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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94화 (94/170)

#94화, 네 앞에서만 이러는 거야

“내 옆에 있기 싫어?”

“아, 아니야!”

“그럼?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러지 마, 칼라일.”

샤를로테가 또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예상이 간다. 샤를로테와 칼라일이 마주쳤다면 분명 좋은 말이 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대충 짐작이 가고….

칼라일이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 일만 다시 떠올리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칼라일, 고개 좀 들어봐. 나 봐. 응?”

팔로 얼굴을 가린 칼라일은 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의 팔을 밀어내고는 눈가 에 입을 맞췄다.

“나는 괜찮다니까.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죄책감 서린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질끈 감은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어느샌가 울음을 그친 칼라일은 작게 숨을 고르며 금빛 속눈썹을 깜빡였다.

내 앞에서 울고 나니 많이 부끄러운지 입술을 꾹 물었다. 이렇게 울 정도면 어지간히도 속상했나, 뺨을 살짝 쓰다듬으며 이마를 맞댔다. 일부러 칼라일이 있는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었다.

칼라일의 몸이 다시 침대 위로 풀썩하고 쓰러졌다. 얼굴이 붉었다.

그때 손에 묵직한 형체가 만져졌다. 쥐어보니 보석이다. 굉장히 오묘한 빛을 내는 보석이었다. 시트를 들추니 보석 몇 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침대에 보석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보석이 왜 이렇게 많아?

“네가 사온 거야? 이 보석은 다 어디서 났어?”

상당한 값어치를 할 만한 보석들이었다. 떨어진 보석을 모으자 손 한가득 모였다. 종류도 참 다양하다. 칼라일은 붉어진 눈가로 보석들을 바라보다 그 오묘한 빛을 내는 보석을 들어, 내 뺨 근처에 가져다 댔다.

“…안 어울리네.”

“응?”

“너에게 어울릴 줄 알고 사 왔는데.”

누구 보고 어울린다고 하는 것인지.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작게 빛나는 보석들 사이로 뺨에 홍조를 띄운 채 숨을 고르는 칼라일을 내려다보았다. 안아주려고 했던 손이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칼라일은 흠칫거리며 아직 젖어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칼라일은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커튼을 친 탓에 어두웠는데도 그의 얼굴은 잘 보였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그런 표정 짓지 마, 야해.”

“야해…?”

야하다는 말에 칼라일은 살짝 웃어보였다. 야하다는 말에 웃는 거야? 우는 것은 부끄럽고 야하다는 말은 안 부끄럽다 이건가? 어쩐지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나도 칼라일을 따라 미소 지으며 손끝으로 단추를 툭 풀었다.

“로, 로젤리아?”

“응? 왜?”

이미 셔츠 앞부분이 풀어헤친 상태였다. 단추는 세 개나 잠겨 있었나. 나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한 개씩 천천히 단추를 풀었다. 그제야 내가 저번처럼 얼굴을 붉히며 피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아왔다.

“야하다는 말에 웃길래 이런 것도 좋아하는 줄 알았지.”

“….”

“아니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자 칼라일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의 뺨을 감싸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친 칼라일은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웅얼거렸다.

“…아해.”

“응?”

“좋아해, 네가, 나한테, 이런 짓…하는 거….”

심장 부근에 머물던 손이 멈췄다. 손끝으로 무겁게 뛰는 심장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입술을 꾹 문 채 헛숨을 들이마셨다. 나를 올려다보는 칼라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마른 침을 삼키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야하기는.”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칼라일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네 앞에서만 이래.”

“!”

“너라서 그래.”

나를 무릎에 앉힌 채 손가락을 얽었다. 손가락으로 손등을 살살 쓸다가 깍지를 꼈다.

“좋아한다고 말해줘.”

한참을 내 손을 가지고 놀던 칼라일은 손을 지그시 누르며 뒤에서 나를 꼭 안아주었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내가 네 옆에 남아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줘….”

속삭이듯 들린 말에는 그의 간절한 사랑이 묻어나 있었다.

***

칼라일이 걸어둔 저주로 인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페르소나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아파하자 황궁의 의사들을 데려와 샤를로테가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밝혀내려 애썼다. 하지만 병이 아니었다. 병도 아니고, 저주로 인해 말을 하지 못했다.

데려올 거면 마법사를 데려와야 했다. 말을 하지 못해 ‘칼라일이 저주를 걸었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와도 칼라일이 마법을 걸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칼라일이 마법을 걸어? 어떻게, 무슨 연유로? 마력연구관이니 소문도 나겠지. ‘마력연구관이 황후에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저주를 걸었다.’ 이렇게 소문이라도 나면 꽤나 골치 아파졌다.

예전이면 확 터트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문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막 나쁜 건 아니었다.

한동안 화가 난 듯 보이던 페르소나가 대뜸 찾아와 밤새 함께 있어 준다고 말했다. 오늘도 혼자 잠드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페르소나의 품에 안겼다. 페르소나는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를 쓰다듬어줬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나?”

내 한숨을 들은 페르소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펜을 들어 종이에 글자를 적어나갔다.

[ 아닙니다, 폐하. 근심 같은 거 없습니다. ]

“그래, 불편한 게 있다면 바로 말하거라. 말을 하지 못하니 아무래도 불편하지?”

[ 아기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해서 걱정입니다. ]

“최대한 빨리 고쳐보도록 하겠다.”

어떻게 고쳐, 마법 때문에 그런 건데.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페르소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페르소나가 벌써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을까 봐 걱정했다.

칼라일이 저주를 걸었을 때는 막막했지만 오히려 아프니까 페르소나가 나를 더 잘 챙겨주었다. 침실에 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최근에 건국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잦은 실수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다시 페르소나에게 실망을 안겨줄까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나는 다시 펜을 쥐어 종이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 폐하, 혹시 제가 건국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저에게 실망하셨나요? 그런 거라면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페르소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종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황후이니, 제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시종들이 수근거릴 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

“잠깐, 수근 거리다니?”

일부러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페르소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아 등 뒤로 숨겼다.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한 듯한 몸짓을 했다.

“시종들이 수근거린다는 게 무슨 소리오, 황후. 아니, 샤를로테.”

“….”

“샤를로테.”

“….”

“샤를로테!”

건국제 업무만큼 그에게 내가 쓸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좋은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실수로 그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일부러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시 그 기회를 잡아야 했다. 페르소나가 황후의 업무까지 대신한다고 하면 곤란했다.

그의 재촉에도 글을 쓰지 못하다가 깜짝 놀라는 척 배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페르소나는 미안하다며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덜덜 떨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페르소나를 올려다보았다.

[ 저와 가넷 대공의 능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역대 가장 완벽한 황후라고 불리던 대공 각하 아니십니까. 제가 더 노력해야죠. ]

내가 종이를 건네자마자 페르소나는 말없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너는 잘 하고 있다. 가넷 대공은 오래 전부터 혹독하게 황후 교육을 받아온 여자였다. 너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너도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내었어. 그러니까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에…충분해.”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눈물 몇 방울도 떨어트렸다.

분위기가 좋았다. 이대로라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페르소나가 알아서 나와 로젤리아를 비교하는 말을 알아서 잡아줄 것 같았다. 잘된 일이었다.

페르소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내가 연기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네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군.”

“?”

“네 얘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네 가족들은 어땠지? 이리 밝고 아름다우니 분명 사랑받고 자랐겠지. 오래 걸리겠지만, 혹시 다른 가족도 살아있는지 한번 알아 봐주겠다.”

가족이라니. 갑자기? 아, 혹시 결혼식 때 내 부모님 자리가 비어있는 것 때문인 건가. 어떻게든 깎아내려 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도 깎아내리겠지. 페르소나를 보니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쓸쓸해할까 봐 이러는 건가…어차피 황후의 자리만 얻으면 되는데.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다 죽었을 텐데.

“아니면 형제자매라던가.”

“….”

“혹 찾아봐 주었으면 하는 이들이 따로 있느냐?”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 머릿속으로 그동안 억지로 눌러놓았던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숨이 턱 막혔다. 또 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놈 얼굴이 떠올랐다. 루치아노, 왜 자꾸 네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사람이 아닌 오랜 연을 끊고 살았던 네가 떠오르다니.

‘누나, 시종이 내 음식에 바늘을 넣었어.’

‘누나, 나한테 왜 그런 거야?’

‘그냥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나를 성에서 내쫓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싫었어?’

루치아노를 떠올리자 얼굴이 창백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페르소나가 천천히 내 뺨을 쓸었다.

“샤를로테, 안색이 많이 안 좋은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찾긴 뭘 찾아. 찾으면 뭐, 그놈들이 내가 1황녀가 아니라는 걸 말하면? 이미 칼라일과 로젤리아로 불안한 상태인데.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눈으로 다른 황녀와 황자들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나만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펜을 쥔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잊고 살고자 했던 안케도니아의 11황자. 나와 꼭 닮은, 내 쌍둥이 동생.

“루치아노 안케도니아.”

그런데 몇 년간 한 번도 입에 담은 적 없는 이름을 중얼거린 그 순간, 저주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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