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끝까지 돌봤어야 했는데.
“라벨 켈빈? 켈빈 부인의 직계 가족인가?”
“라벨 영애는 켈빈 부인의 여동생이라고 합니다.”
“그 영애가 수도에서 자살 시도를 벌이고 있다니, 무슨 경위인지 당장 보고하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궁에는 비상이 걸렸다. 한 여식이 수도 한 가운데에서 자살 시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문제는 그 여식이 샤를로테에게 독살을 시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켈빈 부인의 여동생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종종 죄수들의 직계 가족이 이와 비슷한 행동을 많이 하니까.
문제는 그 여식이 샤를로테를 저주하는 말을 퍼부으며 켈빈 부인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여식은 샤를로테의 드레스에 차를 쏟고 손톱이 모두 뽑혀 쫓겨난 전적이 있었다.
황궁 사람들은 수도에서 난동을 피우는 여식과 켈빈 부인의 관계를 전해 듣고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황궁 사람들은 알아서 샤를로테의 독살 미수 사건과 이 일을 연결 짓기 시작했다.
‘그럼 켈빈 부인이 황후 폐하에게 독을 먹인 이유가…설마 동생의 복수를 하려고?’
‘세상에, 켈빈 부인은 황후 폐하의 말이라면 모든 지 들었잖아. 설마 복수를 위해서 일부러 그런 거야? 세상에, 그럼 왜 자살한 거야?’
‘자살하고 못 배겨? 동생 소식 못 들었어? 사교계에서 쫓겨나고 드레스도 못 만들고, 파혼당한 것도 모자라 실어증까지 걸렸었다며!’
‘비극이네, 비극이야. 하긴, 드레스에 차를 쏟았다고 손톱을 뽑고 내쫓는 것은 너무 했어, 그치?’
‘맞아. 딱 봐도 실수한 거였는데 말이야. 회초리라면 모를까….’
켈빈 가문의 비극은 점점 황궁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페르소나는 비서가 오기도 전에 라벨에 관한 소식들을 먼저 전해들을 수 있었다. 반쯤 미친 라벨이 제 언니마저 잃고 날뛰며 이 일의 원흉으로 샤를로테를 가리킨다고. 샤를로테가 황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 또 다른 한 가문을 나락으로 빠트렸다고.
페르소나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당장이라도 이 일을 수습하고, 더 이상의 이야기가 퍼지지 않게끔 지시하고 싶었다. 황제의 정부였고, 그 당시 패전국의 황녀였던 샤를로테에게 위협적인 행동으로 보여서 한 일이다…라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비난이 거세지면 샤를로테의 사과를 앞세우면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 하나가 남아있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샤를로테의 신분을 밝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13황녀라고 해야 하는지.
1황녀라고 하면 몇몇 이해해줄 사람이 있겠지만, 이게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라고 드러난다면? 그럼 샤를로테 개인이 아니라 황궁 전체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미 황궁 내에는 1황녀라고 알려져 있으니….
“영애를 당장 데려와라.”
“네? 데려오라니요? 지금 황후 폐하를 죽이니 뭐니 온갖 저주스러운 말을 퍼붓고 있는데 데려오라고요?”
“그렇다고 저대로 둘 수는 없지. 그리고 황후와 관련되었다면 더더욱 놔줘서는 안 되겠지. 지금 당장 데려와라.”
샤를로테가 저지른 일이니 샤를로테에게 처리하라고 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 일이 잘 해결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그리고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모두 샤를로테의 그 잘난 자존심 때문이 아닌가.
연달아 터지는 사건 때문에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샤를로테에게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다. 생각이 없냐고, 황녀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냐고. 그래도 황녀였으니 못 본 척 넘겼다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냐고. 지금 그 거짓말로 도대체 몇 명이 다쳐야….
이제 샤를로테를 향한 감정이 증오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사랑했는데. 사랑했다고 믿었는데! 얼굴만 봐도 좋았고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그 은빛 머리카락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그랬는데, 모두 내 착각이었나. 도대체 언제부터 착각이었을까. 너무 뒤늦게 알아차렸다.
“폐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황후 폐하께서 기사들을 보내 라벨 양을 황족 모욕죄로 감옥에 가두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하, 황족 모욕죄?”
샤를로테, 기어이 일을 키우는구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라는 것을 모르나?
더 이상 샤를로테가 이 일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샤를로테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이니 어떻게든 손을 쓰려 할 테지만 모든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강제적으로 끌고 갔다가는 괜히 반감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제국민들도 샤를로테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겠지. 그것만으로 이미 큰 반감을 가지고 있을 터.
황궁에서 일하는 자식들을 둔 부모들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일 테고, 시녀로 일하는 딸을 둔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딸을 데려오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에서 일을 더 키울 수는 없었다.
“황후가 보낸 기사들은 당장 철수시켜. 라벨 양을 데려올 때는 최대한 억압하지 않고 귀중하게 모셔오듯 데려와라.”
“그럼 황후 폐하께서 또 기사를 보내시면….”
이 상황에서 샤를로테의 개입은 일을 더 키우는 촉진제나 다름없으니….
“황후를 침실에 가둬. 나오지 못하게 해. 그 누구도, 황후의 지시를 내 허락 없이는 절대 받아주지 마라. 시종들도 전부 문 밖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하고.”
“그럼 그 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 자?”
“폐하의 보좌관인 세츠를 통해 황후 폐하께 붙여둔 자 말입니다.”
페르소나는 샤를로테에 대한 걱정은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차갑게 지시했다.
“그자는 제외해. 뭔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내게 보고하라 일러라.”
***
“하필 이럴 루아 남작부인은 어디로 간 거야….”
샤를로테는 초조하게 집무실을 돌아다니며 수도로 보낸 기사들이 라벨을 추포했다는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라벨, 손톱이 아니라 혀를 뽑아두는 건데. 실어증에 걸렸다길래 일부러 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실어증이 나아버린 것도 모자라, 수도 한 가운데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분노로 뒤덮인 샤를로테는 서랍에서 값비싼 보석들이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서 알이 큰 보석들을 몇 개 골라 소매 안쪽으로 넣었다.
정부 시절 페르소나가 선물해준 보석들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것만 빼돌려 따로 숨겨둔 것들이었다.
‘이 정도면 여식 한 명 처리하고 뒷수습까지 해주는데 충분하겠지.’
그동안 샤를로테가 내쫓은 시녀들과 하녀들은 대게 안 좋은 일을 당했다. 대부분 사고를 당해서 다쳤다. 마차에 치인다거나, 뭔가를 잘못 먹고 쓰러진다거나, 불씨로 인해 화재가 나 화상을 입는다거나. 이런 식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좋지 않은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표하느라 그 사람들이 모두 샤를로테의 전속으로 배정되었다는 공통점은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샤를로테가 자신의 전속으로 배정된 사람이 아닌 이상 속마음을 숨기고, 고운 황후의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덕분에 샤를로테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최근에는 꽤나 날카로운 반응을 많이 보였지만 궁의를 매수한 덕분에 모두들 ‘샤를로테가 임신을 한 이후 신경이 많이 예민해진 상태다’라고 넘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테 본인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이용할 가치가 넘쳐난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루아 남작부인이 휴가를 가버려서는….”
칼라일을 공격했을 때부터 유용하게 이용하던 용병단, 직접 찾아가기에는 위험하고. 차라리 루아 남작부인을 시키면 좋으련만 하필 없고.
결국 보석 몇 개를 손에 움켜쥔 채 자리에 앉았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 가 있던 탓에 온몸이 아팠다. 시킬 사람이 없으면 보석이 많아도 소용없다. 용병단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끝에는 샤를로테의 보석이, 그 시선의 주인은 이노 자작부인이었다.
샤를로테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환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이노 자작부인?”
“…네, 황후 페하.”
“가서 집무실 서랍 안에 있는 주머니 좀 갖고 와줄래요?”
저 눈, 저런 눈을 한 사람들 중에서 욕망을 품지 않은 이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루아 남작부인은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자극을 줘야 해서 나름 귀찮았지만, 하지만 만약 이노 자작부인이 욕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면….
이노 부인이 주머니를 건네주자 샤를로테는 받는 척하면서 일부러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보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보석들. 이노 자작부인의 눈동자에 수십 개의 보석들이 비춰졌다.
그 모습을 보며 샤를로테는 소리 없이 웃었다.
“보석들이 참 예쁘지, 폐하께서 날 위해 정성스럽게 골라주신 거란다.”
“…모두 폐하께서 선물해주신 것들입니까?”
“그렇단다. 아, 그렇지. 너도 하나 받으렴.”
샤를로테는 큼지막한 루비를 하나 쥐어주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만 하면 루아 남작부인보다 더 쓸모 있을지 모른다. 이용할만한 사람이 벌써 둘이나 생겼다는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물욕으로 가득 찬 사람만큼 좋은 패는 또 없는 법이었다.
“이걸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그럼. 나는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꽤 많은 것들을 준단다. 그 루비보다 훨씬 좋은 것들을 말이야.”
보석을 바라보며 볼에 홍조를 띄우던 이노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 위로 욕망이 떠올랐다.
“루아 부인에게 못 들었니? 저번에 나에게 에메랄드로 장식한 구두를 받아갔었는데.”
“그럼 루아 부인이 신고 있던 그 예쁜 구두를 폐하께서….”
“그렇지? 예뻤지? 그래, 그거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한정판이었단다. 내가 보기에 이노 부인에게는 목걸이가 필요할 것 같아. 그 갈색 머리와 잘 어울릴 자수정 목걸이가 말이야.”
의자에 기댔던 몸을 반쯤 일으킨 샤를로테는 화사하게 웃으며 이노 자작부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에 목을 더듬던 이노 부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샤를로테는 그런 그녀의 머뭇거림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할지, 다 아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그 한마디에 샤를로테는 역시나, 라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곧바로 용병단에게 의뢰하는 일을 대신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단 가벼운 것부터 몇 번 시험해보는 게 우선이었다. 가벼운 일처리도 못하면 용병단들이 하던 일은 겁먹고 무서워 도망칠게 뻔하고…그럼 예전처럼 내쫓고 사고로 위장해 입을 막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 사람 한명 한명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일단은 먼저 수도의 상황이 어떤지 좀 알아오렴. 되도록 빨리. 그리고….”
다른 시킬 것이 뭐 없나 살피던 샤를로테는 창가에서 자신을 주시하던 하얀 새를 발견했다.
“…저 새.”
“네?”
“저 새를 잡아 와. 잡아오는 김에 금빛의 커다란 새장도 구해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