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친한 척 하지 마!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러다 정말로 해를 입히는 마법을 쓰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카렐리아를 걷어찬 후작은 어찌되어도 상관없지만 마력연구관인 칼라일의 평판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마법을 쓸 수 없는 민간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마법을 쓴 셈이 되니까. 나는 카렐리아를 꼭 끌어안은 채 칼라일을 말리기 위해 조심히 다가갔다. 하지만 카렐리아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내 걸음이 멈췄다.
“언니.”
“?”
“괜찮아.”
괜찮다고? 아, 넘어진 게 괜찮다는 소리인가? 그 사이 칼라일이 월포드 후작의 목을 내던지듯 놓았다. 급하게 숨을 들이 마시며 컥컥대는 후작을 자비 없는 눈길로 내려다보던 칼라일은 손에 먼지가 묻은 것처럼 털어냈다.
“서던.”
“네, 네!”
“지금부터 월포드 후작 가의 마력연구원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회수한다.”
그 말에 월포드 후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마력 연구원 자체가 들어가기 매우 힘든 자리였다. 어마어마한 돈과, 작위, 명예, 오죽하면 연구원이 되는 순간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 월포드 후작같은 경우는 자작이었다.
하지만 저급한 인성과는 달리 머리가 무척 좋았던 탓에 여러 가지의 공을 상당히 세웠고, 그 덕분에 후작의 자리에까지 20년 동안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사람이었다.
“권한을 비롯해 오늘부로 월포드 후작의 작위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마력연구원의 자리에서 해임한다. 연구원 시험을 다시는 치를 수 없을 것이며, 퇴직금 또한 지급을 불허한다.”
마력연구원들은 원할 때 퇴직을 신청할 수 있고, 퇴직금 또한 지불되며 작위도 그대로다. 하지만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거나, 죄를 저지르면 그동안 지급되었던 것들이 모두 중단되며, 작위 또한 원래의 작위로 돌아갔다.
월포드 후작이 여기서 쫓겨나게 된다면 다시 자작이 될 테고, 그럼 지금까지 무시했던 이들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그, 그건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까짓 게 나를 여, 여기서 쫓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가 세운 공이 몇 개이고, 헤레이스 마력석 수출을 성공시킨 것도 나야!”
“후작이 20년 동안 세워온 공보다 내가 이곳에 취임한 지 사흘 만에 세운 공이 더 많다는 것도 모르시는군요. 그리고 나는 엄연히 마력연구관입니다. 나에게 이런 권한도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하긴, 지금껏 차기 마력연구관 후보로만 불렸지, 실제로는 취임한 적이 없어서 모르시나 봅니다.”
칼라일은 허리를 굽혀 월포드 후작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설령, 당신의 해임이 불허되더라도 나는 기필코 당신을 쫓아낼 겁니다.”
작위 회수라는 말에 연구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월포드 후작은 자작임에도 좋은 머리 하나로 연구원 자리와 후작의 작위를 따낸 사람이었다. 특이 케이스였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연구원들은 못해도 백작이었다.
그리고 연구원과 후작 작위를 바탕으로 그는 오랫동안 좋아하던 여식과 강제로 결혼했다. 그 여식의 가문이 백작 가문이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연구원에다가 후작인 그의 협박 어린 청혼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으니,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그제야 월포드 후작은 자신의 처지가 밑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인지, 뒤늦게 칼라일에게 매달렸다.
“여, 연구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당장 저자를 연구소에서 내쫓아라. 서던, 폐하께 보고서 올리고 나에게 보고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연구관님.”
뒤늦게 나와 카렐리아를 발견하고는 곧장 카렐리아의 상태부터 살폈다. 뒤로 가볍게 넘어진 거라 드레스에 먼지가 묻은 게 다였다. 나는 드레스에 먼지를 털어주며 거의 끌려가듯 나가는 월포드 후작의 고함소리에서 카렐리아의 귀를 막았다.
“못 볼 꼴 보여줘서 미안해.”
하긴 이렇게 분란이 일어나고 한 조직 내 갈등이 생기는 것은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꽤 속상해 보이는 칼라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그렇게 가만 나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잘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왜, 나는 색달라서 좋았어. 네가 화내는 모습은 드무니까.”
“그래, 드물지. 오늘은 그 드문 모습을 두 번씩이나 보여주게 생겼고.”
칼라일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카렐리아의 두 볼을 치즈처럼 쭈욱 늘렸다. 분명 손에 힘을 주지 않는 게 보이는데도 카렐리아는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왜 따라왔어.”
“카레리아후 구에 가구시퍼써 (카렐리아도 궁에 가고 싶었어.)”
“도대체 어떻게 따라온 거야? 설마 걸어왔어?”
“마부 아저씨가 태워줬어.”
뺨을 놓아주자 카렐리아는 작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다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카렐리아가 만든 버터 쿠키 줬더니 태워줬어!”
“버터 쿠키?”
“응! 엄청 많이 줬어!”
…이래서 마부 자리에 태워준 거구나.
해맑게 웃는 카렐리아의 얼굴에 사랑스러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
“네가 카렐리아니?”
페르소나는 무릎을 살짝 굽힌 채 그의 앞에서 멀뚱히 서있는 카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칼라일은 아까 월포드 후작이 카렐리아를 발로 찬 것 때문인지 날이 바짝 선 상태였다. 게다가 페르소나를 먼저 조롱했다지만 그에게 맞은 적도 있으니까.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였다. 칼라일은 페르소나가 카렐리아를 다치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그의 얼굴에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에요?”
“…아저씨는 페르소나라고 해. 이 제국의 황제란다.”
아저씨라는 말에 비서와 기사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저씨, 그래 카렐리아의 입장에서는 페르소나는 그저 아저씨인게 맞았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페르소나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저씨’라고 외치는 게 너무….
“황제?”
“황제 폐하, 라고 불러야 한단다. 카렐리아.”
“그렇구나! 그럼 폐하 아저씨!”
기어코 비서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칼라일은 웃음을 꾹 머금은 채 카렐리아의 어깨를 잡고 ‘황제 폐하’라는 발음을 똑같이 따라하도록 시켰다.
“따라해, 황제 폐하.”
“폐하 아저씨.”
“아저씨 아니야, 황제 폐하라고 불러야 해.”
“아저씨 황제?”
“카렐리아. 아저씨라는 말은 지우렴. 그냥 폐하라고만 부르면 되니까, 칼라일이 한 것처럼 따라 해보자, 황제 폐하.”
안 그러면 칼라일은 웃다가 쓰러질 것 같거든. 나는 애써 얼굴 위에 웃음을 지우며 카렐리아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카렐리아는 그제야 페르소나를 제대로 폐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폐하! 그래서 저랑 오빠랑 언니는 왜 부르셨어요?”
“마력연구관과 대공에게 하사품을 내리기 위해서란다.”
하사품? 칼라일이 마법사 아이를 찾은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하긴, 이 제국 내에서는 크게 이수될 거리지. 고아원에서 찾은 두 명의 아이가 마법사이니, 나중에 전 제국민을 대상으로 마력 테스트를 할 때 더 많은 현조를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불렀구나. 그런데 굳이 하사품을 주기 위해 나와 칼라일을 황궁까지 불러들였다고? 카렐리아는 왜 부른 거지?
“카렐리아에게도 하사품을 주시나요?”
“응? 갖고 싶은 게 있느냐?”
“갖고 싶은 것은 없고, 소원은 있어요!”
“무엇이냐?”
“카렐리아도 아네트랑 아벨리를 만나고 싶어요!”
카렐리아가 아네트와 아벨리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 순간 그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주 찰나였지만 페르소나의 얼굴에는 분명 미소가 떠올랐었다. 아무리 어린 아이를 좋아한다지만 칼라일의 동생인 카렐리아까지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낌새에 카렐리아를 안아들었다. 페르소나의 시선이 나와 카렐리아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허공으로 향했다.
“사실 그대들을 부른 것은 하사품과 더불어, 아네트와 아벨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대규모 마력 검진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그제야 왜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대규모 마력 테스트를 준비 중이라는 것은 칼라일에게 이미 전해들은 사실이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것이니 제국의 대공인 나는 거의 필수로 참가해야 했다. 그의 입에서 ‘논의’라는 말이 나오자 그나마 긴장이 조금 풀렸다. 논의를 위해서 이렇게 부른 거라면 나는 가넷 대공로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니까.
보기가 껄끄러웠던 그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수척한 그의 얼굴을.
…뭐야, 잠을 못 잔 거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귀빈실에서 페르소나를 기다릴 때 문 너머로 ‘제발 몸 좀 챙기시라고요, 폐하! 제가 이렇게 예법까지 어겨가며 말씀드려야 합니까!’라는 비서의 절규 어린 목소리를 들었다. 그게 이걸 말하는 거였구나.
“마력 검진은 언제 진행될 예정입니까?”
“아네트와 아벨리가 지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응해야 하니…건국제 이후가 되겠지.”
“전 제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해야 하니 공식적으로 신고 된 제국민 인원수를 다시 조사하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자와 고아원에 소속된 아이들의 수까지 빼놓지 않고 전부 조사해야겠군요. 죄수들은 어떻게 할지, 테스트를 진행할 장소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미리 공표해야겠습니다. 바쁘겠습니다.”
“그래, 바쁘겠지. 그래서 오늘은 마력연구관과 대공 모두 한동안 별궁에 머물렀으면 하는데…카렐리아도.”
루벨라이트 대공도 이런 일에는 한 번에 이주씩 황궁에 머물며 업무를 수행했다. 마력 검진은 처음 진행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역사서에 남을 일일지 모르니 별궁에 머물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카렐리아는 왜?
“카렐리아도 함께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아네트와 아벨리와 같은 마법사이고 나이도 비슷할 듯싶으니….”
“죄송하지만, 저는 카렐리아가 마법사라고 말씀드린 기억이 없는데요, 폐하.”
어떻게 아셨습니까? 칼라일은 약간의 불쾌함이 첨부된 미소를 지었다. 카렐리아가 마법사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그럼 페르소나는 어떻게 안 거지? 나는 카렐리아를 더 끌어안았다.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카렐리아를 데려오라고 한 것도 그렇고, 나와 칼라일만 황궁에 머물면 될 것을 카렐리아까지 머물게 하려는 게 찜찜했다.
“……마력연구원들이 그러던데, 연구관이 마법사이니, 연구관의 동생도 마법사일 거라고.”
하루에도 한두 번씩은 연구소에 들르던 그였으니 그런 얘기를 들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찜찜한 느낌은 여전했다. 칼라일도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미소를 지으면서도 카렐리아를 안고 있는 나를 등 뒤로 숨겼다.
“그렇군요. 카렐리아가 아네트와 아벨리보다는 마법에 더 능숙하니까 아네트와 아벨리에게 도움을 많이 줄 것입니다. 하지만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가 미처 폐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 갑작스럽지…다음에는 미리 언질을 주도록 하겠다.”
칼라일이 비꼬는 어투로 말했음에도 페르소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말을 흘러 넘겼다. 마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저 멀리 소란스럽게 뛰어오는 아네트와 아벨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어쩔 수가 없었다. 공들여 준비하던 계획을 앞당기더라도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사실상 마력 테스트보다는 결혼식을 치를 샤를로테의 신분이 더 중요했다. 1황녀이든 13황녀이든 상관없다. 그녀가 1황녀인 척 저지른 행동들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아니라는 쪽에 생각이 기울었다. 13황녀였다면 칼라일이 진즉에 말했겠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그는 현재 마력연구관이었다. 말하거나 소문을 내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샤를로테가 13황녀라는 말을 꺼낸 사람이 하필 칼라일의 여동생이었다. 칼라일이 그렇게 말하라 시켰나? 어린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아 남작부인이 어린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눈치 못 챌 리도 없었다.
‘폐하, 제가 카렐리아에게 갔던 것은, 샤를로테 황후 폐하께서 카렐리아에게 황후 폐하를 알고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런 의심스러운 지시를 받았다?
차라리 직접 확인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저의 시종 중 한 명을 매수해 카렐리아가 마법사인 것을 알아냈다. 그걸 이용해 여러 가지를 핑계 삼아 카렐리아를 머물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카렐리아와 단 둘이 남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폐하, 저 오늘 열심히 수업 들었어요!”
“폐하, 저는 오늘 테스트 백점 맞았어요.”
그러기 위해서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안쪽이 죄책감으로 인해 욱신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