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사랑했습니다.
“너와 내가 하나가 아니라고?”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라, 레이몬드 제국에서는 황제와 황후는 하나가 맞지만 나와 페르소나는 단지 형식적으로 엮인 하나일 뿐이었다. 우리 둘이 하나라고? 그럴 리가. 샤를로테가 황궁으로 온 이후, 한 번도 페르소나와 하나인 적이 없었다.
“폐하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폐하와 하나였던 적이 없습니다.”
“하나가 아니었다고? 지금껏 그렇게 생각했나?”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제가 사랑한다고 하기를 바랐나요?”
황후가 아니다. 그 말에 페르소나는 얼굴을 더 일그러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럼 하나였다고, 언제나 하나였다고 대답해주기를 원했나?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너는 나와 하나라고 생각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그럼 무슨 낯짝으로 샤를로테를 데려온 거야?
“황제와 황후가 하나라면, 폐하는 샤를로테 황후 폐하와 하나인 겁니다.”
“나는….”
“샤를로테를 데려온 건 폐하십니다. 황후이자 부인이었던 제가 아니라 샤를로테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신 것도 폐하십니다. 이제 왜 저를 다시 사랑한다 하신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한숨을 내쉬자 페르소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던 것처럼, 그가 샤를로테를 정부로 들이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나처럼.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파티홀로 돌아가야 했다.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뜨려던 순간 페르소나가 내 손을 천천히 잡아왔다. 에메랄드 같은 초록빛 눈동자가 여전히 상처받은 채 떨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더니 천천히 한 글자씩 곱씹듯 내뱉었다.
“사랑해.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끝까지….
“너는, 나를 사랑한 적 있어?”
한참을 망설인 그와 달리 내 입은 망설임 없이 열렸다.
“사랑했습니다.”
사랑했지만 더 이상 감흥은 없었다. 그에게 미련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나는 이미 많이 울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가에 열기가 서렸다.
입술을 꾹 문 채 그의 손을 쳐냈다. 목 안쪽이 너무 뜨거웠다.
“폐하께서 그러셨죠. 저보고, 괴로웠냐고.”
“….”
“모든 게 다 괴로웠습니다. 죽도록 괴로웠습니다.”
결혼식 날 내게 보여줬던 표정을 샤를로테에게 보여준 것, 내 뺨을 쓸던 손으로 샤를로테의 손을 잡던 것. 소문이 돌았음에도 방관하던 것. 빛도 보지 못한 채 죽어버린 아기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 그리고 가장 괴로웠던 것은….
“평생 내 사람일 거라 생각했던 인물이 돌아설 줄은 몰랐거든요.”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손끝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잘그락, 거리며 떨어졌다. 목걸이가 떨어진 것도 모를 정도로 그는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 통쾌 할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있었군.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페르소나가 정원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의 발소리가 귀에서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비틀거리며 분수대에 기대앉았다. 떨어진 목걸이를 천천히 주워들었다. 이 목걸이를 왜 가지고 있었을지, 추억 감상이라도 하고 있었나.
그때 수풀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함께 칼라일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칼라일.”
“…방금 나간 사람, 페르소나야?”
“아, 응…어쩌다 보니 같이 있었네.”
페르소나의 얘기가 나오자 칼라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목걸이는….”
“페르소나가 가지고 있었어. 소매 안쪽에서 떨어진 건데, 돌려줘야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차라리 끊어버리고 싶었다. 끊어내고 산산조각내고 싶은 마음에 목걸이 줄을 두 손으로 잡고 당겼다. 요란한 소리가 귓가 울리고 줄이 살갗을 파고들던 그때 칼라일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다치겠다, 그러지 마.”
그의 손을 들어 뺨에 갖다 대자 시원한 감촉이 온몸으로 퍼졌다.
“둘이 무슨 얘기했어? 또 뭐라고 그랬어? 왜 찾아온 거야?”
“걱정하는 거야, 질투하는 거야?”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는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사실 질투하는 쪽에 더 가까워.”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혔다. 손과 손이 맞닿은 부분이 간지러웠다. 가만히 칼라일을 올려다보자, 그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손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얽혀왔다. 단지 손을 잡았을 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를 홱 째려보자 칼라일은 얄궂게 웃으며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목걸이, 내가 돌려줄게.”
목걸이를?
“이걸로 또 무슨 명분을 만들어서 만나려 할지 모르니까. 내가 가서 전해줄게.”
“괜찮겠어?”
“응, 괜찮아. 갔다 올게, 여기 있어.”
그의 말대로 명분을 만들어서 만나고자 할지도 모른다. 페르소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의 성격에 매몰차게 대하더라도 포기할리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업무 때문이 아니라면 페르소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에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목걸이가 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예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페르소나가 선물한 목걸이여서 그럴까.
미련 없이 칼라일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목걸이의 붉은 빛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
복도를 걷던 페르소나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아팠다. 사랑했다고 말하는 로젤리아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그 서늘한 목소리가 심장을 도려낸 것만 같았다.
로젤리아가 쓰던 침실과 방. 물건을 정리하지도, 치우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했을 당시에만 해도, 금방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탓에 샤를로테에게 서궁을 내어주었다. 시종들을 시켜 매일 청결한 침실을 유지하도록 명령했었다. 칼라일과 연인관계라는 것을 밝혔을 때도….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복도의 기둥에 몸을 기댔다. 흐릿한 장미향이 느껴졌다.
‘황태자 전하, 그거 아세요? 황후와 황제는 하나래요.’
‘그럼 아버님과 어머님은 평생 한사람이겠구나.’
‘저희도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응, 우리도 하나가 될 거야.’
페르소나는 과거, 아직 황태자비였던 로젤리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하나가 될 거라면서 손을 잡고 황실 정원에서 잠들었었다.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는 하나가 되겠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나라고 생각한 적 없다고?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야말로 하나라고 했으면서 샤를로테를 데려오기는 했으니까. 로젤리아의 입장에서는 하나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샤를로테를 데려온 이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면, 괜찮아.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사랑한 적 있어?’
‘사랑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로젤리아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나를 사랑한 적은 있냐고.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사랑했다. 그러나 불안함은 더 커져갔다. 정말로 그런 걸까. 내가 황제라서, 그녀가 황후였기에 사랑한 걸까. 로젤리아는 황후로서의 위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여자였다. 나를, 페르소나 레이몬드라는 사람으로 사랑한 게 맞을까.
사랑했다는 말에, 그 순간 마주친 붉은 눈동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같은 표정으로 하나라고 생각한 적 없다던 그 말.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무서웠다.
왜 무서웠지, 뭐가 무서웠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냐. 그런 게 아니야.
나와 사랑했던 순간마저 부정해 버릴까 봐.
사랑하는데, 너무 늦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이 순간이….
만약 내가 샤를로테를 내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로젤리아를 돌아보았다면, 샤를로테가 아닌 로젤리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더라면,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황궁 무도회장에서 파티가 열렸겠지. 그리고 무대에서 춤을 췄을 거야. 내가 선물했던 목걸이와 귀걸이를 차고, 칼라일과 아닌 나와 맞춰 입은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나와 눈을 맞추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텐데. 그리고, 그리고….
‘폐하, 폐하를 닮은 아이입니다.’
로젤리아가 품었던 아이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몸이 안 좋으신가봅니다, 페하.”
페르소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저자가 왜 여기에 있지? 그의 시선은 곧 칼라일의 손에 들린 목걸이로 향했다.
그 목걸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페르소나는 자신의 소매 안쪽을 뒤지다 빠르게 손을 뻗어 목걸이를 낚아채갔다.
“이 목걸이, 어디서 난 것이냐.”
“아까 대공 각하와 만나셨지요. 각하께서 폐하가 목걸이를 떨어트리고 갔다고 합니다.”
“….”
“그래서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다고 하고, 가져왔습니다.”
페르소나의 이마 위로 핏줄이 돋아났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황제는 황제구나. 칼라일은 무표정하게 페르소나를 응시했다. 페르소나는 칼라일을 싫어했다. 칼라일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소나가 지금 짓는 표정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런 기색조차 내비치기 싫다는 거겠지.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이만 돌아가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도록.”
“어찌 신경을 안 씁니까, 황궁으로 돌아가 궁의에게 얼굴을 비추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자꾸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려 하는 것 같은데.”
페르소나가 겨우 유지하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같은데, 가 아니었다. 칼라일은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그 말 속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로젤리아와 함께 있었다는 것 때문에 이러나? 페르소나는 목걸이를 꽉 움켜쥔 채 작게 비소를 흘렸다.
“그럴 리가요. 저는 폐하를 내보내고 싶었다면 이렇게 마주 서서 담소를 나눌 리 없게죠. 몸이 괜찮으시다면 다시 파티홀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거기서 아주 재밌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칼라일은 페르소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차갑게 속삭였다.
“아내가 아이를 잃었는데 남편은 그걸 몰랐다고 하는군요. 자신의 불륜 상대와 놀러 다니느라 말이죠.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해댔으면서 말이죠.”
“…!”
“그래놓고 나중에 후회를 하죠, 정말 비굴할 정도로 매달리는 게 참으로 뻔뻔합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도 하더군요. 정말 멍청한 사내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떠나간 아내가 돌아올 거라 생각하는 걸까요?”
칼라일이 말한 ‘그 남자’는 페르소나를 지칭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도 한 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조롱하는 어투였다.
“지금 나를 모욕하려 드는 건가?”
“세상에 모욕이라니요, 폐하.”
칼라일은 느릿하게 눈으로 페르소나를 훑어 내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건 모욕이 아니라 사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