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끝까지 돌봤어야 했는데.
님프 궁에는 이미 칼라일이 와 있었다. 그는 궁 입구를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샤를로테와의 예기치 못한 대치 때문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칼라일은 나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걸린 줄 알았어.”
“그럴 리가. 그래도 황후였는데,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적은 거 아니야?”
“믿는 거에 비해 불안한 마음이 더 커서 그랬나 봐.”
나는 결재서류 사이에 껴놓은 보고서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낡고 노랗게 색 바랜 종이가 연기에 그을린 듯 거무튀튀했다. 물론 보고 내용이 쓰인 부분은 멀쩡했지만 종이의 테두리는 구겨지고 흠집이 나있었다.
그리고 흐릿한 피비린내가 코를 스치던 순간 칼라일이 내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빼앗아 바닥으로 내 던졌다. 나를 보호하듯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칼라일은 무서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칼라일?”
“마법이 해제된 흔적이 있어, 해제된 게 저 정도라고…상급 마법사가 아니야, 저건….”
칼라일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보고서가 떨어진 자리를 기점으로 주변의 모든 풀과 꽃들이 시들고 썩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시체 썩는 냄새에 소매로 코를 막았다. 칼라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보고서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종이 위에 손을 대자 검은 불꽃이 칼라일을 순식간에 감싸며 불타기 시작했다.
“칼라일!”
불길이 너무 세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였다. 거의 성인 남자의 키 정도로 세게 치솟던 불꽃은 이내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칼라일의 손이 불에 탄 듯 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 나는 황급히 다가가 그의 손을 감쌌다.
마력을 계속 불어넣으며 치유 마법을 쓰는데도 손이 금방 낫지 않았다. 마력을 한참 쏟아 부은 뒤에야 그의 손이 회복되고 있었다.
“괜찮아?”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야, 칼라일. 도대체 뭐야, 무슨 짓을 했길래.”
“별거 없어, 그냥 마법을 모두 해제시켰을 뿐이야. 괜찮아.”
칼라일이 내 손을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는 마력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보고서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다행히 보고서에 쓰인 내용은 모두 온전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은 순간 다행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 제국력 1075년, 2월 9일. 헤레이스 왕국에서 귀환 도중 베논 제국의 군사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안케도니아 제국의 침공을 보조했다. 그 과정에서 신전의 세력을 우선순위로 무너트리고 황실과 더불어 황실과 협정을 맺은 마법사 가문의 멸문을 주도하였다. 이후……. 」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보고서에 써진 필체는 분명 로웬의 것이며, 로웬은 귀환 도중 베논 제국에 군사지원을 나갔다. 그리고 헬리오도르 가문을, 칼라일의 가족들을, 로웬이, 로웬이…!
“로젤리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확인하니 크나큰 절망감이 몰려왔다. 로웬이 정말 칼라일의 가족을 죽였다. 칼라일의 숙부라는 사람은 로웬의 지시를 받은 기사들에게 죽었다.
그날, 칼라일의 기억에서 들었던 로웬의 목소리가 귓가를 거칠게 헤집어놓았다. 심장이 처참하게 찢어지다 못해 흙바닥을 구르는 느낌이었다.
“로젤리아!”
내 가족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가족과 친척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깊고 어두운 늪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하필 로웬이야.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왜 하필 로웬이야! 왜 칼라일이냐고!
“로젤리아, 제발. 지금 하는 생각을 멈춰.”
“…칼라일.”
칼라일의 선명한 목소리가 내 절망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언제 안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맞닿은 살갗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안정되면서도 거부해야 할 듯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원수의 동생인데….
“괜찮아. 떨지 마. 아직 아무것도 확실해지지 않았어.”
“로웬이 네 가족들을 죽였어.”
“아니야, 확실하지 않아.”
“보고서에 그렇게 써있잖아. 로웬의 필체를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어. 분명 로웬이 쓴 게 맞아, 로웬이 황실과 협정을 맺은 마법사 가문을…!”
“그러면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건데?”
칼라일은 내 뺨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로웬이, 내 가족들을, 가문을 무너트렸어. 하지만 로웬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분명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썼잖아. 그런데 기억을 왜 못할까.”
“….”
“그리고 보고서에 마법이 걸려있어. 보고서에 걸린 마법, 마력, 보통 수준의 마법사의 것이 아니야. 레이몬드 제국에서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없어. 보고서를 쓰기 전에 마법을 걸어두었거나. 아니면 다 쓰고 마법을 걸었거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너도 마법 때문에 이 보고서의 존재를 잊고 있었잖아.”
내 뺨을 쓰다듬는 그 손의 떨림이 느껴졌다.
“황제가 이 보고서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그의 말에 내 몸의 떨림이 멈췄다. 그의 말대로 나는 마법 때문에 보고서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보고서를 받아서 처리하는 페르소나도….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로웬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게 마법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어. 어찌되었든 로웬은 베논 제국으로 지원을 나갔어. 그리고 보고서에 마지막 문단에는 베논 제국의 지원을 끝마치고 돌아왔다고 쓰여 있어.
그럼 마법을 건 사람은…아마도….
‘베논 제국 출신의 마법사가…?’
단순히 우리들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일의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다. 만약 내 예상이 모두 들어맞는다면 국가적 마찰로 번지게 된다. 한 제국의 기사단장이 작성한 기사 보고서에 타국의 사람이 멋대로 손댄 게 되니까.
“…베논 제국이 손을 썼을 확률이 가장 커. 기사 보고서는 귀환 당시 작성을 해. 그럼 베논 제국 출신의 마법사가 손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커.”
“베논 제국에 대해서 알고 있어. 사절단으로 온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평균의 이상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지.”
‘그럼 베논 제국일 가능성은 더 커졌네.’
베논 제국은 레이몬드 제국의 경쟁 국가. 이 일을, 페르소나에게 알려야 하나? 알리면, 일이 더 빨리 처리될까.
내가 알기로 페르소나는 베논 제국으로 군사 출정을 허락한 적은 손에 꼽는다. 만약 출정 허락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아마도 이 일의 진실이 무엇인지 더 빨리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칼라일은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에게 알릴 생각은 하지 마.”
“…페르소나에게 알리는 게 더 빨라.”
“그럼 너는? 기사 보고서에 손댄, 가넷 대공인 너는, 어떻게 돼?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군사권에 손댈 수 없는 가넷 가문의 사람이 기사 보고서에 손을 대면….”
…그렇게 되면 황실 간의 협정은 깨지고, 협정의 조약대로 반역죄로 몰리겠지.
“베논 제국도 건국제 때 오겠지. 그러니, 이 일이 정말 큰일인 것은 알지만. 건국제가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보자. 건국제는 일주일 간 진행되잖아. 그때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칼라일은 애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내는 일잖아. 그럼 확실한 사건 진상을 하루 빨리 밝혀내는 게 그에게 더 마음이 편할 텐데도 그는 내 안위를 먼저 챙겼다.
물론 협정 조약대로라면 반역죄지만 베논 제국이 저지른 짓이라는 것만 밝혀진다면 페르소나는 이를 빌미로 자신의 제국에게 유리한 협정을 맺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모를 타국의 공격을 막았다’라는 공을 세운 셈이 되니, 반역죄까지는 몰리지 않을 것이다.
대공이 아닌 가넷 공작으로 작위가 하락하는 것. 그 정도로 그치고 말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일까.
“나는.”
“….”
“나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
“!”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한껏 끌어올려졌던 그의 입꼬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떨렸다.
그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던 터라, 페르소나에게 말하자는 내 주장은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여럿 잃은 그에게 잔인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팔을 뻗어 그를 토닥였다. 어깨 위로 가냘프고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
기사 보고서와 함께 결재서류를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건국제까지는 되도록 나와 칼라일. 그리고 루치아노에게만 알릴 생각이었다. 루치아노에게 서신이라도 보내야 될까 싶어 종이를 꺼내는데 님프 궁 밖이 꽤 소란스러웠다.
“로젤리아님. 대공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대공저에서?’
대공저에서 온 사람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릴리였다. 손에 생크림과 라즈베리가 올라간 스콘을 들고 오던 칼라일이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릴리가 울고 있다, 릴리가…? 웬만한 것으로 잘 울지 않던 릴리가 왜?
최근 밀려있던 휴가계로 쓰던 이유와 관련 있나? 상단에 문제라도 생겼나? 하지만 릴리가 꺼낸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로웬님께서 쓰러졌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요…깨어나지 않으세요….”
로웬이 쓰러져? 가끔씩 로웬은 온몸의 뼈가 부러져서 실려 오기도 했다. 릴리도 그것을 잘 알 텐데, 이렇게 직접 와서 알릴 정도로 심한 것인가? 울 정도로? 하지만 뒤이어 알려준 내용이 나에게는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라벨이, 수도에서 자살 시도를…흑, 바로 어제 받은 편지에만 해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는데….”
라벨이라면, 샤를로테가 내쫓은, 라벨 켈빈? 그 애가 자살 시도를 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갑자기 자살 시도를 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교계에 다시 복귀한 게 아니었어? 물론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내용을 듣기는 했지만, 상태가 나아진 게 아니었어? 저번에 라벨을 만났을 때만 해도 잘 웃고 있었는데….
“로젤리아. 너는 수도로 가봐.”
“하지만 로웬이….”
“내가 대공저로 갈게. 너는 수도로 가봐. 라벨이라면 네가 아꼈다고 했던 바로 그 아이잖아. 로웬은 내가 치료하고 있을게.”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우는 릴리를 달래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자살 시도라니, 라벨. 이게 무슨 일이야.
라벨. 라벨! 끝까지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끝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내가 잘 챙겼어야 했는데, 내 시녀였던 만큼 계속 더 잘 돌봤어야 했는데….
서둘러 달라는 내 지시에 마부는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최대한 빨리 라벨에게 도착하기를 바라며 두 손을 꼬옥 모았다.
그러나 아무 일 없기를 빌었던 내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