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내가 옆에 있어도 될지.
‘쓰러진 너를 보면서 나를 떠올렸어. 샤를로테로 인해 다쳤다고 생각하니까 너를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
예전에 로젤리아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를 다시 기억해보자면 로젤리아가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생각했다. 쓰러진 나에게서 그녀 자신을 보는 것도 모자라 동정과 연민으로 정부라는 거짓말을 하다니. 그것도 그녀는 이혼한 황후였다.
그녀에게 나는 낯선 타지인일 뿐인데도 기꺼이 나를 도와주었다. 동정과 연민으로. 보통 그런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신분과 위치를 생각하자면 더더욱,
그렇기에 처음에는 로젤리아를 이용해 동생을 찾고 샤를로테에게 복수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물론 누구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때는 샤를로테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다.
하지만 로젤리아와 함께 지내면서 그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용한다는 생각을 했던 스스로에게 거부감이 들 정도로 로젤리아는 나에게 잘해주었다. 단순히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원래부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정을 주었을 뿐 받아보지 못한 나 역시도 이용하겠다는 마음은 사라지고 다른 감정이 그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홀로 좋아하기 시작했다.
품은 마음이 점점 커져갈 때쯤 로젤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을 잡아먹듯 퍼져나갔다. 내가 들은 이야기 속 로젤리아는 나쁘고 이기적이었으며 차가웠다. 그나마 로젤리아에 대하여 사실에 가깝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황궁 소속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 안에서조차 로젤리아가 나쁘게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샤를로테를 시기한 로젤리아.
교육을 핑계로 어려운 업무만 주어 샤를로테를 곤란하게 만든 로젤리아.
샤를로테의 잔에 독을 넣은 잔인하고 악독한 로젤리아.
마력연구관이 된 뒤로는 선을 한참 넘은 이야기마저 들었다. 그때마다 조용히 처리한 것이 도대체 몇 번일까.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는 이유는 모두 샤를로테 너 때문이겠지.’
나를 노려보는 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억울해 보였다. 뭐가 억울할까. 억울한 것은 샤를로테가 아니었다. 억울해야 하는 사람은 로젤리아였다. 샤를로테가 아니라, 네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면 돌아가 줬으면 하는데.”
“어차피 저희 둘밖에 없으니 편하게 얘기하는 게 어떠신지요.”
“네 놈과 나눌 대화 따위는 없어.”
“예전과 많이 다르시군요. 이전에는 그 예쁜 눈동자에 담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저에게 돌아와 달라 빌지 않으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샤를로테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그때는 일부러 그러신 거였군요. 하긴, 저도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을 죽이려 한 분께서 미안하다며,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우는 게….”
“!”
“얼마나 가증스럽던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샤를로테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손이 향한 곳은 칼라일의 뺨이었다. 그러나 칼라일은 샤를로테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샤를로테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지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더 물을 것 없이 딱 한 번만, 다시 묻겠습니다.”
“이거 놔!”
“이번에는 또 누구를 없애려 하시는 겁니까?”
또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지를지, 심장이 차갑게 굳어버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하지는 않으시겠죠. 누군가에게 지시할 것을 잘 압니다. 가령 밖에서 폐하를 찾고 있는 저 시녀라든지….”
“너…!”
“증거도 없으니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죠. 설령 증거가 있더라도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손을 들어주실 테니까요.”
그러니 이것은 경고였다. 이 손에 또 누군가의 피를 묻히려 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경고. 칼라일이 손으로 샤를로테의 목을 쓸었다. 그리고 주변을 가득 메우던 샤를로테의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이렇게 하도록 하죠.”
“!”
“제 마지막 자비라고 해두겠습니다.”
샤를로테는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그리고 입을 뻥끗거리며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무슨 짓을 해도 샤를로테의 입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말을 할 때마다 목이 바늘에 찔리는 듯한 통증이 뒤따를 테니까. 나는 샤를로테의 살갗에 닿았던 손을 털어내며 미소 지었다.
“아, 드디어 조용해졌네요.”
내가 황후인 샤를로테에게 하는 짓은 거의 반역과도 가까웠지만 상관은 없었다. 샤를로테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마법을 풀어서 제 목소리를 되찾더라도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말 할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뭐라고 얘기할 건데? 여기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할 수 있겠어?
마력연구관과 황후의 사이에는 말다툼이 있고 목소리를 빼앗아갔다. 왜 빼앗아갔을까? 아무 이유 없이 빼앗아 가지는 않았을 거 아냐. 황실의 마법 연구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 사람이 황후의 목소리를?
게다가 이제 황후의 자리에 오를 것인데 괜히 구설수에 휘말리고 싶지 않겠지. 그 영악하고 똑똑한 머리라면 분명히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시 불리해지는 사람은 샤를로테니까.
손목을 뿌리치듯 놓아주자 샤를로테의 팔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너, 너…윽,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으윽…!”
샤를로테의 손목에도 멍이 들어있었지만 그녀는 손목보다는 말을 할 때마다 따라붙는 통증이 더 고통스러웠다.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값비싸 보이는 팔찌가 걸려있었다. 그 손에는 페르소나와 나눠 끼었다던 반지도 있었다. 가까이 보니 더 잘 알 수 있었다. 거친 피부는 매끈해졌고 피부는 투명해졌다. 온갖 고급스러운 것들로 잔뜩 치장한 샤를로테는 안케도니아 제국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태도와 말투, 나를 노려보는 눈길마저 귀족다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래서인지 더 역겹게 느껴졌다.
“이런 짓? 그럼 예상 못 하셨습니까?”
“….”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누릴 때는 이 정도는 감수하셨어야죠.”
단순히 껍데기만 황후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황후인 척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이라면 더 나았을까. 그래도 황녀여서 그런 것인지 샤를로테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레이몬드 제국의 황후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네가 하고 있는 장식품, 드레스, 구두, 그 반지. 머리에 쓴 붉은 보석이 가득한 왕관까지.
샤를로테 네 것이 아니라 모두 로젤리아의 것이었을 텐데.
왜 그게 모두 네 것인 것처럼 행동하지?
속이 심하게 울렁거리려던 순간 샤를로테는 목을 세게 압박한 채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로젤리, 아를, 이용, 하려고, 했으, 면서, 으윽, 옆에, 있겠, 다고?”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에, 게, 복수하, 기, 위해, 로젤, 리아, 를 이용하려, 한, 주제에….”
샤를로테는 입꼬리를 서늘하게 끌어올리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너나, 나나, 둘, 다, 똑같, 아…!”
***
“칼라일이 돌아왔다고?”
매일 같이 돌아오면 내 집무실부터 오던 칼라일일 웬일로 곧장 침실로 갔다. 나는 결제하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침실로 향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침실로 바로 가는 것은 전부 기분이 좋지 않을 때였다.
왜 기분이 안 좋지? 그의 능력에 진행하던 마력 연구가 잘 안 됐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또 황궁에서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내가 부를 때까지 침실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렴.”
시종들을 물리는데 어쩐지 하녀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무엇을 상상하고 저러는 것인지…. 나는 발걸음을 빨리 해 침실 문 앞에 섰다.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고민하며 노크를 하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칼라일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단추는 다 풀어헤친 상태였다. 역시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칼라일, 괜찮아?”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그를 살짝 뒤로 밀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커튼도 다 쳐져있었다. 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나, 바닥에는 옷가지가 잔뜩 널려 있었다.
“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야. 그런 거 그냥 무시하라니까, 이럴 때만 내 말 안 들어주네.”
그를 침대로 데려가 앉히자마자 칼라일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눕혔다. 덩달아 나도 함께 눕게 되었다. 나는 팔을 바닥에 댄 채 살짝 몸을 일으켜 칼라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허리에 얼굴을 묻은 칼라일은 정말 피곤해 보였다.
“피곤해?”
“응….”
“그럼 잘래? 나중에 올까?”
“아냐, 옆에 있어줘. 자는 것보다 이게 나아.”
그의 바람대로 다시 몸을 눕혔다. 그러자 자꾸만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제보다 더 진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럴 때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있었을까. 약간 몽롱한 기분과 함께 눈이 떠졌다. 잠들었다. 칼라일을 위로해주려다 그만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칼라일의 품에 안겨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는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칼라일을 밀어내려 하던 손이 우뚝 멈췄다.
미워하다니? 누가? 내가? 그런데 목소리에 물기가 뚝뚝 묻어나 있었다.
“널 이용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말 걸, 이렇게 후회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날 이용하겠다는 생각? 아, 칼라일이 샤를로테에게 복수하기 위해 했던 그 생각을 말하는 건가? 그 생각을, 후회한다고? 설마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나? 놀라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칼라일이 몸을 웅크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흐릿한 울음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내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칼라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다 부어있었다. 나는 뺨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칼라일.”
“아, 로, 로젤리아….”
그가 갑자기 그때 일로 울 리가 없었다. 그럼 누군가 이 일을 가지고 안 좋은 말이라도 했나? 누가? 그 일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루치아노, 칼라일뿐인데….
‘칼라일은 널 이용했어. 네가 칼라일을 구해준 순간부터, 지금까지. 네가 본 모습은 모두 가짜야. 칼라일은 다정하지 않아. 널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야.’
…그래,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지. 루치아노가 그 일을 가지고 이상한 말을 할 리 없다. 그렇다면 샤를로테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어서 이렇게 울지? 칼라일이 샤를로테와 만나고 울었던 적은 세실리아의 파티에 있었던 날 빼고는 없었다.
“그때, 내가 너를 이용하려고 했었다던 말, 아직 기억해…?”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았어.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혹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아냐,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칼라일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목 언저리에 뺨을 대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너한테 그런 마음을 품었던 내가 네 옆에 있어도 될지…그런 생각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