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92화 (92/170)

#92화, 이번에는 또 누구를.

릴리가 벌써 두 번째 휴가계를 제출했다. 그 와중에 일을 다 하고 간 것이 대견하면서도 어디 아픈가 걱정되었다.

릴리의 가문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그리고 릴리의 능력을 제대로 피워내기 위해 무역 상단주 자리를 맡겼는데, 내 실수였나. 하지만 일할 때는 정말 즐거워 보였는데.

칼라일은 일찍 황궁으로 갔고, 릴리의 생각에 푹 빠져 일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다른 할 일을 찾았지만 릴리가 대부분을 끝내놓은 터라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로젤리아님.”

“루치아노? 정원에서 뭐 해요?”

산책을 나왔는데 정원 나무 아래 루치아노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매일 같이 지하실에서 잘 나오지 않을뿐더러 오늘도 새벽에 나간 것으로 아는데….

루치아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입술 위에 검지를 갖다 대며 자신의 무릎 위에 덮어진 담요를 가리켰다. 담요를 살짝 내리자 잠든 카렐리아가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자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이는 아이네요.”

분홍빛인 볼을 꾹 누르자 카렐리아는 담요에 얼굴을 묻었다.

“카렐리아가 유독 그대를 잘 따르네요.”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습니다. 카렐리아가 아기 때부터 봤죠.”

칼라일이 17살, 루치아노가 10살 때쯤 만났다고 그랬지…. 자기 친여동생처럼 돌봤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루치아노는 잠든 카렐리아를 담요에 감싸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칼라일이 카렐리아를 볼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방에 카렐리아를 눕히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햇빛을 받은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은빛으로 반짝였다. 굳이 마법을 쓰고 있을 필요 없다니까….

나는 루치아노가 다시 정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쥐었다. 햇빛이 내려앉은 부분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빛나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마법을 푸는 것은 어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변장 마법은 마력 소모가….”

“오래 지속 할수록 많이 들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단둘이 있을 때는 괜찮지 않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칼라일과 단둘이 있을 때도 마법을 풀지 않았다. 루치아노는 은빛으로 변한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검은색으로 물들기라도 하듯, 머리카락에 다시 까맣게 변했다. 햇빛을 받아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마법을 풀지 않는 이유가, 나와 칼라일 때문이에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는,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루치아노가 샤를로테가 닮은 것은 맞았다. 둘은 쌍둥이니까. 그를 보면 샤를로테가 떠오르는 것은 맞았지만…루치아노가 샤를로테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모습을 원래대로 풀고 있어도. 하지만 괜찮다고 말해도 루치아노는 한사코 거부했다.

“그대는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더 잘 어울려요.”

“그리고 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샤를로테죠.”

“그대가 샤를로테를 닮은 것은 맞아요,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여기에는 제 의지도 담겨있기 때문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의지라니? 그 의지가 뭔데? 생각해보니 칼라일도 처음에 마법을 풀라고 몇 번 권유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 뒤로는 한 번도 권유하지 않았지.

“저는 제 얼굴이 싫습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제 얼굴을 감추고 싶습니다.”

얼굴이 싫다고? 왜? 샤를로테를 닮아서?

“저는 샤를로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들으셨을지는 모르지만 샤를로테는 저를 성에서 내쫓게 만든 사람이니까요.”

“칼라일에게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그다지 좋은 얘기가 되지 못합니다. 감정 소모가 심한 기억들뿐이라….”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싫어한다는 얘기는 조금 충격이었다. 샤를로테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와 닮은 자신의 외향마저 싫었다니….

“아예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럼 로젤리아님과 칼라일님의 곁에 조금 당당하게 있을 수 있었을 거예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있지 못한다니?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루치아노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방금 그 말, 혼잣말이었나?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했나? 잠깐, 그럼 평소에 지하실을 나오지 않은 이유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샤를로테와 꼭 닮은 얼굴이라, 칼라일과 내가 그의 얼굴을 보고 샤를로테를 떠올릴까 봐, 그래서 일부러 우리와 식사도 안하고 지하실에만 있었다고? 설마 하는 마음에 두 손을 뻗어 루치아노의 뺨을 감싸고는 내 쪽을 향해 돌렸다.

“!”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손을 밀어냈다. 겁에 질린 보랏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이질감 있게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혹시 칼라일과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나요?”

“….”

“그대의 누나인 샤를로테의 악행입니다. 그대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맞지 않아요. 그대가 잘못한 것은 없어요. 샤를로테의 악행이고 잘못인데, 왜….”

“….”

하지만 내 재촉에도 루치아노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침묵을 선택할 때마다 머리카락은 어둠처럼 좀 더 짙어지고 눈동자는 진한 보랏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아벨리 페리도트, 아네트 페리도트. 그게 너희들의 이름이다.”

페리와 도트가 페르소나에게 이름과 성을 부여받았다. 아벨리와 아네트. 각각 보배와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뜻을 품은 이름이었다. 게다가 자작의 작위를 수여하기 위해 두 아이의 이름을 붙인 ‘페리도트’라는 성을 하사했다.

이 상황이 얼마나 귀하고 명예로운 상황인지 모르는 페리와 도트, 아니. 아벨리와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샤를로테는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입꼬리를 올리는 것도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차가운 얼굴을 보이면 아네트가 겁을 먹어 다가오지 않았다. 페르소나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마법사 아이들이었다. 두 아이 모두에게 신뢰를 얻는 게 중요했다.

“황후 폐하, 저희도 이제 새 이름과 성이 생겼어요!”

“그래, 아벨리. 참으로 예쁜 이름이구나. 아네트, 너도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을 수여받았단다. 이리 오렴.”

그러나 신뢰를 얻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샤를로테가 손짓하자 아네트는 아벨리의 뒤에 숨은 채 겨우 옆으로 다가왔다. 아벨리만큼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이나 다름없었다.

아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이의 마력이 샤를로테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몸속에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낀 샤를로테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아네트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자 샤를로테는 곧바로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마력의 기운에 그렇게 예민한 아이였다. 아벨리의 마력을 조금씩 뺏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상한 점을 느끼겠지. 샤를로테는 끓은 속을 꾹 누르며 아벨리와 아네트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열을 식히기 위해 곧장 황궁 밖으로 나왔다.

“아네트, 아네트! 왜 하필 그 이름을…!”

아무도 없는 정원, 샤를로테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아 후작부인이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 아네트. 아네트 레이몬드!

그건 내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이었단 말이야!

사랑받지 못한 자신과 다르게 아이만큼은 사랑받기를 원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착하게 자라서,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기 바랐다. 자식의 칭찬은 곧 부모의 칭찬이니까.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의 어머니를 내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아네트라는 이름을 그 도트라는 아이가 빼앗아갔다. 샤를로테는 배를 꽈악 감싸 안았다.

어쩐지 황손이 받을 사랑마저 그 애가 빼앗아 간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아벨리의 마력을 빼앗는 데 있어서 아네트가 너무 거슬렸는데…그 애를 어쩌면 좋지?

원래의 계획은 출산 때까지 두 아이의 신뢰를 얻고, 아벨리의 마력을 모두 빼앗을 생각이었다. 아벨리의 마력을 빼앗고 마력연구를 돕는 과정에 사용할 마력을 미리 쌓아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벨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네트가 복병이었다.

‘어떡하지, 아네트 그 애를….’

샤를로테는 한참을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없애야 하나?”

루아 남작부인에게 아이를 없애라는 지시를 내리면, 과연 할 수 있을까? 못 하려나? 샤를로테는 잠시 루아 남작부인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를 죽게 만들어서 그런가, 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저래서는 아네트를 없애라 시켜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없애고 싶어도 황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아이였다. 없애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큰일이었다. 샤를로테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몸에 돌고 있는 마력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이 모였다. 이 정도면 마력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

칼라일이 마법사인 것을 밝혔을 때는 막막했는데…. 샤를로테는 입꼬리로 호선을 그렸다.

“일단은 없애지 말고 놔둬보자.”

“누구를?”

아네트에 대한 것은 잠시 보류하자는 생각을, 날카롭게 가른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하얀 리본으로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남자가 보였다.

“…그대가 여기에 어쩐 일이지?”

칼라일, 왜…여기에 있지? 설마 방금 들었나?

칼라일은 수려하게 웃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다가오는 것조차 몰랐다. 루아 남작부인은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지? 괘씸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루아 남작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이곳은 정원이 아니었다.

“제가 폐하를 위해 몸에 무리가 가는 마법까지 사용했습니다.”

화단 테라스. 장소가 바뀌었다. 샤를로테는 순식간에 마법을 써서 장소를 이동한 칼라일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마법을 썼다는 것을 아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절로 몸이 떨렸다.

“앉으시지요, 샤를로테 황후 폐하.”

“내가 어찌 마력연구관과 자리를 함께 해야 하지?”

“앉지 않으시겠다면 강제적으로 앉혀드릴 수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었다. 칼라일은 은색 의자에 몸을 앉히며 작은 테이블을 하나 두고 샤를로테를 마주했다.

“앉으시죠.. 폐하도, 저도 얘기할 시간은 얼마 많지도 않은데.”

“…나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아아, 별 얘기는 아닙니다.”

별 얘기가 아닌데 장소를 이동하는 마법까지 썼다고? 샤를로테가 말없이 비소를 흘리자 칼라일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확히는 폐하께서 하신 말 때문에 별 얘기가 아니게 되어버렸죠.”

“뭐?”

“없앨 거라니. 누구를 없앨 생각이십니까?”

역시 들었구나. 샤를로테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침착하게 의자에 몸을 앉혔다. 누구를 없앨지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단지 주어가 없는 혼잣말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없애겠다는 암살 모의를 어쩌다 엿듣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없앤다니, 내가? 누구를?”

“그 사람이 누군지는 폐하께서 가장 잘 아시겠죠?”

칼라일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다 천천히 샤를로테의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위협적인 은빛 눈동자가 샤를로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를로테도 고개를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들어 칼라일을 노려보았다. 죄책감 하나 묻어나지 않은 샤를로테의 얼굴에 칼라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폐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군요. 저를 검으로 찔렀을 때와 똑같습니다.”

“….”

“그래서, 이번에는 누군가요?”

“….”

“제 가족을 죽이고, 이번에는 또 누구를 없앨 생각이십니까?”

은빛 눈동자에 핏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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