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되돌릴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칼라일의 멱살을 꽉 움켜쥔 채 벽으로 몰아붙였다. 큰 소리가 나면서 벽에 부딪혔지만 칼라일은 멀쩡해보였다. 오히려 이제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을 넘어도 적당히 넘었어야지. 지금 감히 누구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선? 폐하께도 선이라는 것이 존재했습니까?”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 내가 황제라는 것을 망각했나?”
황제라…비소를 흘리며 칼라일은 내 손목을 움켜쥔 채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살갗 위로 달은 그의 숨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억지로 분노를 참으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황제라서 로젤리아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뭐라고?”
“황제라면 더 잘 했어야 했습니다. 왜 샤를로테를 정부로 들였습니까? 어째서 그녀를 그렇게 방치하셨습니까? 그래놓고 이제 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칼라일의 은빛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그러지?”
“뭘 아냐고요? 적어도 폐하보다 더 훨씬, 많은 것을 알지 않을까요?”
“아니, 너는 로젤리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 그렇습니까? 뭐,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가볍게 터트린 웃음에 칼라일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이제 조금씩 알아 가면 되니까요. 폐하와 달리 앞으로의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았거든요.”
적의가 선명한 그의 눈동자가 점점 붉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라일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변하는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칼라일을 볼 때마다 로젤리아를 그에게서 떨어트리고 싶었다.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을 보면 그 팔을 부러트리고 싶었고, 온갖 죄를 붙여 감옥에 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로젤리아는 칼라일의 곁에 있었다. 답답했다. 싫었다. 로젤리아의 곁에 이런 놈이 있다는 게.
그럼에도 억지로 참아왔던 깊고 어두운 감정들이 천천히 몸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로젤리아를 버렸다거나 샤를로테를 정부로 들였다는 말을 적어도 이놈에게는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다 못해 분노로 인해 녹아내리는 듯했다.
겨우 이성을 다 잡았을 때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꽉 쥔 주먹이 칼라일의 뺨을 내려친 후였다.
바닥에 흩뿌려지듯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터진 입술, 붉게 충혈 된 눈을 보자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로젤리아의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을 다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칼라일은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멍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샹들리에를 떨어트린 것만으로는 부족하셨습니까?”
“…닥쳐.”
“이렇게 때리고 싶은 것을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폐하?”
“그 입 닥치라고!”
로젤리아, 네 옆에는 이 자가 아닌 내가 있어야 했다. 내가 너의 남편이고 반려인데, 왜.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너를 품어도 아이가 없었고, 네 온기가 간절하게 필요할 때 너는 나를 매몰차게 대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너와 같은 완벽한 황제였고, 제국민이 내게 거는 기대가 무척 컸으니까. 하지만 나는 네 조언보다는 네가 더 필요했다.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너와 나는, 그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완벽한 황제와 황후로서 몇 년간 함께 지내왔다.
그렇기에 너를 좋아하던 마음도 당연히 식었으리라 착각했고, 샤를로테가 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란 애정을 샤를로테가 채워 주리라 생각하고 그녀를 아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내 착각이었다. 아주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단순히 너의 변심이라 생각했던 나는 이제야 드디어 내 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샤를로테가 아니라 로젤리아를 사랑했다. 돌아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샤를로테를 곁에 두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 그때는 몰랐지? 알지 못했지? 왜 그때는, 왜 이제 와서, 나는….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 로젤리아를, 함께 제국을 이끌어나갈 동료를, 내 아내를, 그녀의 뱃속에 있었던 아이 마저.
일찍 깨달았더라면,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하십니까?”
칼라일의 목소리가 그런 내 상념을 날카롭게 갈랐다. 주먹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칼라일은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저 미소를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다.
“후회하신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조용히 해, 제발…!”
“부정하지 마세요, 폐하. 후회하고 계시잖습니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애써 부정해오며 인정하기 싫었던 것들이 점점 사실이 되어가는 듯했다. 다시 주먹을 든 순간, 칼라일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모습.
“가서 로젤리아에게 사랑한다, 다시 속삭여보십시오. 혹시 압니까?”
내가 샤를로테를 정부로 들였을 때, 로젤리아가 이런 표정을 지었었다.
“폐하를 정부로라도 받아주실지.”
점점 눈앞이 까마득해지기 시작했다.
***
아무리 기다려도 칼라일이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정원에서 빠져나와 칼라일을 찾기 위해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슬슬 파티가 끝나가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이미 돌아갔고, 카렐리아도 놀다가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샤를로테의 비명에 발걸음이 멈췄다.
“세상에, 폐하. 어째서 손이…!”
멀리서 보고 있는 것임에도 페르소나의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손이 선명하게 보였다. 살갗이 다 까져서 피가 맺혀있었다. 무엇을 하면 저렇게까지 손이 다칠까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기분 나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문득, 칼라일이 사라졌을 때 페르소나도 보이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게다가 칼라일은 페르소나에게 목걸이를 전해준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
페르소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호위를 데리고 가버렸다. 불안한 마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구두가 벗겨지려 했지만 상관없었다.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치마 밑이 바닥에 쓸려 더러워진 순간 얼굴에 상처를 가득 매단 칼라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칼라일!”
“로젤리아…왜 여기에 있어, 기다리라고 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짐작이 맞았다. 함부로 힘을 쓰지 않는 그가 손이 그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은 의도치 않게 다쳤거나 싸웠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칼라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뺨에 가득한 멍과 터져서 피가 흐르는 입술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찢어진 이마 주변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에 비해 페르소나의 얼굴은 멀쩡했다. 그럼 일방적으로 맞았나? 마법으로 막을 수도 있었잖아!
“페르소나가 이렇게 만들었어?”
“로젤리아.”
“정식적으로 항의할 거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려? 왜 싸운 건데?”
“나는 괜찮아. 아프지 않으니까 일단 진정해. 응?”
“뭐가 괜찮다는 거야? 너는 가만히 있었어? 왜?”
말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차올랐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렀다. 칼라일의 얼굴을 마주하려고 해도 심장이 너무 아파서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내가 우는 것을 보고 당황한 칼라일이 급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포근한 품에 안기자 참았던 눈물이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내가 미안해, 울지 마. 로젤리아, 로젤리아? 나 진짜 안 아파, 치료하면 되는 거니까….”
아프지 않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더 세게 그를 끌어안으며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더듬었다. 멍과 상처가 너무 심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싸운 거지?
이유를 묻고 싶어도 너무 속상한 탓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시작한 거야. 내가 먼저 그랬어.”
알고 있다. 먼저 시작한 거. 그가 목걸이를 가져다준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한 일이었다. 단순히 목걸이를 돌려주고 올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칼라일이 무슨 말을 했든, 나에게 최소한의 죄책감이 있었다면 이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리 함부로 대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잠시 잠깐 페르소나에게 미약하게나마 동정을 했던 내가 싫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칼라일은 그저 나를 마주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인데.
“…아까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뭐?”
아까라면, 페르소나와 대화했을 때? 그가 나를 향해 사랑한다고 했을 때?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한 거였구나.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들어 올린 칼라일은 굉장히 슬픈 눈빛으로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깨물어서 상처가 난 입술을 매만졌다. 아프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속상하면서 미웠다.
그를 목을 끌어안고는 칼라일이 했던 것처럼 눈가에 입을 맞췄다. 상처가 난 곳에, 뺨에 생긴 멍 위에. 내 허리를 안고 있던 칼라일은 그대로 나를 안아 들어서 창가 쪽에 나를 앉혔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상처도 더 잘 보였다.
“괜찮아?”
“너는?”
“…안 괜찮아.”
페르소나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 말에 비참했고,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칼라일을 이렇게 다치게 한 것에 죽을 만큼 아팠다.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말만 해, 뭐든 들어줄게.”
나는 심장 쪽을 꾹 누르다 그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안아줘.”
내 말에 칼라일은 곧바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해줄 수 있어?”
눈을 감자 온 신경이 깨어나는 듯했다. 내 팔을 쓸고 허리 쪽을 더듬는 손길에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칼라일은 입을 맞추다가 입술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 그대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를 수줍게 밀어내자 아주 잠깐 입술을 떼고는 다시 천천히 내 입으로 다가왔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각이 너무 선명했다.
그는 내 손바닥을 꼭 잡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로젤리아.”
단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몸이 절로 떨렸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칼라일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창문 위에 손을 갖다 대었다. 몸이 뒤로 밀리면서 차갑고 딱딱한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올지도 몰라.”
“….”
“로젤리아”.
내 이름을 갈증이라도 난 것 마냥 여러 번 부르던 칼라일은 이내 뜨거운 숨과 함께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그만할까”라고 물으면서도 그는 나를 놓치기 싫다는 듯 끌어안으며 나를 품고 싶은 욕심을 눈 안에 담아내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이마에 소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간신히 내뱉은 그 한마디에 칼라일은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사랑해.”
그는 나지막하게 말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에 수많은 말들이 가슴 안쪽을 채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저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칼라일의 작은 목소리가 큰 함성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