이 수술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던 그였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눈을 매만지던 릴리는 이내 입술을 꾹 물었다. 나 또한 뭐라고 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이 일이 베논 제국과 관련이 있나요?”
“…릴리, 방금 뭐라고 그랬니?”
위험한 일에 휘말려 들게 하기 싫어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그냥 말을 안 한 것뿐이에요. 샤를로테 그 여자랑 똑같이 생긴 루치아노를 외국 귀족으로 위장시켜 저택에 머물게 하는 것도, 로웬님이 쓰러진 그날 칼라일님께서 황급히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도 이상했어요.”
“….”
“저번에 싸웠잖아요. 루치아노랑 로웬님이랑. 그때 들었어요. 사실 그때 저도 모르게 들어버려서……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날 이후부터 로웬님이 조금씩 통증을 호소하셨어요. 티는 안 내셨지만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가슴 부근을 계속 두드리고.”
“그때부터 그랬다고?”
로웬이 이 저택에서 가장 많이 접촉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릴리였다. 그렇다면 확실히 나보다 로웬의 상태나 변화를 가장 먼저 파악하고 있었겠지. 계속 심장의 통증으로 인해 아파했다는 것도 로웬의 몸에 있던 마력과 상관있는 것이겠지.
“베논 제국의 군사 지원인지 뭔지, 그거 때문에 그런 건가요?”
릴리에게 말해줘야 할지….
하지만 말했다가는 영문도 모를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들이기는 싫었다. 지금 당장 명확하게 아는 것도 없고….
“로웬님께서 그러셨어요. 기억에 베논 제국에 군사 지원을 나간 적이 없다고요. 사실, 로웬님께서 지원을 나가시기 전에 저한테 꼭 편지를 하셨어요. 이번에는 어디로 가고, 언제 복귀할 생각인지. 물론 편지에 적인 날짜에 돌아온 적은 극히 드물었지만요….”
군사 지원을 나가면서도 릴리에게 계속 편지를 했다고? 차가운 냉혈한도 검이랑 결혼할 것이라는 것은 다 거짓말이었군.
“편지에 베논 제국으로 군사 지원을 나간다는 내용이 적힌 것은 딱 두 번 뿐이었어요. 그것도 로젤리아님이 막 황후가 되었을 때였고요. 기사 보고서에도 나와 있을 거예요!”
“그래, 나도 안단다. 하지만 확인하려고 해도 전부 페르소나의 집무실에 있으니….”
“로웬님의 서재에도 복사본이 있잖아요!”
…잠깐, 뭐?
기사 보고서가, 복사본이, 서재에 있다고?
놀라 굳어버린 나와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서재로 달려갈 것처럼 움직였다.
“어디 있는지 아는데, 필요하시다면 제가 지금 가져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