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01화 (101/170)

#101화, 거짓말을 들켜버렸다

결국 잠들지 못하고 밤을 새버렸다.

칼라일이 제시한 가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다시 확인해봐야겠지만 기사 보고서에 정말 기억을 지워두는 마법이 걸려있다면, 그 보고서는 로웬인 척 누가 작성한 것일까. 외부의 마법사인가? 그럼 로웬이 현재 마법에 걸려 기억이 지워진 상태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로젤리아.”

“서류 왔어?”

“응, 방금 서던에게 받았어. 갈까?”

내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는지 서류를 내려놓고는 내 옆에 앉았다.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내 생각보다 상황이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을 영 지울 수가 없었다.

일부러 걸음을 재촉하며 페르소나의 집무실 앞으로 왔다. 나와 칼라일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자 호위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폐하께 내가 왔다고 알리거라.”

“아, 저 그게…지금 집무실 안에….”

호위는 머뭇거리면서 문과 나를 연신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저러나 싶던 찰나 문틈에서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샤를로테였다. 정확하게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마 못 가 책상을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지금 겨우 그런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겨우 그런 일이라니요! 어찌 마력 검진 계획에 황후인 제가 빠질 수 있단 말입니까, 제 능력이 모자랐습니까?”

“어차피 검진은 연구원과 연구관들의 주도하에 이뤄질 것이오, 뭐가 그렇게 불만이오? 그전에는 임신이니 뭐니로 뭐든 빠지려고 하지 않았소?”

“폐하께서야 말로, 저에게 마력에 참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겠네.

“…저주가.”

“응?”

“저주가 풀렸네?”

저주?

칼라일은 작게 중얼거리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호위에게 미소를 지으며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저 안에 있는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겠고, 꽤나 큰 소리가 오고 간다는 것도 알겠지만…지금은 우리의 상황이 더 급했다. 칼라일이 문을 두드리자 싸우던 소리가 뚝하고 멈췄다.

“폐하, 접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라.”

문이 열린 순간 얼굴이 벌게진 채 뛰어나오는 샤를로테가 보였다. 칼라일을 보자 잠시 흠칫 떨며 몸을 굳혔지만 이내 나를 쏘아보며 자신의 호위를 데리고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페르소나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 쪽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른 아침부터.”

“어제 지시하신 결재 서류 중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어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일일이 내 허락을 받을 필요 없다. 그건 대공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서류를 참고해야 할 듯싶습니다.”

“연구원들에게 받은 서류는 모두 왼쪽 책상 위에 따로 분류해놨으니 찾아보도록 하라.”

왼쪽 책상 위…. 기사 보고서가 보관되어 있는 곳 바로 옆이다. 나는 칼라일에게 곁눈질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연구관은 무슨 일이지?”

“서던 연구원이 이번 마력 검진 방식에 있어서 차질이 생긴 듯싶다며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차질? 갑자기?”

“네, 말로 설명해드리기는 어렵고, 연구소에 가보셔야 할 듯싶은데. 서던이 연구소에서 대기 중에 있습니다. 지금 가보시죠.”

칼라일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던 페르소나는 마력 검진 방식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시험 검진만 남은 상황에서 차질이 생겼다 말하자 낯빛이 창백해졌다. 칼라일은 다급하게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페르소나를 뒤따라 나가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도 대공이 황제의 집무실에 있는 것은 꽤 자주 있었던 일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밖에까지 들리도록 일부러 조금 소리 높여 말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기사보고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쩐지 다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자꾸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금세 다시 환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손끝이 베이는 듯한 익숙한 감각에 보고서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찾았다….’

역시 마법이 걸려있었다.

그러면 이 보고서는 로웬이 쓴 게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아니야. 일단은 이 보고서를 가지고 나오는 게 우선이야.’

나는 곳곳에 묻어 있는 마력을 손으로 꾹 누른 채 천천히 쓸었다. 칼라일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마법을 해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까칠까칠한 종이의 면이 손에 닿을 때마다 손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윽…!”

마법을 어느 정도 지운 후 결재서류 사이에 그 보고서를 끼워 넣었다.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통증이 머무는 손을 꾹 눌렀다. 그리고 서류를 다 수정한 척 집무실을 나오기 위해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샤를로테와 마주쳤다.

언제 다시 들어온 거지? 내가 기사 보고서를 찾는 것을 봤나?

놀라지 않은 척 침착하게 예법을 갖추어 샤를로테를 마주했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방금 여기서 뭘 찾고 있던 것이지?”

“…결재서류에 오류가 있던 탓에 수정을 도울 참고 서류를 찾고 있었습니다.”

인상을 찌푸린 샤를로테의 모습에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황후 교육을 끝냈다고 했지, 그럼 역사서도 공부를 다 끝냈을 테고. 그렇다면 가넷 가문이 군사권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 텐데…내가 기사 보고서에 손을 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럼 조금 곤란해지는 상황이 된다.

“내 말은 서류는 저 책상 위에 따로 분류되어 있을 텐데, 왜 선반을 찾고 있었냐 묻는 것이다.”

“제가 찾고자 하는 서류가 없길래 선반 쪽도 한 번 찾아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기사 보고서에 대해서는, 보관되어있는 위치까지는 모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샤를로테의 손이 결재서류 사이에 끼어있는 색 바란 보고서로 향했고, 순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꽤나 과민반응이군.”

“폐하야말로 이 무슨 예법에 어긋나는 짓인지 모르겠군요.”

“유독 낡아 보이는 서류가 있길래 궁금해서 그랬다만, 손 좀 놔주겠나?”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샤를로테의 가느다란 팔을 놓아주었다.

“뭔가 이상한데, 반응이나. 행동이나 정말 서류만 찾아본 게 맞나?”

“그럼 제가 이곳에서 물건이라도 훔치려 했다 이 말씀이십니까? 임신 중반쯤 되어서 그러신가, 신경이 많이 예민해지셨나 봅니다. 의심도 많아지셨고요.”

“황후로서 합당한 의심이라 보는데, 이곳은 황제의 집무실이고. 집무실에 대공 혼자 남아있었으며, 내 눈에는 충분히 수상해 보였으니까.”

어디부터 본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처음부터 들어와 보고 있었다면 내가 기사 보고서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려고 한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 내가 마법을 해제할 줄 안다는 것에 놀란 기색이라도 보였을 테데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샤를로테는 표정을 완벽하게 숨길 정도는 아닐 테니, 꺼내두었던 보고서들을 제자리에 넣어두는 모습만 본 것 같은데…그렇다면 굳이 침착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지. 상황의 주도권을 샤를로테에게 빼앗길 필요도 없고.

나는 일부러 샤를로테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폐하. 그렇게 의심을 잘하시면서 다른 사람이 폐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샤를로테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비소를 터트렸다.

“대공답지 않군. 지금 일부러 화제를 돌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레이몬드 제국의 충실한 대공으로서 폐하께 조언을 해드리고 있는 것이랍니다.”

일부러 샤를로테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폐하께서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그날, 칼라일이 정말로 황후 폐하를 위협했냐고 말입니다.”

“…뭐라고?”

“그게 아니라면 폐하께서 칼라일을 위협했는데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인지…폐하께서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샤를로테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됐다. 이 정도면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내가 가져온 셈이 되었다. 샤를로테는 비틀거리며 나로부터 뒤로 멀리 떨어졌다. 그게 정말인지,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선명한 공포가 서려있었다. 페르소나가 자신이 해온 거짓말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진실을 파헤치려 하고 있었으니 꽤나 놀랐겠지.

“황후 폐하께서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니 들어가 보도록 해라.”

나는 반쯤 넋이 나가있는 샤를로테를 그 자리에 두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호위들은 정말로 멍한 표정으로 의자를 붙잡은 채 간신히 서있는 샤를로테를 보며 당황스러워 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샤를로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두려움으로 번들거리는 금빛 눈동자를 한번 흘겨본 채 자리를 벗어났다.

***

말도 안 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페르소나가 뭘 물어봤다고? 내 거짓말을 알아차린 거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도대체 내 거짓말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샤를로테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황제의 비서가 샤를로테를 찾아왔다. 그리고 샤를로테는 비서가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황실에서 진행하는 마력 검진에 참여하지 말 것. 검진을 진행하는 내내 어떤 개입도 하지 말 것. 시종들은 샤를로테가 막기도 전에 그녀가 처리 중이던 서류를 모두 가져갔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업무량이 많아 처리하는데 있어서 조금 느린 감이 있었지만, 그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과 달리 샤를로테를 냉랭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주 본 샤를로테의 심장이 철렁였다. 불안한 심정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페르소나도 그럴까, 곧장 집무실로 향했을 때는 그보다 더 차갑고 서늘한 녹색빛 눈동자를 마주해야 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정한 눈빛으로 보지 않았나.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래도 알아야겠다 싶어서 샤를로테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가 보이기에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당혹감과 분노에 샤를로테는 집무실을 뛰쳐나갔다가 겨우 진정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충격을 받아야 했다. 페르소나의 태도가 달라진 것에 대한 이유를 알아버리니 그녀의 몸이 공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샤를로테는 로젤리아가 수상한 행동을 한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이용해 자신에게 향해 있는 페르소나의 날카로운 경계를 로젤리아에게 옮겨보자 했지만….

‘폐하께서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그날, 칼라일이 정말로 황후 폐하를 위협했냐고 말입니다. 황후폐하께서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샤를로테는 지금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페르소나가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심지어 그걸 로젤리아에게 물어봤다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도대체 언제부터 알아차리고 있던 거지? 내가 한 다른 거짓말들도 알고 있나?’

샤를로테는 자신을 부축해주려는 호위의 팔을 뿌리친 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페르소나에게 가야 했다. 먼저 사실을 말하거나, 또 다른 거짓말을 하거나. 전자보다는 후자가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노 자작부인이 들어와 샤를로테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비키거라!”

샤를로테는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이노 자작부인은 그녀의 앞을 굳게 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 지금 수도에서 황후 폐하로 인해 난리가 났습니다.”

“뭐? 난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한 여식이 황후 폐하께서 자신의 언니를 죽였다며, 모진 고문으로 자살을 하게 만들었다며 난동을 부리고 있답니다.”

내가 누구를 죽여? 모진 고문을 했다고?

샤를로테는 지금 이노 자작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싶었다. 내가 누구를….

“…설마.”

그 순간 샤를로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샤를로테 황후 폐하께서 칼라일을 검으로 찔렸습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그리고 믿든 안 믿든 이건 폐하의 의지입니다만, 칼라일의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심하게 다쳐 정신을 잃어가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다. 로브가 피로 젖어 붉게 변한 것 또한.’

‘칼라일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샤를로테입니다.’

새가 페르소나와 로젤리아의 목소리로 지저귀었다. 바로 어제, 로젤리아와 페르소나가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었다.

새의 부리를 긁어주는 루치아노의 시선은 수도 한 가운데를 향해있었다.

원래는 지금 밝힐 생각이 아니었다. 큰 행사 때나 건국제 때쯤을 생각했지만…예상외 변수로 인해 생각보다 빨리 일을 터트리게 되었다. 새가 연기로 변해 사라지자, 루치아노는 그제야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켈빈 부인을 바라보았다.

“라벨, 언니가 미안, 미안해….”

“….”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흐윽…죽여 버릴 거야…샤를로테, 너를 꼭…어떻게든…!”

켈빈 부인도 동의한 일이었지만 정작 미쳐버린 제 동생을 바라보는 켈빈 부인의 눈은 핏줄이 다 터져 붉게 변해있었다. 증오로 가득 찬 눈은 황궁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처럼 반쯤 미쳐버린 듯한 켈빈 부인을 방에 둔 채, 루치아노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벌써 터트려도…되는 거야?”

문 옆에 기대있던 로웬은 힘겹게 약을 삼키며 방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내뱉는 켈빈 부인을 보며 혀를 찼다.

“황제가 변수였어요. 하지만 저희로서는 좋죠. 황제의 의심을 더욱 돋궈줄 테니까…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괜찮아. 그냥 상처가, 덧나서, 그래….”

“상처라니요?”

루치아노는 설마, 라고 중얼거리며 로웬의 심장 쪽에 있을 흉터를 떠올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지. 그게 덧날 리가. 하지만 그 순간 바닥으로 약병이 떨어졌다. 돌연 심장을 부여잡은 로웬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게, 무슨….”

심장 부근을 부여잡은 채 괴로워하던 로웬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루치아노는 쓰러지는 로웬을 잡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옷 위로 배어나는 상당한 양의 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검고 짙은 마력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