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친한 척 하지 마
아네트와 아벨리는 달려와 페르소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황궁 사람들과 마력연구원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다더니, 확실히 고아원에 있을 때보다는 얼굴이 한층 밝아져 있었다. 나는 카렐리아를 내려놓고 두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참을 꺄르르 거리던 아네트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네트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아벨리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고 아벨리도 나를 보자 팔을 마구 버둥거렸다.
아네트와 아벨리는 메리골드 고아원에서 유독 나를 잘 따르던 아이들이었다. 그날은 아주 간만에 본 것이라, 되도록 많이 놀아주려 했지만 이후 마법사인 것을 알고는 함께 못 놀고 곧장 황궁으로 보내졌다.
아네트는 아벨리의 손을 꼭 잡고 밝은 표정을 짓다가 내가 팔을 벌리자 곧장 나에게도 안겼다. 가까이서 보니 살결도 더 뽀얘지고 비쩍 말랐을 때와 달리 훨씬 통통해져 있었다.
“잘 지냈니, 얘들아?”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요!”
“엄청 잘 지냈어요. 공부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어요.”
아기 새처럼 삐약거리는 게 귀여웠다. 쓰다듬어달라며 내 손가락을 꼭 쥔 아벨리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아벨리의 머리로 손을 뻗은 순간 아벨리의 머리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벨리는 자신의 머리를 때린 카렐리아를 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한테 친한 척 하지 마!”
하지만 카렐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지라며 아벨리를 나에게서 밀어냈다.
“카렐리아, 그러면 안 돼요.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렇지만 언니는 카렐리아만의 언니인데 자꾸 안기잖아! 언니한테 달라붙지 마!”
“황후 폐하가 왜 네 언니야! 이 나쁜 거짓말쟁이야!”
아벨리가 내뱉은 황후 폐하라는 말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들 나와 페르소나, 칼라일 이 세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아이가 급기야 울 기세로 투닥거리자 나와 칼라일이 아벨리와 카렐리아를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내가 카렐리아를 안아들자, 카렐리아는 아벨리에게 보란 듯이 혀를 내밀며 내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본 아벨리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
“뭐? 마력연구관과 대공이 어디에 머문다고?”
“님프 궁에 머문다고 방금 하녀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봉변인가. 어디에 머물러? 님프 궁에 머문다고?
샤를로테는 당장이라도 페르소나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칼라일과 로젤리아가 별궁에 머문다는 것도 어이없는데, 뭐? 님프 궁을 내주었다고?
님프 궁은 황후에게 주어지는 별궁이었다. 황후의 가족들과 친척이 머무는 궁이며, 황후의 권한 아래 있는 궁이나 다름없었다. 최근 샤를로테는 그 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많은 양의 업무가 어느 정도 끝나면 한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루아 남작부인의 말로는, 아름다운 궁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 또한 정말 이름 그대로 숲의 요정인 님프가 날아다닐 것만 같이 아름다웠고 고급스러웠으며 풍경도 무척 예쁘다고 말했다.
그런데, 황후인 나도 사용해보지 못한 궁을 칼라일과 로젤리아에게 내어줘? 누구 마음대로?
“하녀들의 말로는 전 제국민 대상으로 하는 마력 검진을 위해 오늘부터 논의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규모가 큰 만큼, 아무래도 별궁에 머물며 업무를 해야 하는 편이 훨씬….”
“나도 아니까, 조용히 하거라! 그리고 넌 누구지? 루아 남작부인은 어디로 가고?”
“저는 루아 남작부인 대신으로 온 이노 자작부인이라고 합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닐 텐데.”
“루아 남작부인은 오늘 휴가를 낸 터라….”
“승인도 안 내렸는데, 누구 마음대로 휴가를…!”
아니다. 진정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루아 남작부인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낸 게 조금 이상했지만 내가 지시한 일들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페르소나가 상의 없이 황후에게 주어진 별궁을 내려주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마력 검진? 난 아직 제국민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검진에 관한 기획이나 결재해야 할 서류를 받은 것이 없다. 그런데 논의라니….
아직 내 업무 능력이 미덥지 않은 것인가? 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고안해낸 복지 정책에 페르소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이노 자작부인.”
“네, 황후 폐하.”
“최근 시행된 복지 정책에 대한 제국민들의 선호도를 조사했었지? 그 보고서를 나에게 가져와.”
“최근 시행된 복지 정책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변동 없이 그대로 간다고 했습니다. 검토되는 정책이 하나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반려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려되었다니. 그래서 그런 것인가. 그래서 나에게는….
가뜩이나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였다.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겪은 기억이 자꾸만 꿈속에서 나와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그래서 몸도 정신도 피곤한데, 그 꼴 보기 싫은 두 명과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니!
“별궁에는 얼마나 머무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그리고 아네트와 아벨리는?”
“아네트님과 아벨리님은 모든 수업을 끝내고 아마…산책 중에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계속 경계를 풀지 않은 아벨리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상냥하게 대하느라 잔뜩 지쳤는데…. 하지만 로젤리아와 칼라일이 온 이상 아네트와 아벨리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려야 했다.
메리골드 고아원은 로젤리아가 황실의 예산이나 황후에게 주어지는 예산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사비로만 지원하며 수시로 봉사를 위해 찾던 고아원이었다. 아네트와 아벨리는 로젤리아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이들이라면 애정을 갖고 돌보았던 로젤리아니까….
로젤리아가 두 아이에게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지도 몰랐다. 그러기 전에 막아야 했다.
“가서 아네트와 아벨리를 데려와. 지금 당장.”
***
가장 좋은 별궁을 내어준다고는 했지만 황후의 권한에 있는 님프 궁을 내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샤를로테와 합의해서 내어준 걸까. 샤를로테가 나와 칼라일에게 이 궁을 내어줄 리가 없을 텐데….
벌써부터 샤를로테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궁은 처음 봐.”
“님프 궁이야. 황후와 황후 직계 가족만이 쓸 수 있는 궁이지.”
“…그 성격에 이 궁을 내어줬을 리 없을 텐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이는 아벨리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는 카렐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네트가 둘 사이에 끼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게 귀여우면서 안쓰러웠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호위를 뒤로 물렸다.
“계속 이렇게 싸울 거야? 화해 안 해?”
“황후 폐하, 아니…대공 각하는 저와 더 친했어요!”
“언니는 카렐리아 언니야! 카렐리아랑 더 친해!”
“내가 너보다 더 먼저 만났어!”
“아니야!”
“맞아!”
투닥거리는 것을 보면서 말려야겠다는 생각과 귀엽다는 두 생각이 충돌했다. 그때 칼라일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쩐지 아이들의 싸움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카렐리아가 아벨리가 계속 싸워서 그런가. 손을 뻗어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건데.”
“응?”
“로젤리아는 내 거잖아, 그렇지?”
지금 그거 때문에 그렇게 불만인 표정을 지은 거야?
아네트와 카렐리아 못지않게 칼라일도 귀여웠다.
아이들에게 질투하는 성인이라니. 나는 조용히 웃으며 내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 그 말 아이들 앞에서 했다간 큰일 나는 거 알지?”
“그래서 참고 있는 거야, 너도 봤다시피 카렐리아 성격이….”
칼라일은 말끝을 흐리며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카렐리아 성격이 어때서? 화나면 나오는 칼라일의 성격과 쏙 빼닮은 것 같은데.
아벨리를 안아줘야 할지 카렐리아를 안아줘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호위기사 앞으로 한 시녀가 다가왔다.
못 보던 시녀였다. 요 근래 새로 들어온 시녀가 있었나? 시녀라 해도 귀족의 영애거나 귀부인일 텐데, 저 사람은 누굴까. 아네트의 표정을 보니 두 아이를 돌보는 유모 겸 전속 시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아네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나와 칼라일의 뒤로 몸을 숨기며 시녀의 눈치를 계속 보기 시작했다.
“아네트님, 아벨리님. 황후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아벨리는 순식간에 밝게 웃으며 좋아했지만 아네트는 바들바들 떨며 이내 칼라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네트님. 가셔야 합니다.”
“시, 싫어요. 안 갈래요….”
“가셔야 합니다. 황후 폐하의 명입니다.”
“대, 대공 각하. 연구관님. 저 안 가면 안 돼요…?”
“아네트님. 어찌 이리도 예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십니까.”
아네트는 착한 아이였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소심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녀는 엄하게 굴며 아네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아네트는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네트님!”
“귀가 아프군.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지?”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황후 폐하께서 지금 당장 데리고 오시라 하셔서, 제가 마음이 좀 급했나 봅니다.”
황후 폐하라는 말에 아네트는 바들바들 떨었다. 샤를로테가…때리기라도 했나? 아니야. 페르소나가 아끼는 것을 알 텐데. 그리고 아벨리는 저렇게 좋아하잖아.
“이름이 뭐지?”
“아네트님과 아벨리님의 예절 교육 겸 전속 시녀로 일하고 있는 이노 자작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노 부인. 아네트는 내가 달래 보내도록 하겠다. 일단 아네트부터 데려가도록 하거라.”
아네트는 아벨리가 이노 부인을 따라가는 내내 발을 동동 굴리며 초조한 듯 덜덜 떨었다. 급기야 아벨리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돌연 울음을 터트렸다. 놀란 아이를 달래주었지만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칼라일과 주변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달랜 뒤에야 아네트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아네트. 혹시 황후 폐하께서 괴롭히시니?”
“아뇨….”
“그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칼라일이 아네트와 눈을 맞추며 상냥하게 묻자 아네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황후 폐하가 아벨리를 자꾸 잡아 먹어요….”
샤를로테가 아벨리를 잡아먹는다고?
“황후 폐하한테서 흘러나오는 차갑고 어두운 게 자꾸 아벨리를 까맣게 만들어요.”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샤를로테로부터 흘러나오는 차갑고 어두운 것? 아벨리를 까맣게 만든다고?
“아벨리는 연구관님처럼 새하얗고 깨끗했는데, 황후 폐하랑 있을 때면 까매지고 흐릿해져서….”
칼라일처럼 새하얗고 깨끗한 것? 설마…마력을 말하는 건가?
샤를로테로 인해 마법에 걸렸을 때 느껴지던 차갑고 끈적이던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다시금 올라왔다. 아네트가 말하는 게 혹시 샤를로테의 마력을 말하는 건가?
…샤를로테의 마력이 아벨리의 마력을 잡아먹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