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피곤한 일에 휘말렸음을.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몸이 무거웠다. 중간에 눈을 떴을 때 칼라일에게 안겨서 저택으로 들어가던 것만 기억났다. 환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잠든 탓에 드레스가 구겨져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허리에 무언가 단단한 게 감겨 있었다. 일어나려고 할수록 계속 몸을 누르고 있었다. 이불을 걷어보니 팔이 보였다. 바로 옆에는 칼라일이 누워있었다. 침실에서 안자고 왜 여기에….
“으음, 로젤리아….”
“내가 깨웠어?”
졸린 눈을 깜빡이던 칼라일은 말없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졸립구나. 그가 다시 잠들 때까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의 뺨을 스친 내 손가락에 축축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피?’
피였다. 그 순간 페르소나가 칼라일을 무차별적으로 때렸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칼라일이 깜짝 놀라서 몸을 반쯤 일으키자 그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멍이 더 심해졌어, 심지어 몇 개의 상처는 벌어져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아야.”
입가의 상처가 벌어졌는지 칼라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처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내가 갑자기 왜 벌떡 일어났는지 이해한 칼라일은 잠시 내 눈치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소곳하게 앉아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칼라일은 분명 자기가 먼저 시작했다고 말했어. 뭘 시작한 거지? 페르소나는 웬만한 것으로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먼저 때렸을 리도 없고….
“어쩌다가 싸운 거야?”
“….”
“뭘 어떻게 말했길래, 얼굴이 이렇게 되는 건데?”
“….”
“말 안 하면 나 당장 황궁에 갈 거야. 밖에 아무도 없나? 황궁으로 갈 준비를…!”
당장 황궁으로 간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칼라일은 다급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별말 안 했어. 그냥, 네가 이렇게 해봤자 로젤리아가 돌아갈 리 없다고 그렇게 말했어….”
“정말 그렇게만 말했어?”
“…그렇게 로젤리아를 옆에 두고 싶으면 가서 빌어보라고도 했어.”
“….”
“혹시 알아? 정부로 받아줄지도 모르잖아, 라고 한 순간 맞았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나 싶었다.
그대로 칼라일의 머리를 잡고 이마를 맞댔다. 어깨가 절로 떨렸다. 웃으면 안 되는 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굳히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화낼 거라고 말해야 했는데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제 그렇게 울어서 그런가, 그나마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나는 그대로 칼라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그렇게 말했어?”
“으응…아프긴 하프더라. 나름 각오하고 맞은 건데….”
내가 웃는 것을 보자 한결 마음이 놓였는지 그제야 아프다며 나의 뺨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그의 상처 부분에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대었다. 손이 닿은 상처에 나의 마력이 전달되면서 조금씩 아물고 있음이 느껴졌다. 꽤나 집중해서 칼라일의 얼굴을 치료하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눈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칼라일?”
입 맞추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카, 칼라일, 잠깐만…!”
예전처럼 가볍게 입만 맞추는 줄 알았는데 몸을 살짝 뒤로 젖히자 칼라일은 내 손목을 지그시 누른 채 입술을 살짝 핥았다. 입술 사이로 틈이 벌어지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어제 제대로 못 했잖아.”
“!”
“하면 안 돼? 화낼 거야?”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칼라일의 얼굴에는 열기가 서려있었다. 뺨을 스치는 긴 머리카락 때문에 간지러운 건지, 아니면 그저 기분이 간질간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던 칼라일은 이내 내 붉은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췄다.
“오늘따라 더 예뻐, 로젤리아.”
그의 입술이 목 쪽에 머물렀다. 흐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통증이라기보다는 살짝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몸을 움츠린 채 그의 어깨를 움켜쥐자 통증이 멈췄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해가 떠오른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일어나시는 거에…요….”
내 환복을 도우러 온 클로이와 릴리는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칼라일을 보자 입을 막았다. 릴리는 빠르게 손을 들어 어린 클로이의 눈을 가렸다.
“…생각해보니 안 일어날 수도 있네. 그치, 클로이?”
“마, 맞아요, 아침 늦게까지 주무실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그럼 우리 나중에 올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대로 둘은 아무것도 못 봤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문을 안쪽에서 잠글 수 있는 기능을 넣어야겠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면 이제는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고 말해놓을까?”
나와 달리 한없이 태평한 말에 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
“둘이 정말 사이가 좋은 것 같아요, 저희 언니는 형부를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매일 같이 싸우는데 말이죠.”
“….”
“릴리님? 릴리님!”
“…아, 방금 뭐라고 그랬니? 형부가 죽었다고?”
“아뇨, 멀쩡히 살아계셔요.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열이라도 있으세요?”
몸이 아프지는 않은데, 릴리는 작게 중얼거리며 로젤리아에게 주려고 했던 서류들을 품에 꼭 안았다. 정확히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전부 로젤리아의 생일 파티에서 들은 소문 때문이었다.
상단주 일 때문에 바빠서 사교 파티에도 가지 못한 릴리는 대부분의 소식을 한꺼번에 전해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때 로웬이 다른 영애에게 푹 빠져 새벽마다 만나러 간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로웬님이 말씀이신가요? 그 로웬 기사단장 말씀하신 거 맞나요?’
‘네, 그 로웬님이 누구를 좋아하는 경우는 희귀하죠. 그렇게 많은 구혼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시지 않던 그 기사단장께서 사랑이라니!’
‘세상에나, 어쩜…얼마나 열렬히 사랑하시면 새벽마다 나가시는 거죠? 어느 가문의 여식이래요?’
‘그걸 아무도 모른대요. 여식의 얼굴을 로브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서는 마차에 태우더랍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다는 것일까요?’
얼굴도, 가문도 모르는 여식과 사랑에 빠진 로웬 가넷.
릴리는 로젤리아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기대고는 서류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의도치 않게 로웬에게 청혼을 한 날, 너무 부끄러워 일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만약 청혼하는 그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았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청소하려고 갔을 때 로웬의 옷매무새는 다 흐트러진 채, 가슴팍을 훤히 열어 놓은 상태에서 잠들어 있었고 놀라서 단추라도 잠가주려 했더니 하필 그때 깨질 않나. 때마침 떠오른 언니의 말 때문에 이상한 청혼을 하게 되질 않나!
‘아직 제대로 된 고백도 못 받았는데, 청혼? 그것도 그렇게 이상한 청혼이라니…,’
도저히 로웬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정말로 열심히 피해 다녔다. 그에게 약간…조금의 이성적인 감정을 품은 상태였으니까. 적어도 마음을 조금 다 잡은 상태에서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다른 여식과 사랑에 빠지다니.
아무리 내 청혼이 이상하고 뜬금없었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바로 소문이 나지?
설마 내 청혼이 싫은데 차마 거절의 말은 할 수 없어서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니 떨어져라’라고 돌려 말하는 것인가?
차라리 그냥 거절하지 뭘 그렇게까지….
억울했다. 차라리 이렇게 될 거라면, 제대로 고백이나 해볼 걸 굳이 좋아하지 않은 척 왜 그랬을까.
릴리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입술을 꾹 물었다. 슬펐다.
하지만 이렇게 슬픈 상태로 시간을 계속 보낼 수는 없었다. 그 소문 때문에 오늘 실수한 것만 몇 개였는지! 정신 차려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찝찝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담판을 짓자, 지금 당장!
릴리는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집무실로 들어오기 전 로웬이 새벽에 타고 나간 마차가 대공저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릴리는 다른 시종들과 시녀들이 부르는 것을 무시하고는 곧장 마차로 갔다.
그리고 마차 문을 연 순간,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눈을 떠 보거라, 아니 찡그리지 말고….”
진지한 얼굴로 상대방의 뺨에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대고 있는 로웬과….
“저는 괜찮으니 이 손을 좀 치워주시죠.”
루치아노?
그가 왜 여기에? 왜 마차에 함께 타고 있지? 분명 이 마차는 새벽에 타고 나간 그 마차가 아닌가? 아니, 잠깐. 그럼 새벽에 나가서 지금껏 함께 있었다는 거야? 어라?
로웬과 눈이 마주쳤다. 덩달아 눈물을 글썽이며 보랏빛 눈동자를 깜빡거리고 있는 루치아노와도. 머릿속에 로웬과 관한 소문이 폭탄처럼 떨어졌다. 설마, 설마!
‘나, 남색…?’
***
“정말로 마법사 아이였습니까?”
“그래, 정말로 마법사였다. 칼라일이 발견해서 데려왔더군. 지금 그 아이들은 이 제국의 보배나 다름없어. 황제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함께 식사를 하고 놀아주기도 하더군, 내 바로 아래 기사들이 그 애들의 호위기사가 되었다면 말 다한 거지.”
마력연구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여러 가지 질문을 받던 아이들은 이제 곧 새 이름과 성, 그리고 작위를 수여받기로 결정이 났다. 이제 겨우 5살 남짓, 못해도 자작이었다.
게다가 이를 공표하고 나면 대대적으로 마법사를 찾기 위한 새 계획안이 시행될 것이다. 제국의 기사단장인 그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번영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맞았지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페르소나의 곁에서 굉장히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던 샤를로테.
“아무래도 마법사 아이가 있다면, 샤를로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
“네, 아마 그렇겠죠. 칼라일님께서 샤를로테가 마법사라고 밝힌 이상, 그녀에 대한 기대는 더 높아지겠지. 추락하는 것 또한 쉽고요.”
“하지만 웃고 있었다. 왜 웃고 있었지? 아니지, 웃고 있었던 게 아니야, 무척 기묘한 표정이었어. 울면서 웃고 있는….”
“제가 더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쪽도 되도록 샤를로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아!”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린 것인지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루치아노는 때마침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것인지 눈가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마차의 흔들림으로 인해 그대로 자신의 손가락으로 스스로 눈을 찔렀다.
“마법 이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군. 고개 들어봐.”
“시끄럽습니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이게 내 탓은 아니지 않나?”
눈이 빨개져서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눈에 상처 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눈가가 붉었다. 로웬은 루치아노의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살짝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마차 안에서 단둘이 이런 짓 하고 싶지 않습니다, 놔주시죠.”
“눈물 줄줄 흘려대면서 말은 잘하는군.”
뺨을 너무 세게 쥐었나. 살짝 힘을 뺀 채 먼지가 빠졌나 살폈다.
“눈을 떠 보거라. 아니, 찡그리지 말고….”
“저는 괜찮으니 이 손 좀 치워주시죠.”
그런데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마차 문을 연 사람은 릴리였다.
그 순간 로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루치아노는 창백해진 로웬과 충격 받은 듯한 릴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감이 피곤한 일에 휘말렸음을 알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