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99화 (99/170)

#99화, 샤를로테만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샤를로테가 아벨리의 마력을 잡아먹는다. 그렇다면 아벨리의 몸속에 있는 마력이 샤를로테의 것이 된다는 것인가? 흡수? 그럼 아벨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네트가 왜 샤를로테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벨리의 눈에는 샤를로테의 검고 차가운 마력이 아네트의 마력을 휘감고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으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했다.

“대공.”

“….”

“대공?”

아네트 생각에 페르소나가 부르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페르소나가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네트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자꾸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렸다.

“혹시 어디 아픈 것인가. 이렇게 집중 못 하는 모습은 처음이군.”

“다시 집중 하겠습니다……폐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일단은 제국민들의 수를 통계 낼 때 피난민들이나, 현재 제국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 등, 특수한 경우의 사람들은 따로 분류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페르소나에게 그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장차 황실 마법사가 될 귀중한 아이들이니 말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증명을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아네트가 본 그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칼라일, 그리고 아네트 뿐이었다.

칼라일은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고는 했지만 만약 아벨리의 마력이 샤를로테에게 모두 먹혀버린다면, 아벨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칼라일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는 않겠지. 그래도….

“안색이 안 좋은데. 정말 괜찮은 것이 맞나?”

“네, 괜찮습니다. 아까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몸이 피곤해진 것뿐입니다.”

“아네트와 아벨리가 대공을 잘 따르던데.”

“네?”

“카렐리아와도 잘 지내는 것 같고.”

…또 페르소나의 시선이 카렐리아를 향했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따라온 카렐리아는 내 바로 옆에서 두껍게 쌓인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르소나가 왜 자꾸 카렐리아에게 관심을 갖는 것인지, 아무리 아이들을 좋아한다지만 카렐리아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 그래도 칼라일의 여동생인데. 그는 칼라일을 싫어하지 않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라일에게 안 가도 되겠어?”

“응, 카렐리아는 언니랑 있는 게 더 재밌어!”

칼라일에게 가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다르다 보니 카렐리아를 어느 한쪽이 데리고 있어야 했다. 페르소나의 관심을 피해 칼라일에게 맡기려 했지만 어쩐지 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마력 검진이 뭐에요, 폐하?”

“마력 검진은 말 그대로 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자들을 조시하는 것이란다. 제국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되도록 검사하는 시간을 줄여서 제국민 모두에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으음, 그렇구나….”

카렐리아는 제 몸만 한 기다란 서류를 든 채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아이가 보기에는 어려운 내용일 텐데도 꿋꿋하게 읽는 게 신기한 것인지 페르소나는 내가 정신이 팔리는 횟수만큼 카렐리아를 신경 쓰고 있었다. 정말 그냥 아이를 좋아해서 이러는 건가, 의문이 들 때 쯤 카렐리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서류에 그려진 제국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부터 조사하면 되겠다. 그치, 언니?”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마법사가 되는 것은 몸에 마력의 유무로 따지잖아? 그러니 마력석 광산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검사하고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나중에 검사해야 해! 아니면 검사하는 사람을 따로 나눠서 하는 것도 괜찮겠다, 각 영지마다 검사 대상자를 보내고 일정 기간 내에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는 거야! 그리고 자질이 보이는 사람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여서 2차 검사하면 되지 않을까?”

환하게 웃는 얼굴과는 달리 카렐리아가 내뱉는 말은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카렐리아가 가리킨 곳은 지도상으로 마력석 관상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었다. 지도를 읽은 것인가? 카렐리아가? 레이몬드 제국의 지도는 다른 제국과 달리 특수한 기호를 이용해 표시해두었다.

그래서 지도를 읽는데 불편함이 있을 텐데. 게다가 방금 카렐리아가 낸 방안은 이미 마력연구원들이 낸 방안이었다. 카렐리아가 마법사라서 다른 사람에 비하여 마법 지식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다고?

“지도 읽는 법은 어디서 배웠니?”

“언니 서재에 있는 지도학이라는 책에서 읽었어!”

지도학을 읽었다고? 그 어려운 책을? 한번 읽고 그걸 기억해?

카렐리아의 말을 귀담아듣던 페르소나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지도학은 수업 과목 중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전에도 다른 제국과 다르게 지도를 표시했지만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 당시, 첩자가 지도 읽는 기술을 빼돌렸고, 그로 인해 전쟁에서 패하자 11대 황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지도학 전체를 다시 개편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이해하고 외우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나와 페르소나도 두 달을 걸쳐 겨우 외운 것을….

“똑똑하구나, 카렐리아. 책에서 본 것을 한 번에 이해하고 암기하여 이렇게 훌륭하게 적용을 하다니.”

페르소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었다. 그의 얼굴이 어쩐지 어두워 보였다.

“정말로, 똑똑해.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건가?”

“네, 저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렇구나.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입꼬리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회의를 거의 끝낼 즈음에도 페르소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호위들에게 카렐리아를 칼라일에게 데려다주도록 지시한 후,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정리했다. 그때 페르소나가 펜으로 책상으로 톡톡 두드렸다.

“대공.”

“네, 폐하.”

“잠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할 얘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생일 연회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지 페르소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지난번에 나에게 했던 얘기 기억하나?”

“무슨 얘기 말씀이십니까.”

“샤를로테가 마력연구관, 아니. 칼라일을 위협했다는 것.”

갑자기 그 얘기를 왜 꺼낸 거지?

“정말로 샤를로테가 칼라일을 위협했나?”

“….”

“샤를로테가 나에게 그랬지. 칼라일과는 약혼자 사이였고, 이 제국으로 넘어와 살려고 했지만 칼라일이 폭력을 행사했으며, 대공이 칼라일을 정부라 말한 그날, 칼라일이 자신을 위협했다고.”

샤를로테가 뭐라고 말했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가관이었다. 진실이라고는 약혼한 사이라는 것 빼고는 모두 거짓이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이 모든 게 사실인가.”

뒤늦게 사실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제가 어떻게 답해드리면 좋을까요.”

“진실만 말해줬으면 좋겠군.”

“진실이라, 저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나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샤를로테의 거짓을 밝혀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칼라일이 샤를로테를 위협해? 폭행을 저질러?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샤를로테 황후 폐하께서 칼라일을 검으로 찔렸습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

“그리고 믿든 안 믿든 이건 폐하의 의지입니다만, 칼라일이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심하게 다쳐 정신을 잃어가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다. 로브가 피로 젖어 붉게 변한 것 또한.”

“칼라일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샤를로테입니다.”

진실만을 말하라기에 말했다. 그러나 내 진실을 들은 페르소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리다 못해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정말이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샤를로테가 칼라일에게 저지른 끔찍한 짓을 다시 입에 담고 싶지는 않았다.

서류를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소나가 황급히 일어나면서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문을 열기 바로 직전, 나는 고개만 살짝 돌린 채 황후 시절, 페르소나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애초에 황녀의 자존심을 무시했다, 정부인 자신을 깔본 것이다, 라면서 겨우 15살 된 시녀의 손톱을 모두 뽑은 것 자체가 잘못되었지요.”

“!”

“그런 샤를로테가 뭔들 못하겠습니까.”

***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로젤리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젤리아에게 진실만을 말해 달라 부탁했고, 그녀는 예전과 똑같이 샤를로테가 칼라일을 위협했다고 말했다. 아니, 검으로 찔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 칼라일의 몸에 있던 심한 상처들이 모두 샤를로테가 한 짓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껏 생각해왔던 샤를로테의 이미지가 철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카렐리아를 불러온 것은 그 아이가 샤를로테가 13황녀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살갑게 대해주고, 샤를로테에 대해 아는 것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렐리아는, 다른 아이였다. 생각보다 똑똑하고, 영특하며 천진난만하지만 그만큼 영리한….

심장이 철렁였다. 그런 애가 1황녀와 13황녀도 구별 못 할까.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이제는 아예 확신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1황녀라며, 가련하게 울던 샤를로테의 모습이 추악하게 변하며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내 안색이 많이 안 좋았는지 집무실로 들어온 비서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폐하.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아니다. 괜찮다. 무슨 일이지? 벌써 검진 방식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나?”

“아니요, 그건 아니라…저번에 폐하께서 지시하신 샤를로테 황후 폐하의 동생분의 생존 결과를 조사하라 지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안케도니아 황실에 대해서도….”

비서가 건넨 정보의 양은 현저히 적었다. 아무래도 사라진 것들도 많고, 황실 자체가 멸망해서 그런가, 하지만 모든 정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찾는 정보만 있으면 된다. 샤를로테에 관한 정보나, 샤를로테와 칼라일에 관한….

“폐하. 사실 이건 저도 어쩌다 들은 내용이긴 합니다만….”

“무엇이지?”

“제가 아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출판 업계에서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을 해서…혹시나 안케도니아 제국에 대해 잘 아는지 물어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실을 들었습니다.”

“큰 소란?”

“네. 침공이 끝난 후, 황족 몇 명을…황궁에 매달아 전시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황제와 황후의 목을 비롯해, 1황자와 1황녀의 시신이 가장 끔찍하게 훼손되어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서류를 넘기던 손이 차갑게 식어갔다. 1황녀의 시신이 매달려 있었다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1황녀는 샤를로테 황후 폐하잖습니까.”

“….”

“혹시 그 자가 잘못 입수한 정보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착각이 아닐 것이다. 말꼬리를 길게 늘인 비서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러다 내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한 것인지, ‘설마’라는 말을 짧게 내뱉었다.

“혹시 최근 역사서를 읽으시고 안케도니아 황실에 대해 조사하라 하신 명이 전부….”

“확실하지 않은 일이다.”

“!”

“그러니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도록 알았나? 좀 더 알아낸 정보가 있으면 곧장 가져오도록 해라.”

머리가 아팠다. 너무 아팠다. 만약 정말 13황녀라면, 그녀가 저지른 악행들. 그로 인해 피해본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보상해주어야 하지? 샤를로테에 의해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고, 괴로워하고, 아이까지 잃은 로젤리아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모든 일의 시작은 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로젤리아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괴로워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내가…

‘내가 그날, 샤를로테만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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