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정말 끔찍한 여자였습니다.
이노 자작부인이 말한 샤를로테에 대한 평이었다.
“왜 신분 세탁을 하고 들어가라 했는지 이제 이해되더라고.”
세츠는 시종이 가져온 찻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녀들과 다른 시종들에게는 끔찍이도 잘 한다 던대.”
“그렇게나 말입니까?”
“라벨 영애를 놓쳤다고 하니 당장이라도 찻잔을 던질 기세더니, 중간에 하녀가 들어오자 표정을 싹 풀고 환하게 웃는다고 말했어. 왜 그 포악한 성격은 잘 안 알려졌다 생각했는데…….”
이노 자작부인을 샤를로테의 옆에 둘 수 있도록 입이 무거운 사람을 매수하고 가짜 추천장까지 써준 세츠 경의 누나인 아일라가 가볍게 비소를 터트렸다. 소매 안쪽에서 보석을 꺼내들었다. 모두 샤를로테가 이노 자작부인에게 준 보석들이었다. 하나같이 값이 비싸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이노 부인처럼 아일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하녀들이나 시종들이라면 이 보석을 갖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려고 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여자가 준 것들이야. 네가 알려준 것보다 더 영악하고 간교하면서 똑똑한 여자야. 알고 있었어? 폐하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
세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보석들을 사면서 들인 예산을 자신이 직접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시녀나 시종들을 매수했을지 모른다는 주의를 페르소나의 비서에게 듣기는 했다만 정부에게 지급되는 예산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기에 그 가능성을 가장 낮게 잡고 있었다.
심지어 샤를로테는 받은 패물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쓰도록 해달라며 자신에게 가져온 적도 있었다. 그래서 검소하고 성품이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했다. 비서에게 샤를로테가 저지른 악행 몇 가지를 들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이 가슴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그 중 빼돌린 패물들을 사치스럽게 쓰는 게 아니라 시종들을 매수하는데 쓰다니.
“시종들을 매수하는 데만 쓴 게 아니야.”
“그럼 또 뭔가를 했습니까, 누님.”
“나는…이 황궁에서 쫓겨난 시종들의 수와 그 사유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데.”
“네?”
“이노 부인의 말로는 그 여자가 폐하께 불려가기 전에 이걸 주더군.”
아일라는 몸을 뒤로 기대며 샤를로테에게 받은 쪽지를 쥐고 흔들었다.
“이제 황후가 될 여자가 용병단 암호를 어떻게 알까.”
“용병단…?”
“레이몬드 제국에서는 승인받지 않은 용병단이 불법인 것은 너도 알 거야.”
“…이제 당장 한두 달 뒤면 황후가 되실 분이니, 승인받는 용병단은 당연히 이용하지 않았겠죠.”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가넷 가문과 꽤 연이 깊은 가문이지. 그래서 수고스럽게 사람을 매수하고 가짜 추전장까지 조작했어. 그런데 황후라는 여자가 이렇게 더러운 수법을 쓰는 여자였다고?”
아일라는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로젤리아에게 받은 사파이어 팔찌를 매만졌다. 자신의 가문의 상징인 사파이어. 가문의 일원 중 사파이어를 몸에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가주뿐이었다. 가주를 노렸지만 그 당시 가주는 장남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그렇기에 포기하려던 찰나 이 팔찌를 받았다.
로젤리아가 이런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니.
“아무튼 이 사실은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힘들겠지만 한동안 시녀 일을……누님?”
조금 더 두고 볼 일.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지.
아일라는 용병단 암호가 적힌 쪽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파랗게 빛나는 사파이어를 톡톡 두드렸다.
***
샤를로테는 마른 침을 삼키며 페르소나의 앞에 섰다. 외출하고 온 것인지 그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어딜 갔다 왔을까. 샤를로테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페르소나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보아하니 정식적인 외출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분명 신분을 위장한 채 나갔다는 소리일 텐데.
“일간지.”
“….”
“네가 황녀인 것을 누군가 신문사에 제보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나?”
혹시 신문사에 직접 갔다 왔나? 샤를로테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때 위축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제 발 저린 행동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샤를로테는 들고 있던 일간지를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황궁 사람들일지 아니면….”
“가넷 대공이나 마력연구관이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네. 그도 그럴게, 마력연구관은 이미 저를 위협한 전적이 있어서…혹시 원한을 갖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칼라일이 샤를로테를 위협했다는 말에 페르소나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아주 잠깐 일그러졌다 펴진 페르소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과거에 했던 말과 비슷하게. 하지만 이번에는 가련한 척하지 않고 침착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면서.
“폐하도 아시다시피, 마력연구관은 저와 약혼자 관계였고, 저를 자주 위협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건 마력연구관으로 취임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황실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잘 대해줍니다. 그러니 가장 유력한 사람은….”
샤를로테는 말끝을 흐리며 페르소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미소를 지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 상념도 페르소나의 보좌관이 찾아오면서 끊겼다. 샤를로테는 자신을 보고는 낯빛이 창백하지는 세츠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며칠 전만에도 자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던 남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된 반응이라니?
“황후 폐하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다. 얘기는 끝났으니. 황후는 이만 가보시오, 몸도 무거울 텐데.”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침묵이 더 많았는데, 얘기가 다 끝났다고? 하지만 샤를로테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상황을 더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어차피 칼라일이 그런 것 같다고 넌지시 말해뒀으니, 불이익이 따르기는 할 것이다. 황궁 안의 이야기를 밖으로 새어나가게 하는 자는 벌을 받으니까.
샤를로테는 부른 배를 감싼 채 온화하게 웃고는 기사들과 함께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이 닫힌 순간 페르소나는 입가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짓말을 한 것일까.”
“네?”
“모든 게 거짓말이다. 모든 게, 전부 다 의심스러워.”
페르소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눈은 한껏 죽어있었다. 거짓말, 모든 게 거짓말이다. 샤를로테의 말 속에서 진실은 없었다. 아무리 제 잘못을 숨기고 싶어 한다지만 애꿎은 사람을 들먹이면서까지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것일까. 이제는 샤를로테가 내는 목소리마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세츠 경. 뭔가 하나라도 알아낸 것이 있나.”
“아, 네.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아서….”
“말해보도록.”
세츠는 잠시 망설이다 아일라가 주고 간 쪽지를 페르소나에게 건넸다.
“황후 폐하께서 이노 부인에게 준 것이랍니다.”
“이게 뭐지?”
“용병단 암호입니다.”
용병단? 페르소나는 충격 받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있던 비서도 놀란 것인지 숨을 급하게 들이 마시며 두 눈을 부릅떴다. 불법 용병단은 모든 제국민들이 꺼려하는 집단이었다. 그런데 황후가 될 자가 불법 용병단까지 손을 대었다면 일은 정말 커질 때로 커진 것이다.
“폐, 폐하. 이건 정말 아닙니다. 만약 정말로, 정말 1황녀를 13황녀라고 속였다고 합시다.”
비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페르소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만약 샤를로테가 정말로 1황녀라고 거짓말을 했다 치자. 하지만 용병단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이건 정말 선을 넘었습니다.”
“그만.”
“폐하. 지금이라도 샤를로테 황후를 내치셔야 합니다. 용병단을 고용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를 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제국민의 비난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을 아직 치르지 않았으니….”
“그만하라는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용병단, 그 용병단을 이용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을까. 누구를 해치려고 했을까. 그 비용은? 페르소나는 황제인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던 라벨 영애가 떠오르자 이마를 짚었다. 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샤를로테의 악행을 고발하던 그 모습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영애의 피가 배인 손가락과 덜 자란 손톱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샤를로테가 직접 처벌하려 했다던 켈빈 부인은, 정말 자살이었나. 기사들 말로는 라벨 영애가 켈빈 부인의 시신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시신은 어디로 간 거지? 설마 그것도 샤를로테가….
“세츠 경.”
“네, 네! 폐하. 하문하십시오.”
“결혼식을 앞당겨야겠다.”
그 순간 샤를로테를 내쳐야 한다며 주장하던 비서의 낯빛이 기절할 것처럼 새파랗게 변했다. 페르소나는 미친 사람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제가 뭔가를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무례가 아니라면, 한 번만 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건국제에 초대하기로 한 외국 귀빈들의 초대장을 다시 가져와라. 내용을 새로 써야 할 테니.”
페르소나는 차갑게 중얼거리며 손에 들린 쪽지를 천천히 구겼다.
“결혼식과 건국제를 빠른 기일 안으로 앞당겨야겠다”
***
“여기는 어쩐 일인가요, 아일라 양?”
아일라는 자신의 눈앞에서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로젤리아를 보며 사파이어 팔찌를 꽉 움켜쥐었다.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지, 그 생각 하나로 대공저까지 왔다. 황궁의 이야기를 밖으로 전달하는 것은 귀족 평민 상관없이 죄를 받지만…이렇게 큰 얘기를 로젤리아에게 안 알릴 수는 없었다.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대공 각하.”
“잘 지냈답니다. 아일라 양이야말로 알렌 영식을 밀어내고 가주 자리를 얻어냈다고 들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어쩐 일인가요?”
자신에게 온화하게 미소지어주는 로젤리아를 보며 아일라는 사파이어 팔지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 팔찌를 줄 때도 로젤리아는 저렇게 웃고 있었다. 아일라는 용병단 암호를 따로 적어둔 쪽지를 꺼내 로젤리아에게 건네주었다.
“대공 각하. 지금 샤를로테, 그 여자가 용병단을 고용해서 누군가를 해치려 합니다.”
“…아일라 양, 그게 무슨 소리죠?”
“사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원래였으면 보좌관인 제 동생 세츠에게 지시하셨겠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저에게 명을 내리셨죠. 샤를로테에게 붙일만한 사람을 구하라고요.”
샤를로테의 이야기가 나오자 로젤리아의 눈동자가 매섭게 변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위압감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에 아일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각하께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그 도움을 돌려드리려 합니다. 이 쪽지가 용병단 암호입니다. 각하, 이거라면 샤를로테를 끌어내리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로젤리아는 아일라가 가져온 쪽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용병단 암호. 암호는 시시각각 바뀌는 용병단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나 다름없었다. 이걸 이용해서 용병단을 잡아들이고, 그들의 적어놓은 고객 리스트를 찾아 추적한다면 샤를로테가 용병단과 접촉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일라 양, 괜찮다면 제 부탁을 들어줄래요?”
그 사실을 로젤리아가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아일라의 생각과 달리 로젤리아는 뜻밖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대공 각하,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일라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으리라 확신한 채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방금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 그게 무슨….”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로젤리아에게 받은 것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세츠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페르소나의 침실로 찾아왔다. 세츠의 손에는 쪽지 하나가 들려있었다. 누군가 세츠의 집무실 책상에 놓고 간 쪽지였다.
페르소나는 환복 도중 찾아온 세츠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그가 전달하는 또 다른 쪽지를 보고는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 쪽지에는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 샤를로테 안케도니아는 사실 1황녀가 아니라 13황녀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확인해보세요. 그 당시 1황녀는 비록 이름뿐이지만 황태녀였으며, 이름은 미엘르 안케도니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