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페르소나가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묻는 이유가 뭘까. 결혼식을 앞둔 그였다. 이제 와 샤를로테가 저지른 악행을 밝혀내려는 이유가 뭐지? 시녀들을 내쫓고 손톱을 뽑고 온갖 짓을 할 때도 가만히 방관하더니, 갑자기 왜?
심란한 마음에 칼라일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말리지 않아 물기가 가득 묻어 있어 촉촉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살짝 꼬며 이리저리 갖고 놀다가 언뜻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던 칼라일이 잠에 취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머물렀다가 내 손가락에 잔뜩 엉킨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간지러워….”
그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르셀민 백작의 말로는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를 처리하느라 앉아있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고 한다. 나는 칼라일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무슨 일 있었어…?”
“응?”
“황제와 무슨 일 있었어?”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싫은 것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눈 위에 연신 입을 맞췄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고, 이상한 걸 물어봐서….”
“이상한 거라니?”
“…샤를로테가 정말로 너를 위협했냐고 묻더라고.”
칼라일은 몸을 일으키며 ‘그게 사실이냐’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 얘기를 왜 묻지? 내가 들었을 때, 샤를로테외 그 황제. 최근에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하던데, 아니었나?”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진실을 얘기해달라기에 그대로 얘기해줬어.”
샤를로테가 칼라일을 검으로 찌른 것과 암살단을 보낸 것. 물론 암살단을 고용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페르소나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너무 순순히 대답해줬나 싶으면서도, 샤를로테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심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칼라일의 검에 찔렸던 그때 그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온몸이 떨렸다. 만약 그때 칼라일을 만나지 않고 지나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로젤리아, 얼굴이 창백해.”
“아, 조금 좋은 않은 생각을 해서….”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래. 응?”
“…그때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소중한 당신이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이렇게 함께 누워있지도 못했겠지.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저 밑을 구르는 것 같아.”
쿵쿵거리는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칼라일이 절망스러워하며 샤를로테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통증에 괴로워하던 신음소리가 귓가를 떠나가지 않는 기분이라 칼라일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칼라일은 내 뺨을 잡고 다시 그를 향해 돌렸다.
“나는 더 이상 그때를 기억하고 있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야. 지금 내 옆에는 네가 있잖아. 괴롭던 그 순간이 아니라, 네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맞댄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안심되었다. 그때 그 괴로운 기억에 몸부림치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괴롭고 비극적인 과거보다는 행복하고 좋은 날만 있기를 바랐다. 몸을 더 가까이 붙이며 허리를 끌어안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로젤리아, 아까 피곤해서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아까 마력 검진의 날짜가 정해졌어. 서던에게 부탁해서 내일 아침 일찍 연구원들끼리 논의해서 정리한 보고서가 올라올 거야. 같이 가줄 수 있을까?”
페르소나에게 함께 가달라고? 나와 페르소나가 마주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내가 페르소나를 보고서에 대해 설명하는 척 연구원과 밖으로 불러낼 테니. 그 사이 네가 안에 들어가서 기사 보고서를 확인해줘.”
“기사 보고서?”
“내가 계속 일하면서 예의주시했는데 도저히 나 혼자서는 안 되겠더라고. 그러니 내일 나와 함께 가줘.”
“그래. 근데 기사 보고서는 갑자기 왜?”
“응?”
“…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칼라일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
‘기사 보고서라니?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지?’ 그 찰나에 내가 한 생각이었다.
“나 방금 뭐라고 그랬어?”
왜 기사보고서를 얘기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전류가 흐른 것 마냥 찌릿한 감각이 빠르게 스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갑자기 기사 보고서 얘기가 왜 나오냐니.
순식간에 기사보고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기사 보고서에 대한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처럼.
그걸 왜, 잊고 있었던 거지? 그 중요한 서류를! 그 서류를 찾아보겠다고 해놓고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심지어 칼라일이 왜 기사 보고서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다.
‘왜 잊은 거지, 그걸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을 내가 잊을 리가 없는데, 샤를로테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나. 갑자기 온몸이 가시덤불로 뒤덮인 것 마냥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꾹꾹 눌러놓은 것을 억지로 끄집어낸 것만 같았다. 불쾌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펑 터질 것 같았다. 머리가 마구 울렸다.
“…샤를로테가 독을 마시고 쓰러진 날. 그 보고서를 찾았었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렇게 완벽하게 잊고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 보고서를 찾았는데, 완전히 잊고 잊었어.”
“난 또 뭐라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었어? 황제가 너를 독을 먹인 범인으로 몰았어. 그리고 네가 정신을 잃었고, 며칠 만에 깨어났지. 그리고 다음날 바로 바올 사건이 터졌잖아.”
“그래도 나중에라도 기억할 수 있었잖아.”
그동안 황제의 집무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리고, 황궁에도 자주 갔었다. 그런데 기사 보고서에 대한 생각은 일절 하지 못했다. 마치 기억을 지운 것처럼, 그 보고서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깜빡 잊더라도 한 번쯤은 기억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네가 기사 보고서 얘기를 꺼낸 순간,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했어. 왜 그랬지?”
다른 보고서와 달리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고 끈적한 마력이 한가득 묻어 있는 그 보고서를….
“아윽…!”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때 본 보고서를 떠올린 순간 통증이 몰려왔다. 그 기억이 새까만 물감을 덕지덕지 칠한 것 마냥 까맣게 변해버리고 시작했다. 버텨낼 수 없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칼라일이 강하게 내 어깨를 붙들면서 나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뭘 본 거야, 로젤리아.”
“!”
“정말로 보고서를 본 게 맞아?”
내 몸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는 칼라일의 팔을 휘감았다. 하지만 곧 칼라일의 손이 그 연기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검은 연기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을 세게 때리던 통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로젤리아. 날 봐, 괜찮아. 이제 안 아플 거야.”
“너 팔은….”
“나는 괜찮아. 이리 와봐.”
아직까지 남아있는 통증은 칼라일이 내 뺨을 부드럽게 터치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삼켰던 헛숨을 겨우 내뱉었다. 뭐였지, 그 방금 그건? 왜 갑자기…그런 고통이 찾아온 거지?
“로젤리아. 너 정말 그 보고서를 본 거 맞아?”
“맞아. 분명 그 날짜와, 시기를 확인했어. 로웬이 쓴 것도 확인했고…이상한 마력이 달라붙어 있는 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
그래, 이상한 마력이 달라붙어 있었다. 샤를로테의 마력과는 차원이 다른 뼛속까지 얼어붙은 정도로 차갑고, 늪지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찐득하고, 비릿한….
“방금 그거, 흑마법이었어.”
“…뭐? 그럼 보고서에 마법이 걸려있었다는 소리야?”
“그래, 하지만 로웬이 마법사는 아니잖아. 그래고 애초에 보고서에 마법을 걸어두는 경우는 흔하지 않고.”
하지만 내가 살핀 것은 분명 로웬이 작성한 기사 보고서였다. 로웬의 필체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쓴 것인가. 그럼 흑마법은 도대체 누가 걸어둔 것이지? 샤를로테가? 아니야. 샤를로테는 기사 보고서가 어디에 놓여있는지조차도 모를 텐데….
“그 보고서에는 상대방의 기억을 억지로 지워두는 흑마법이 걸려있었어.”
기억을 억지로 지워두는 마법이라면….
“루치아노가 가르쳐줘서 알잖아. 그 정도 수준의 마법은 못 해도 상급 마법사 정도 되어야 다룰 수 있어.”
“…그게 로웬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하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을까?”
칼라일은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만약에 그 보고서에 마법이 걸려있고, 로웬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와 관련되어 있다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칼라일의 말대로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급 마법사가 중간에 개입한 게 되고, 그 사실을 지금껏 아무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
사람들의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나무는 불타고, 재가 하늘을 뒤덮었다. 군사들은 맹렬하게 한 저택에 공격을 퍼부었고, 한 노인이 그 군사들을 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떠오른 마법진이 커질수록 쓰러지는 군사들의 수가 늘어났지만 이내 군사들의 검에 그 노인 역시 쓰러졌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이 피에 물든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잔혹하게 살육을 저지르는 모습에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어린아이조차 죽이라 명하는, 잔혹한 지시뿐이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혀오고, 누군가의 피가 내 얼굴위로 뿌려지고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를 헤집은 순간.
‘헬리오도르 가문의 사람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라!’
잠에서 깼다.
로웬은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또 악몽을 꿨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심장 부근에 있는 통증도 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로웬은 식은땀으로 흐르는 이마를 대충 닦아냈다. 심장의 통증이 너무 심했다. 약을 먹어도 좀처럼 낫지 않고, 이제는 악몽마저 꾸니 미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 악몽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했다. 로웬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제멋대로 잔혹하고 잔인한 지시를 내리는 자신을 떠올렸다.
제 검에 찔리고, 베이고 숨이 끊기고….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외친, 그 한마디.
헬리오도르 가문이라면 분명 칼라일이 소속된 가문일 텐데.
“헬리오도르….”
중얼거린 순간 다시 심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통증에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옷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심장 부근에 있던 흉터. 언제 생겼는지 모를 그 흉터를 거울에 비친 순간 로웬은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흉터가 보랏빛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