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오늘처럼 좋은 날
마차가 멈췄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들린 순간 라벨이 있는 곳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마부가 문을 열기도 전에 내려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 모여 일제히 고개를 위로 향한 게 보였다.
“라벨…!”
건물 꼭대기에 앉아있는 라벨. 더러워진 드레스에 머리는 다 헝클어졌고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간 것처럼 보였다. 팔과 다리에는 멍과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문제는 라벨의 몸이 젖어있었다. 물인가 싶었지만 이내 기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라벨의 손에 들린, 성냥….
“라벨, 멈춰!”
군중들 틈 사이를 파고들며 소리쳤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라벨은 말없이 성냥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순간 들었다. 다행히도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멍하던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대, 대공 각하….”
“라벨, 이게 무슨 짓이니, 일단 그 성냥부터 내려놓으렴.”
“시, 싫어요. 안 내려놓을 거예요. 제가 원하는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절대로!”
라벨은 당장이라도 성냥을 그어 몸에 불을 붙이려는 듯 행동했다. 요구라니, 도대체 무슨 요구인데? 기사들은 꽤나 난감해보였다. 도대체 무슨 요구를 했길래 이러는 것일까. 나는 기사에게 신호를 보내 건물 안으로 진입하도록 유도하면서 라벨의 시선을 끌었다.
“라벨, 내가 그 요구를 들어주마. 말해보렴, 라벨.”
“….”
“라벨, 말을 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
그 순간 내 얼굴에 차가운 액체가 떨어졌다. 라벨의 눈물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라벨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문지르며 훌쩍거렸다.
“언니의 시신이라도 보고 싶어요.”
“시신…?”
“언니가 황족을 독살하려 했다는 것은 들었어요. 그리고 자살했다면서요, 그럼 시신은요? 시신은 왜 오지 않죠? 시신은, 왜…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지만, 그래도…이제 저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황족의 독살, 시신? 언니? 자살?
최근 죄수들 중에서 자살한 사람은 샤를로테에게 독을 먹인 켈빈 부인 밖에…잠깐, 그럼 켈빈 부인이 라벨의 언니. 그 켈빈이, 라벨이 속한 가문을 뜻하는 거였어? 성만 같은 게 아니었던 거야?
‘라벨에게 언니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은 본 적 없었어.’
그리고 애초에 자신의 동생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린 여자의 시녀를 맡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성만 같겠거니 했는데, 아니었구나. 그 켈빈 부인이 라벨의 언니를 말하는 거였어. 라벨의 언니가, 자살을…그리고 시신을….
“…시신을 못 보았니?”
아무리 죄수라지만 시신은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어떻게 시신을 못 보지? 켈빈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로부터 시간이 조금 흘렀는데, 아직까지도 시신을 받지 못했다고?
“켈빈 부인의 시신 처리는 어떻게 되었지?”
나는 기사 한 명을 붙잡고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쩔쩔매며 주변의 눈치를 보다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게, 저희도 돌려주고 싶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시신이 중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분명 저희가 시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무슨 영문인지 시신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 사실을 폐하께서 알고 계시나?”
“아뇨, 담당했던 자가 지레 겁을 먹고 숨긴 탓에 저희도 뒤늦게….”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아이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제 언니인 켈빈 부인밖에 없었을 텐데…똑같이 샤를로테로 인해 처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얼마나 비참했을까.
언니의 시신을 받고 싶다는 라벨, 하지만 사라진 시신….
그때 라벨이 비명을 지르며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기사들이 라벨이 있는 곳까지 올라간 것인지, 허둥대는 소리가 들렸다.
“더 가까이 오면 죽어버리겠어!”
“라벨, 내려오렴, 위험해!”
“대공 각하, 제가 뭘 잘못 했습니까, 잘못한 것은 그 망할 년이잖아요! 황녀의 자존심? 넘어져 실수로 드레스에 차를 엎은 게 어떻게 자존심을 무시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손톱이 모두 뽑혀서 평생 손떨림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언니는요, 그 년은 죽어도 쌀 년인데, 언니는 왜 그리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 거죠?”
라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성냥에 불을 붙였다. 라벨의 손에는 기름이 가득 묻어있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몸에 불이 붙을 것처럼 위험했다.
이 일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라벨이 말한 샤를로테의 악행을 듣고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샤를로테에 대한 평은 상당히 좋았고, 심지어 나보다 더 좋은 황후가 될 거라며 칭찬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라벨이 악을 써가며 억울함을 토하자 제국민들은 크게 술렁였다.
“드레스에 차를 쏟았다는 이유로 손톱을 뽑아 내쫓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짓을….”
“얼굴을 보니 내 딸과 비슷한 나이 같은데, 세상에. 그럼 그 죽었다는 언니도 사실 자살이 아니라 샤를로테 황후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설마. 그런데, 황녀라니? 황후 폐하가 황녀 출신이셨어? 어느 제국의 황녀인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샤를로테의 신분과 더불어 그녀의 악행. 예비 황후로서의 샤를로테의 이미지가 아주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것부터 제대로 짚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라벨이 시급했으니 라벨부터 구해야 한다. 하지만 기사들이 제국민들을 억지로 탄압하려는 게 보였다.
하는 수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을 살피며 마법으로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라벨의 손에 들려있던 성냥이 꺼지면서 기름 때문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불을 붙일 도구는 없다. 어서 라벨 영애를 붙잡아라!”
내가 명을 내리자마자 기사들이 일제히 라벨의 팔을 잡고 난간에서 끌어내렸다. 라벨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떨어진 성냥을 일부로 발로 멀리 차버리고는 제국민을 강압적으로 탄압하려는 기사들을 제지했다.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황후 폐하의 신분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자가 있다면 제지하라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딜 제국민들에게 폭력을 쓰려 드는 것이냐. 상황부터 정리해라. 지금 이런 행동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으니.”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이 불씨를 붙였던 것인지, 사람들은 더 크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는 샤를로테의 악행이 까발려지는 셈이니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라벨이 쫓겨난 시녀 출신이지만 황궁에서 일어났던 일은 발설하면 안 된다는 의무가 아직 존재했다. 게다가 페르소나가 그렇게 막고자 했던 샤를로테의 신분에 대해 떠든 것도 모자라, 그녀의 악행까지 모두 말해버렸으니 이 사실이 페르소나의 귀에 들어갈시 분명 제국민의 반감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다 처벌을 내리려 들게 뻔했다.
‘이대로 놔두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라벨에게 가는 피해가 너무 커.’
하는 수없이 상황을 빠르게 저지하고 흩어지는 게 답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또렷하고 선명한 목소리 하나가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꿰뚫었다.
“그럼 황후 폐하가 안케도니아 제국의 황녀라는 게 사실이었구나.”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누구지?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야. 나는 헛숨을 삼킨 채 눈동자만을 굴려 사실을 내뱉은 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내 거친 파도처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거대해지면서 이내 그 목소리는 파묻혀버렸다.
“안케도니아 제국? 그 침공당한 제국? 그럼 샤를로테 황후 페하가 패전국의 황녀라고?”
“패전국의 황녀는 보통 죽거나 노예가 되잖아. 그럼 황후 폐하의 신분이 노예라는 거야? 노예 출신의 황후라고?”
라벨의 자살 시도를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는 평민들 말고 귀족들도 있었다. 평민들과 달리 여러 수업을 듣고 지식을 쌓은 자들은 샤를로테가 안케도니아 제국 출신의 황녀라는 말에 기함을 토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패전국의 황녀, 즉 죽거나 응당 노예가 되었어야 할 여자에게 지금껏 머리를 조아리고 예의를 차린 셈이었다. 상당히 불쾌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하, 어디 출신인가 했더니 패전국 황녀라니. 레이몬드 황실이 기강이 이리도 무너졌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여자를 황후의 자리에….”
“안케도니아 제국에는 황족이 많다고 들었는데. 예전에 그 제국으로 유학을 간 적이 있어. 그때 당시의 황제가 정부를 잔뜩 들인 탓에 황제와 황녀만 합쳐서 스물이 넘는다고.”
“진짜? 그럼 샤를로테 황후 폐하께서는 몇 번째 황녀이신 건데? 몇 번째 황녀까지 있는 거야?”
안케도니아 제국에 유학을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자가 황자와 황녀 얘기를 꺼내자 화제는 점점 그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사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샤를로테의 신분을 밝혀버린 그 사람은, 누굴까.
“대공 각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은 폐하께 보고 드리고 명을 기다릴 수밖에.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일단은 저 기름과 성냥…바닥에 뿌려진 핏자국들을 정리하도록 지시하고 황궁으로 복귀해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일렁였다. 이제 슬슬 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페전국 황녀에게 자리를 뺏긴, 전 황후인 나에 대한 이야기.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절대 어깨를 움츠러트리고나, 허리를 굽히지 말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나는….
“로젤리아님.”
“……그대가 왜 여기에.”
그때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루치아노가, 왜 여기에. 아니, 왜. 어째서?
왜 마법이 풀리고 있지?
루치아노의 까만 머리카락이 점점 선명한 은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마법이 풀리게 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으로 돌아갈 것이다. 햇살을 머금은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금빛 눈동자. 샤를로테와 똑 닮은 인상의, 루치아노가, 이 자리에….
“오늘만큼 좋은 날은 없을 거예요.”
루치아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로브는커녕 망토 하나 걸치지 않고 보란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루치아노의 얼굴을 본다고 해서 샤를로테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단지 샤를로테와 똑같이 닮은 얼굴,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이 샤를로테가 저지른 악행들.
나에게 루치아노는 이제 샤를로테와는 별개인 존재, 칼라일이 아끼는 동생이자, 마법을 가르쳐준 교사. 친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칼라일에게만 적용되는 사실일 뿐,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까?
나는 루치아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드러나면 안 돼. 여기서는 아니야. 루치아노의 모습이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고, 샤를로테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간다면 분명 죽이려 할 거야.
내 손끝은 그의 머리카락을 향해 뻗어졌고, 그 순간 루치아노의 머리 위로 겉옷이 덮어졌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칼라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신의 겉옷으로 루치아노의 모습을 가렸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와 공포로 뒤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