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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106화 (106/170)

#106화, 신분이 밝혀져 버렸다.

라벨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남자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황제가 왜 자신을 감옥이 아닌 방을 내주었는지, 왜 불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샤를로테의 악행을 다 까발려서? 본처를 버젓이 두고 첩을 들인 황제답다. 직접 오지도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입이라도 막을 생각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제 언니마저 죽어버린 이상 라벨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강에 몸을 던져도 아깝지 않을 목숨이었다.

그러니 예전이면 모를까 황제가 보낸 이 남자가 무섭지 않았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생겼든 그저 원망스럽다는 생각뿐이었다. 라벨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꾹 물었다.

그때 기사들이 라벨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거칠게 잡아당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치 귀빈을 다루듯 정중하게 보석이 가득 박힌 의자에 앉혔다.

“…저를 왜 여기로 부르신 거죠?”

“폐하께서 묻고 싶은 게 있으나 사정이 생겨 저를 보내셨습니다.”

“묻고 싶은 거라니요? 저를 땅에 묻어버리는 게 아니고요??”

“샤를로테 황후 폐하와 관련된 것입니다.”

샤를로테. 그 얘기가 나오자 라벨의 눈빛이 더 사납게 변했다. 그 이름을 듣자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샤를로테, 그 천사같은 얼굴로 악마보다 더 끔찍한 속내를 감춘 샤를로테. 남자는 라벨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날의 기억을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기억을 말씀하시는 거죠?”

“손톱이 뽑혔던 그날 말입니다.”

라벨은 무의식적으로 드레스 자락으로 손을 가렸다. 손톱이 모조리 뽑힌 손은 흉터와 더불어 손 떨림이 찾아왔고, 피가 자꾸 배어나와 일상생활이 힘들어졌다. 남자는 반 쯤 자란 라벨의 손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라벨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고개를 휙 돌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황제가 왜 그때의 이야기를 묻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직접 덮어버린 일이 아닌가? 손톱이 뽑힌 이야기는 샤를로테의 얼굴에 뜨거운 차를 뿌리면서 생긴 정당한 처벌로 바뀌어 있었다. 실상은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는데!

“대답해주십시오.”

“어차피 덮어버린 일이 아닌가요?”

“라벨 영애의 말에 따라 이 일이 평생 덮어질지 아니면 모두에게 드러날지가 정해질 것입니다.”

그제야 라벨은 다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샤를로테의 악행이 모두에게 드러날 수 있다고? 저 말을 믿어도 될까? 원하는 것을 다 들은 뒤에 내 목을 베어버린다면?

‘……언니.’

하지만 이미 다 잃었고 내 애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쪽에 거는 게 맞겠지….

“실수였어요.”

“….”

“아무도 안 믿었지만, 실수였습니다. 그때 샤를로테가 입고 있던 드레스의 끝에 걸려 넘어졌고, 그로 인해 차를 드레스에 쏟았습니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제가 샤를로테를 패전국 황녀, 정부라고 무시했다며 몰아갔고. 그 덕분에 손톱이 뽑혔습니다.”

라벨은 아직 손톱이 채 자라지 않은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그날의 끔찍한 기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무시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가엾다고 생각했죠. 다 이해합니다. 제 언니는 역사 교사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1황녀였던 자가 갑작스럽게 황실이 무너지고 모국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황녀가 저지를 일입니까.”

“방금 그 발언은 꽤나 위험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충분한 위험한 상황인데 뭘. 라벨은 코웃음을 치며 미약한 통증이 남아있는 손톱을 살살 문질렀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다른 안 좋은 기억들도 함께 떠올랐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오신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샤를로테가 1황녀가 맞기는 합니까. 독을 먹이게 지시한 것부터가 일단….”

“…잠깐, 독이라니?”

그 순간 라벨은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입을 막았다. 설마, 나 지금 말한 거야? 말하지 않으려던 것까지 그만 말해버렸다.

‘…안나.’

라벨이 머물고 있던 그 저택에 새로운 하녀가 들어왔다. 안나, 황궁 소속 하녀였다. 황궁 소속이었다면 그래도 상위 귀족의 하녀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시골 영지의 저택 하녀로 온 게 이상했다.

그런데 안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 하녀가 샤를로테가 데리고 다니던 하녀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라벨은 안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샤를로테가 로젤리아의 잔에 독을 넣으라 지시했다는 것. 안나는 당연히 거절했다고 한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하지만 샤를로테의 제안을 거절한 대가는 너무 컸다.

라벨은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깊게 눌러쓴 로브 밑으로 녹색빛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 설마. 설마?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과 동시에 라벨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화, 황제 폐하!”

황제 페르소나? 그가 어째서 여기에!

분명 황제의 대리인이라 하지 않았나? 황제가 어째서? 그럼 지금 나는, 황제에게 샤를로테의 모든 악행을 말한 거야? 황제 폐르소나는 정부에게 푹 빠져 본처를 내치고 정부를 황후의 자리에 앉힌 남자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샤를로테에게 존칭도 붙이지 않고 샤를로테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이야기를 잔뜩 해댔으니….

‘정말 목이 잘리겠구나.’

라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목을 가차 없이 내려 칠 차가운 날붙이를 떠올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검이 아닌 떨림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샤를로테가 정말 로젤리아에게 독을 먹이라 지시했나?”

“그, 그게….”

“그걸 누구한테 들은 거지?”

위압감 있는 목소리에 라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목이 잘리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은 또다시 이렇게 묻혀버리는 것이었다. 샤를로테가 한 짓은 제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그녀의 신분도, 언니가 샤를로테에게 독을 먹인 사실도. 샤를로테와 관련된 것이면 좋든 안 좋든 막아버리는 페르소나에게 말하면 무엇이 달라지기는 할까?

“…안나. 안나에게 들었습니다.”

“안나라고?”

“네, 샤를로테 황후의 하녀였고, 본인의 입으로 샤를로테 황후에게 독을 건네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자 며칠 만에 쫓겨났고, 의문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흔들어놓을 수는 있겠지.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페르소나는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샤를로테가 뭘 먹이라고 지시해? 독? 로젤리아에게?

그 순간 페르소나의 머릿속에는 로젤리아와 샤를로테가 독을 먹고 쓰러진 날이 떠올랐다. 샤를로테가 억지로 로젤리아와 티타임을 가지고자 했고, 로젤리아는 계속된 요구에 함께 차를 마셨다. 그리고 두 잔에는 독이 나왔다. 그리고 나중에야 로젤리아는 그 독으로 인해 아이를 잃었다고….

단지 샤를로테가 정확하게 어떤 악행들을 저질렀는지, 그로 인해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페르소나가 생각한 것보다 더 끔찍했다.

‘1황녀였던 자가 갑작스럽게 황실이 무너지고 모국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황녀가 저지를 일입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방관했다.

‘샤를로테의 만행이 날이 갈수록 심합니다. 이쯤에서 폐하께서 저지하셔야 합니다. 어찌 가만 놔두시는 겁니까?’

로젤리아의 말도 시기라고 생각하면서 넘겼는데….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애초에 처음부터 로젤리아의 말에 제대로 귀 기울였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까. 페르소나는 말없이 라벨을 내려다보다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라벨은 아무 말 없이 기사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 발악하는 것도 없이, 토해낼 것은 다 토해냈다는 얼굴로 페르소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저 영애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

“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사람을 붙여 두거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곧바로 나에게 보고하고.”

페르소나는 거칠게 로브를 벗어 던지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샤를로테가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려 한다면, 막아야 하겠지. 분명 라벨을 가만 놔둘 리가 없다. 그러면, 그때는 어떡해야 할까. 샤를로테를 어떡해야 하지? 내쳐야 하나? 하지만 출산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출산을 한 뒤에는? 그때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페르소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샤를로테에게 붙여둔 아일라 경은 어떻게 되었지?”

“폐하가 지시한 일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일라 경을 불러들일까요?”

“알아낸 게 있다면 곧바로 지시하라고 전해라.”

만약 샤를로테를 치료만 하고 내보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로젤리아는 아이를 잃지 않았겠지. 내 곁에서 부른 배를 감싼 채 행복해하는 사람이 샤를로테가 아니라 로젤리아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애정을 퍼부어줄 것만 같았다. 아니지, 분명 그러지 않았을까. 완벽한 황제와 황후라는 칭호처럼, 완벽한 가정을 이루지 않았을까.

곁에서 웃고 있는 로젤리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텅 빈 손을 보며, 페르소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

“라벨 영애를 못 찾았다고? 무슨 일처리를 이렇게 하지?”

샤를로테는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찻잔을 요란하게 내려놓았다. 값비싼 보석을 쥐어줬으면 쥐어준 만큼 했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바로 내치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내치면 원한을 품고 뭔 짓을 할지 몰랐다. 게다가 내쫓기에는 라벨로 인해 상황이 별로 좋지도 않았다.

젠장, 라벨 그 년…. 진즉에 처리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난동을 부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으면 켈빈 부인을 죽이지 않고 혀만 뽑았겠지. 내가 저지른 일들을 글로도 쓰지 못하게 손목을 끊어놓거나.

“라벨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당장 알아 보거라! 감옥에 갇혔으면 바로 나에게 와서 보고하도록.”

아니, 애초에 일을 이노 자작부인에게 시키는 게 아니었다. 기수들을 매수하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랐기에, 급한 대로 이노 자작부인에게 시켰지만 잡아오라는 새도 못 잡아오고, 라벨 영애도 놓치고 그나마 일간지를 구해오라는 잡심부름마저 못했다면 찻잔을 그녀의 얼굴에 던졌을지도 모른다. 샤를로테는 일간지를 펼쳤다가 벌써부터 라벨의 난동과, 자신의 악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기사를 보고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벌써 기사가 나온 거야? 페르소나도 이 기사를 보았을까. 보았다면 곧 나를 부르겠지…. 분노로 가득 찼던 머릿속이 점점 두려움으로 잠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은 페르소나도 방관하지 않았던가. 따지자면 페르소나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황제이면서 그런 일들을 못 본 척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뭘 해야 할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은 누구를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이 너무 커졌다. 현명하게 생각해야 했다. 가장 최선의 선택은, 지금껏 밝혀진 악행들을 빠르게 인정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해 동정표를 사는 것.

그렇다면 신분을 밝혀야 할까? 차라리 갑작스럽게 모국을 잃고 가족들을 잃은 불쌍한 황녀.

그래서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이런 식의 기사를 내는 거야. 궁의는 돈만 쥐어주면 거짓 진술을 해줄 사람이야 널렸다. 샤를로테는 뺨 근처에서 흔들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손끝을 떨었다.

위험부담이 따르겠지만 차라리 먼저 신분을 밝히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몇 번째 황녀인지는 밝히지 말고, 그저 안케도니아 제국의 황녀라고만 말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했다. 덮었던 일간지를 다시 펼쳤다. 기사들은 이 일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그러나 일간지 가장 구석에 적힌 기사를 본 순간 샤를로테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 지금껏 비밀리에 부쳐있던 황후 폐하의 신분이 드디어 밝혀졌다. 베논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사라진 안케도니아 황실의 황녀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누가, 누가 이런 기사를? 지금껏 감춰놨던 신분이 어떻게…?

칼라일인가? 로젤리아? 그 둘밖에 더 있나? 아니면 황실 사람들 중 누군가가?

아니야, 황실 소속 사람들은 내가 1황녀라고 알고 있어. 칼라일과 로젤리아가 작정하고 기사를 내려고 했다면 이렇게 구석에 내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13황녀라고 명확하게 작성했을 것이다. 이렇게 안케도니아 제국의 황녀라고만 내도록 두지 않을 텐데.

일간지가 처참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몸이 흠칫 떨렸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집무실로 부르셨습니다.”

목덜미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샤를로테는 마른 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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