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라벨 영애는 어디에.
루치아노가 새벽마다 나가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탓에 나와 칼라일 모두 루치아노에게 그 사실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네가 모습을 드러냈으면 지금쯤 밖에서 다들 떠들고 있었겠지, ‘샤를로테를 똑 닮은 남자가 나타났다. 로젤리아와 그녀의 연인과 함께 사라졌다’라고!”
칼라일은 루치아노의 멱살 쪽 옷깃을 움켜쥔 채 버럭 소리쳤다. 그의 입장을 생각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켈빈 부인을 자살로 내몰고 칼라일 부모님마저 죽인 여자다. 제 동생 하나 못 죽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루치아노는 샤를로테의 쌍둥이 동생이니까.
칼라일은 그게 가장 두려웠던 것이겠지.
하지만 일단 화내는 게 아니라 진정부터 해야 했다. 그의 팔을 꽉 움켜쥔 채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 뻔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다행히도 칼라일이 그의 겉옷으로 루치아노의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을 가렸으니까.
“만약 모두가 너를 보았다면,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소문은 퍼지고 있었을 거야. 샤를로테와 페르소나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그럼 샤를로테가 무슨 짓을 할 것 같아?”
“어떻게든 수를 써서 제가 루치아노가 맞는지, 맞으면 죽이려 하겠죠. 아니면 어딘가에 가둬놓거나,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루치아노는 칼라일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얼굴이 참 평온했다. 이미 이런 반응과 상황을 다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절대로 우연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계획하고 실행해서 이뤄진 것이다. 새벽마다 나간 것은 모두 이것을 노리고?
“제정신이야?”
“칼라일.”
“샤를로테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런 짓을 벌여. 이렇게 멍청한 애였어? 상황판단이 안 돼? 샤를로테는 당장 한 달 뒤면 결혼식을 올리고 건국제 때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로서 귀빈들을 맞이할 거라고. 너는….”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원래 건국제 때 하려고 했습니다만, 황제놈이 그렇게 바로 로젤리아님께 물어볼 줄은 몰랐죠. 따로 뒷조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정말 급했나 봅니다.”
나와 페르소나가 대화한 것을 알고 있다. 그때 다른 사람은 없었어. 어떻게 엿들은 거지? 마법을 이용했나? 어디서 마법을 사용한 거지? 누군가 도와줬나? 누가? 그럼 새벽마다 나간 게….
“누가 도와줬나요?”
“!”
“누가 도와준 겁니까. 그대가 홀로 저지르기에는 일의 규모가 무척이나 큽니다. 게다가 칼라일에게만 말한 사실까지 알고 있고…새벽마다 나가서 누구를 만났죠?”
“누군지는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지금 쓰러진 상태라….”
쓰러져? 설마, 로웬이 도와준 거야?
로웬이 어째서? 기사단장 씩이나 되는 그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로웬은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괜히 기사단장이 아니었다. 분명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벌인 일이겠지. 하지만 자칫하면 반역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전에 루치아노와 로웬은 서로 마주친 적도 별로 없었을 텐데. 왜 둘이 이런 일을 꾸민 거지?
“만약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은 뭘 하려고 했죠?”
“여기까지만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그다음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샤를로테와 똑같은 얼굴. 안케도니아 황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이 두 가지만으로도 사람들은 꽤 여러 가지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제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했군요.”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했다?
어디까지가 그의 계획이었길래 반은 성공했다 말하지? 그때, 샤를로테가 안케도니아 황실의 황녀라고 말한 사람은 루치아노일 가능성이 크다. 그 자리에 안케도니아 제국으로 유학을 간 사람은 있지만 얼굴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할리는 없다. 그렇다면 루치아노는 그 상황을 계속 기다렸다가 터트린 셈이 된다.
라벨이 그 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며 사람이 몰릴 것을 어떻게 알고 기다렸지?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럼 반을 성공했다는 말은….
“…그대가 켈빈 부인을 빼돌렸군요.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든 거예요.”
라벨의 말로 인해 샤를로테의 이미지가 저 아래로 추락하고, 수근거릴 때 샤를로테의 신분을 노출시킨다. 이게 반이었어.
…그러면 언니가 죽어서 슬퍼하는 라벨을, 이용하자고 생각한 거야?
비극적이고 희망 한 줄기 없는, 라벨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해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모두에게 이 끔찍한 얼굴을 성공적으로 공개하고, 노출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켈빈 부인이 자살한 척 위장하고, 빼돌릴 때도 말입니다.”
죽은 척 위장을 했다고?
“그러면 켈빈 부인은….”
“죽지 않았습니다. 켈빈 부인도 동의한 일이었어요. 라벨 양의 의사는 구하지만 못했지만요.”
죽지 않았구나.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 자살을 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시신마저 없어졌다길래 어딘가 썩어가거나 훼손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살조차도 위장한 거였다고?
다행스러움과 동시에 라벨이 떠올랐다. 라벨에게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켈빈 부인은 황족 시해미수죄가 있으니까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라벨에게만큼은 알리는 게 좋지 않았을까.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려 한 아이인데.
“라벨 양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잘못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는지 루치아노의 눈 위로 얼핏 죄책감 같은 것이 스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 일로 분명 샤를로테는 타격을 입었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무모했어요. 샤를로테는 이제 황후에요. 불안정한 황후지만, 황후의 권력은 생각보다 강해요.”
칼라일의 부모님을 죽인 것처럼, 루치아노도…. 그 생각을 하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권력이 샤를로테가 가질만한 것이었습니까?”
“네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 하지만 얼굴까지 노출 시키려 한 것은 로젤리아의 말대로 무모했어. 얼굴을 노출하지 않고, 라벨이 한 행동만으로도 큰 타격을 줬을 거야.”
칼라일은 단호하게 루치아노의 말을 잘라냈다. 루치아노의 말대로 샤를로테는 그녀가 그를 죽이고, 납치하고, 노예로 팔아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칼라일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루치아노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먼저 처리하려고 온갖 짓을 다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칼라일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화를 제대로 못 내는 것도 상대가 루치아노라서가 아니라,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서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낯빛이 파리했다. 나조차 이렇게 놀랐는데 칼라일은 오죽할까. 너무 놀란 탓인가, 어쩐지 귓가에 비명과 비슷한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잠깐, 비명?’
그런데 느낌이 환청이나 이명이 아니었다.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당황한 얼굴의 루치아노가 보였다. 이 비명, 로웬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로웬이 쓰러졌다고 했었지, 설마….
“어서 의사를 불러와, 가서 수건과 물을 새로 갈아오라고!”
좋지 않은 느낌에 방을 나와 보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복도는 고함에 가까운 로웬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로웬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피 냄새….
“원래는 저와 수도에 함께 있었지만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습니다. 제가 남긴 바로 그 상처…그 상처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치유 마법으로 치료해뒀는데….”
왜 저러는 거지? 루치아노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치유 마법을 썼음에도 치료되지 않는 경우도 있나. 애초에 오랜 기간 흉터로 남은 상처였다. 그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고통을 호소한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곧장 로웬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한기 때문에,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흐릿한 마력의 기운, 루치아노가 마법을 쓰면서 남은 흔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옷을 쥐어뜯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로웬으로부터 기사 보고서에서 느꼈던 그 마력이 느껴졌다.
“아아악!”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고통스러운 비명에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두 다리가 모두 부러져 돌아와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던 로웬이었다. 피가 가득 배어나는 셔츠에, 심장을 쥐어뜯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로웬님, 곧 의사가 올 겁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네?”
“필요 없어!”
“로웬님, 진정하세요!”
“가서, 가서 검을 가져와…차라리 심장을, 도려내란 말이야! 가서 내 검을 가져와…!”
얼마나 고통스럽길래 심장을 도려내라 말하는 것일까.
겨우 정신을 다잡고는 조금씩 로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칼날같이 날카로운 마력에 온몸이 휘감기는 듯했다. 발을 뗄 수가 없던 찰나, 로웬이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정확히는 몸부림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로웬의 붉은 눈동자가 정확하게 칼라일에게 향했다. 그 순간 귀를 거칠게 헤집던 비명이 끊기면서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발작에 가까 경련을 일으키던 로웬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칼라일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선반에 있던 꽃병을 잡고 깨트렸다. 피가 묻은 꽃병 조각이 비틀어 쥔 로웬은 누가 말리기도 전에 칼라일에게 달려들었다.
“로웬! 칼라일, 어서 피해요!”
“안됩니다, 로웬님!”
로웬이 노린 곳은 칼라일의 목이었지만 정작 날카로운 조각이 향한 곳은 릴리의 왼쪽 눈이었다. 로웬의 모습을 충격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릴리는 나와 기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로웬의 앞으로 몸을 내던졌고, 그대로 칼이 릴리의 눈을 찔렀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피가 이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릴리는 그대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감싼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로, 로웬, 님.”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릴리는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짧은 신음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붉은 피가 릴리의 도자기 같은 피부 위로 흘러내리자, 로웬의 얼굴이 아주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짙은 붉은 눈동자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듯보이던 로웬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지 크게 비틀거리며 유리조각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릴리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허망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아냐, 나는. 이러려던 게….”
루치아노가 다급하게 릴리의 상처를 압박하면서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눈이 아니라 눈가가 베였던 것인지, 피로 뒤덮인 얼굴 위로 보랏빛 눈동자가 흐릿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로 깊게 베였다면 시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상처는 치유할 수 있지만, 시력은 마법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의사에게 데려가야 할 듯싶습니다.”
“의사에게 데려가 줘요. 부탁할게요.”
나는 루치아노가 릴리를 부축해 나갈 때까지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그렇고, 공격성을 내보이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도대체 저 거대한 마력은….’
로웬을 뒤덮은 검은 안개 같은 마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입술을 꾹 문 채 절망으로 뒤덮인 로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로웬은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이내 얼굴을 묻으며 흐릿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릴리를 자신의 손으로 찔렀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릴리를 찌르려던 게 아니야. 나는, 절대 릴리를 찌르려던 게….”
“로웬.”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그저, 불타는 것처럼 아팠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내가, 내가 릴리를…!”
패닉에 빠진 로웬에게 다가가려는 나를 칼라일이 저지했다. 손가락 사이로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로웬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칼라일에게 달려들었는지…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어둡고 차가운 마력이 로웬을 두르고 있었는지.
그리고 로웬이 칼라일을 찌르려고 하기 바로 직전에 본 그 눈빛.
분명 내가 칼라일의 기억에서 보았던 로웬의 눈빛과 똑같았다.
“괜찮아.”
“…!”
“괜찮아. 그런 생각하지 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로웬을 바라보던 내 눈은 칼라일의 커다란 손에 의해 가려졌다.
그러나 칼라일을 공격하던 살기어린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
그날 밤 대공저의 보좌관이 황궁을 찾았다.
“로웬 경이 쓰러졌다고?”
“네, 그래서 로웬 경이 한동안 기사 업무를 하지 못할 거라 전해왔습니다.”
그 정도로 심한 것인가. 애초에 로웬은 많이 다치기도 하지 않았나? 두 다리가 부러져 오거나 가슴에 화살이 박히거나 손목이 잘릴 정도로 뜯어져서 오고는 했다. 그때마다 출전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로젤리아가 억지로 저택에 머물게 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니 처음에는 온갖 걱정에 시달리던 로젤리아는 이제 혀를 차며 제국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보내주는 것으로 그 걱정을 대신했다.
그런데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라고? 미루기는커녕 그날에 못 끝내면 잠도 자지 않고 업무만 하는 그가?
“대공저의 보좌관에게 듣자 하니 상태가 꽤 심각한가 봅니다. 로웬 경이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날붙이로 대공 각하의 직속 시녀를 찔렀다고 합니다.”
꽤나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한 페르소나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물론 그 탄식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간을 들이지 말고 카렐리아에게 먼저 물어볼 것을 그랬다. 일이 거하게 틀어져 버리자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페르소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일단 틀어진 것은 틀어진 대로 내버려 둬야겠다. 당장의 눈앞에 일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라벨 영애는 지금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