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침대에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팔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이번에도 만져지는 커다란 베개가 만져지겠구나 싶었다. 매일같이 푹신한 베개를 칼라일 대신 끌어안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잘 잤어?”
칼라일은 편지로 추정되는 문서를 읽다가 나를 내려다보며 따스하게 웃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자다 깬 얼굴인데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나는 얼굴 근처로 손을 뻗다가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쥐었다.
옅은 금빛이 신비로웠다. 게다가 이렇게 길다니. 쉽게 엉킬 것 같은데 머리카락은 의외로 손가락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머리에 뭐 묻었어?”
“그냥, 머리카락이 신기해서….”
“내 머리카락? 아, 금빛이라?”
“그것도 있지만 보통 이렇게 길게 기르지 않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에서 빗을 가져왔다. 이렇게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처음 만져본다. 내 머리카락보다 더 긴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을 끝부터 천천히 빗으로 빗었다. 어딘가 엉켜있는 부분이 있을 줄 알았지만 내 착각이었다. 부드럽게 빗겨지는 게 신기했다.
대신 빗어줄 것도 없었다. 내가 감탄사를 내뱉자 칼라일은 그제야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는 네 머리카락이 더 좋은데.”
“붉은색 머리카락이? 어딜 가든지 시선이 몰려서 불편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머리카락 때문만이 아니라 너의 수려한 외모 때문 같은데.
칼라일은 내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쥐고는 입을 맞췄다.
“머리카락도 붉고, 눈도 붉은빛 보석을 닮았잖아. 너무 좋아.”
“그 정도야?”
“응. 그리고 여기도 붉어서 좋고.”
그의 손가락을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목이 붉다고? 손끝으로 더듬다가 문득 칼라일이 목덜미 쪽에 잔뜩 입을 맞추고 깨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얼마나 붉은데?”
“으음….”
“칼라일?”
“네 머리카락보다는 덜 붉어.”
어쨌든 눈에 띈다는 거잖아. 내 눈치를 보며 나를 안으려는 칼라일을 밀어내고 거울 앞으로 가 앉았다. 목이 얼룩덜룩했다. 많이도 물었네. 손끝에 마력을 심어 살짝 터치를 하니 붉은 자국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외출할 일이 없으니 망정이지….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칼라일이 뒤에서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화났어?”
“화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놔두면 시종들이 전부 내 목만 볼 거야.”
거울에 비친 칼라일 목도 나보다는 옅었지만 자국이 약간은 남아있었다. 시종들의 시선 때문에 없애는 것도 있지만 자꾸 칼라일과 얽힌 채 굉장히…그런 밤을 보낸 것이 자꾸 떠오른 탓도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칼라일의 목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왠지 가만히 있었다. 싫다고 피할 줄 알았는데….
“왜 가만히 있어?”
“응? 아, 지워야지. 저택 안이면 몰라도 황궁에서 이런 상태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황궁? 오늘 쉬는 날이라 하지 않았어? 집에서 개인 연구를 한다고….”
그래서 오늘만큼은 중요 업무만 처리하고 함께 있으려고 했는데.
“아까 너 잘 때 편지가 왔어. 7시쯤인가.”
“7시?”
보통 편지나 신문이 배달되는 시각은 9시부터였다. 그렇다면 꽤나 급한 편지라는 것인데….
그럼 아까 보고 있던 게 정말 편지였나. 칼라일은 황궁 문양이 그려져 있는 편지를 건네줬다. 기분이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부른 걸까. 그것도 편지를 보낸 당일에, 급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갑자기 황궁으로 오라 지시하다니. 편지를 눈으로 훑는데 문득 이상한 글귀가 보였다.
“…카렐리아를 데려오라고?”
“잠깐, 뭐?”
칼라일도 그 부분까지는 마저 읽지 못한 것인지 편지 속에 적힌 ‘카렐리아’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카렐리아는 왜? 페르소나와 카렐리아가 만난 것은 내생일 파티 말고는 없지 않나?
“…혹시 마법사 아이 때문인가.”
“페리와 도트를 말하는 거야?”
“응. 그렇다 해도 너무 이상한데. 갑자기 카렐리아를 데려오라고?”
편지를 읽어 내리는 칼라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칼라일에게는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지킨 소중한 동생이자 루치아노를 제외한 유일한 가족이었다. 황제의 명이라 거절하기 힘들면서도 카렐리아를 페르소나의 앞에 데려가는 게 영 탐탁치 않아보였다. 그리고 샤를로테와 마주치게 하는 것도 걱정되는 듯 보였다.
생일 파티 때 카렐리아는 샤를로테를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한 것인지.
안케도니아 제국 1황녀의 이름이 미엘르라는 것은 기억하면서, 샤를로테는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몰라본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모른 척 했나?’
그럴 리가 없지. 아직 어린 아이인 것을.
문득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
황궁에 도착한 뒤 곧바로 이동한 곳은 마력 연구소였다.
페리와 도트, 이제는 황제의 명으로 아벨리와 아네트가 된 두 아이는 연구소에서 마법 교육을 받고 있었다. 아벨리는 방대한 마법 지식이 조금 버거운 듯 보였지만 그에 비해 아네트는 수업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 폐하는 어디에 계시지?”
“아네트와 아벨리의 유학 절차에 대한 결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귀빈실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유학이라. 타국의 마법 아카데미에 보낼 생각인가. 하긴 그가 즉위한 이후 처음 발견한 마법사 아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헤레이스 왕국의 마법 아카데미에 보낼 생각이겠지. 타국에 레이몬드 제국에 드디어 마법사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할 테고.
“아벨리가 힘들어 보이는데.”
아네트와 아벨리의 성과 기록을 받은 칼라일은 단호한 목소리로 아벨리의 마법 성적이 적힌 부분을 검지로 톡톡 쳤다.
“마법 지식은 단순히 외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수업시간을 줄이도록 하세요.”
“하지만 아벨리의 지식 테스트를 한 결과 아네트에 비해 성적이 너무 저조하게 나옵니다. 역시, 고아 출신이라 그런지 영 집중을 못하더군요. 수업시간을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것이….”
“내가 지식 수업을 지시한 이유는 마법 능력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였지, 좋은 성적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저번에도 똑같이 설명한 듯싶은데 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월포드 후작.”
칼라일은 차기 마력연구관 후보로 거론되었던 월포드 후작에게 아벨리의 성적 보고서를 던지듯 안겨주며 굉장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마력연구관은 나입니다.”
“….”
“내가 타국의 마법사라 이러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제 지시에 따라주었으면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칼라일이 저렇게까지 차갑게 구는 것은 처음 본다.
하지만 다른 연구원들은 이 일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칼라일이 저택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가 많이 다른가? 칼라일의 뒷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찰나 아네트와 아벨리의 수업을 끝낸 서던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각하.”
“아, 오랜만이군요, 서던. 아이들의 교사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네, 영광이지요. 제가 황제 폐하의 즉위 이후 탄생한 첫 마법사의 교사가 되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이게 모두 마력연구관님 덕분입니다.”
세실리아에게 서던이 칼라일을 유독 잘 따른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마력 연구소 안에 칼라일을 적대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던데…그래도 이렇게 칼라일의 편이 되어줄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서던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히다가 월포드 후작의 난데없는 고함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덩달아 나도 놀라 다시 칼라일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굉장히 싸늘한 얼굴로 후작을 내려다보는 칼라일이 보였다.
“서던. 저런 일이 자주 있나요?”
“네. 하지만 연구관님께서 오신 뒤로 월포드 후작의 횡포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저게 줄어든 거라고요?”
“네. 월포드 가문이 굉장히 오만하고 보수적인 집안이라는 것은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요. 차기 마력연구관으로 거론되었던 터라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상태였습니다.”
그래, 근데 때마침 플로트 후작이 마력연구관 자리에 올라버렸지. 모두 돈으로 매수해서 된 일이었지만 그 일로 플로트 백작이었던 작위가 후작으로 상승하자 월포드 후작이 꽤나 배 아파했었다.
그 뒤로 내가 바르셀민 가문과 플로트 후작의 갈등을 해결하고, 후작이 마력연구관 자리에서 쫓겨나고 다시 공석이 되었을 때 월포드 후작은 또다시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리라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셀민 백작이 그 자리를 가져간 것도 모자라 공동 마력연구관 자리에 칼라일이 선정되자 무척 분노했다. 가넷 가문에 적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
“하지만 계속 마력연구관 자리에 앉지 못하시고, 그…두 분께서 연인 관계라 공표하시면서 연구관님께서 타국의 마법사라고 밝히셨죠. 아마도 그것 때문에 더 저렇게 구는 것 같습니다.”
월포드 후작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연구원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칼라일과 후작을 보고 있었다.
“타국 마법사 출신이라 잘 모르시나 본데, 아무리 연구관님이라도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곤란합니다.”
버럭 소리 지르던 후작을 마주하던 칼라일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천박한 입 좀 다물어.”
“…뭐, 뭐라고?”
“들었으면서 왜 물어보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제가 이렇게 저급한 말까지 써가면서 후작의 입을 막아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후작.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추합니다.”
그 순간 연구원 중 한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추하다, 월포드 후작이 지칭하는 ‘아랫것들’에게 자주 쓰던 말이었다. 후작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웃으며 돌아선 칼라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서던이 중재를 위해 나서려던 찰나 작게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건?”
씩씩거리며 월포드 후작이 다리를 찬 사람은 다름아닌 카렐리아였다.
일부러 카렐리아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데려오지 않으려 했건만, 카렐리아가 왜 여기에 있지? 마차에 몰래 올라탄 건가? 누가 데려다 준 거야?
“너, 이 말라비틀어진 해초같이 생긴 게 우리 오빠한테 왜 그렇게 나쁜 말 해!”
연구원들 중 몇 명은 카렐리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카렐리아를 보자 ‘아, 쟤가 연구관님 동생?’이라며 서로 속닥였다. 카렐리아가 낮잠 자는 것을 분명 보고 나왔는데, 어떻게 온 걸까. 나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카렐리아를 안아들려고 했다.
“이건 또 뭐야, 어디서 굴러들어온 애야? 저리 안 꺼져?”
하지만 나와 칼라일이 카렐리아를 향해 발검을 뗀 순간, 월포드 후작이 카렐리아를 발로 걷어찼다.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연구소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세게 걷어찬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어린 아이였던 카렐리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카렐리아를 똑바로 본 월포드 후작은 자신이 걷어찬 이가 칼라일을 꼭 닮은 동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붉었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니, 이, 이건….”
“월포드 후작.”
“아, 대공 각하! 이, 이건 제가 차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후작은 다급하게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바닥으로 주저앉은 카렐리아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나를 보며 은빛 눈동자를 글썽이더니 펑펑 울며 곧장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으아아아앙!”
그리고 카렐리아가 나에게 안긴 순간 칼라일이 월포드 후작 바로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대로 후작의 목을 비틀어 쥐었다. 그에게서 희미하고도 새하얀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문제는 그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 것인지, 후작이 그 마력을 보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마, 마력, 연구, 관님….”
“내가 이 일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지 그 입으로 얘기해보라.”
“지, 지금 저한테, 마법을 쓰시려는 겁니까? 어찌 마력연구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민간인에게, 마, 마법을!”
월포드 후작은 칼라일의 위협에 벌벌 떨면서도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칼라일에게 지기 싫었던 것인지 입을 계속 나불대고 있었다.
“내가 이 자에게 마법을 쓰는 것에 불만을 가진 자가 있나?”
“!”
“불만이 있으면 나와 보도록. 내 동생을 걷어차고, 지금껏 나를 모욕한 이 자를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거라. 내 친히 그 의견을 받아들여 자비를 베풀 터이니.”
월포드 후작은 자비라는 말에 황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카렐리아를 걷어찬 그에게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꼴좋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얼마나 횡포를 저질러 댔으면 도와주려는 이가 한 명도 없을까.
“이런.”
피를 떨군 듯 은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아무도 없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