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더는 듣고 싶지 않아
페르소나를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사랑했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진 반려, 그게 바로 페르소나였으니까.
그러나 처음에는 싫었다, 황태자비 교육과 황후 교육을 거치면서 나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황후가 되기 싫었다. 제국을 다스리기 싫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16살, 처음으로 페르소나를 마주했을 때,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그를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울었다. 눈물을 퐁퐁 흘리면서 울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 번도 운 적 없던 내가 우니까 꽤나 당황을 했고, 선대 황제는 나에게 의젓하다는 말을 건네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나는 12년간 배워온 예법을 모두 어기고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황궁 정원으로 도망쳤다. 시종들을 떠올리고 연못 근처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아무래도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았던 탓에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소리 없이 울던 찰나, 기어코 페르소나가 나를 찾아냈다.
페르소나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가까이 오지마세요.”
그럼에도 가까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그를 밀쳤고, 나뭇가지에 이마가 긁혔다. 긁힌 상처가 붉어졌지만 페르소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울고 있는 나를 끌어안았다. 결혼하기 싫어서 한 행동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후 내가 진정하자 페르소나는 내 눈치를 보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작은 초콜릿을 꺼내 쥐어주었다.
“저와 결혼하기 싫은가요?”
그가 조심스레 물은 말. 결혼이 싫은지 만약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당차게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뒤이어 한 말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와 결혼하기 싫다면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레이몬드 황실과 가넷 가문의 조약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모를까 그것을 거절하니 마니, 나에게 그런 권한은 없었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화와 저는, 가넷 가문과 황실의 중요한 관계로 오래 전 약조로 이어진 몸이고, 하기 싫다고 한들 결국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 입으로 말하고 나니 더 울적해졌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더 둥글게 말았다. 페르소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나와 똑같이 몸을 웅크리다 내 쪽으로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제 무릎에 뺨을 기댔다.
“그쪽이 원하면 제가 하기 싫다고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하기 싫다고,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른 가문의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도록 해보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페르소나는 말갛게 웃으며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태어날 때부터 반려가 정해진 몸이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페르소나는 뺨 위로 홍조를 띄우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면, 안될까요?”
“….”
“지금은 황태자가 황태자비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반려로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행복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평생 사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가 없었다면 나는 불행한 결혼을 했다며 힘들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디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겠다는 말에 그를 받아들였고, 페르소나에 대한 마음을 키워갔다. 한쪽이 우울해하면 다른 한쪽이 보듬어주었고, 사랑했고, 아껴주었다. 그러니 페르소나와 결혼을 할 때 나는 그를 많이, 굉장히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가장 행복한 신부였고, 그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신랑이었다.
황제 즉위 이후, 페르소나는 정말로 바빴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바쁜 황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에 잠들었다. 그가 하는 업무에 비하면 내 업무는 정말 적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합방 일에도 그는 피곤해했고, 몇 번은 나를 품지 않고 그대로 잠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곧 괜찮아지겠지. 조금만 기다리자며 황후로서의 본분을 다했고 그가 무너질 때마다 확실히 잡아주려 노력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나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샤를로테가 정부가 되었을 때도 그 기억 하나만 믿고 계속 버텨왔다. 나를 사랑하겠다고 했으니까,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고 헤집어져도 믿고 기다렸다.
사랑한다는 말, 내가 바랐던 말이었는데.
“폐하께서 저를 사랑한다고요? 하, 폐하께서, 저를?”
지금에 와서 하는 이유가 뭐야, 왜 가장 행복할 때, 하필 지금?
“그래, 사랑해.”
“….”
“너무 사랑해, 정말이다.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아직 너를 사랑해….”
이제 와 사랑한다고?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전에는 간절히 바랐던 말이 이제는 괴롭게만 들려왔다. 그 말을 예전에 해줬어야지. 나를 사랑한다고, 그 전에 말해줬어야지. 계속 기다렸지만 해주지 않았던 말을 왜 지금 와서 하는 거야?
“그만하세요.”
“….”
“제발 그만하세요,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한 두 걸음 떨어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페르소나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끌어안고 싶어 했지만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닿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사랑한다고 하는 그와는 절대.
그때 그의 소매 안쪽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아까 분수대에 앉아서 만지고 있던 그 목걸이였다. 다이아몬드와 가넷으로 꾸며진 목걸이는 그가 결혼식 때 나에게 선물해준 바로 그 목걸이였다. 그리고 황궁에서 나올 때 두고 왔던 것 중 하나였다.
“폐하께서 이제 와 저를 사랑하신다고 한들, 제가 기뻐할 줄 알았습니까.”
“….”
“모두에게 축복받는 이 날에, 그런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적어도 폐하께서는 그러시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소나의 눈동자가 황망함으로 인해 크게 일렁였다.
너는 샤를로테를 내 생일에 데려왔고, 내가 모두의 비웃음거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날은 나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날이었다. 네가 그 사실을 알까, 아니. 모르겠지.
“폐하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저도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어찌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고아원에서 그가 하려 했던 말은 분명히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미 결혼 사실을 공표한 마당에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그는 곧 있으면 결혼식 예복을 차려입고 모두에게 축복을 받으며 재혼을 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의 마음을 다시 받아들인다 치자, 그럼 나는? 결혼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라 이건가? 샤를로테가 낳을 아기는 어떡할 거지? 그의 성격에 아기를 쫓아낼 수도 없을 텐데. 그러면 나는 샤를로테 아이를 키워야 하나? 내 아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네가 원한다면 결혼식을 취소하겠다.”
페르소나는 내 손을 꽉 붙든 채 간절하게 외쳤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무엇을 원하는지, 샤를로테를 내칠까? 그녀를 추방시킬까?”
“….”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의 혀를 뽑겠다. 너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눈알을 뽑겠다. 너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잘라버리라 지시하겠다.”
“….”
“그러니 한마디만 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칼라일 그자가 아닌, 내 곁에서 일생을 보내겠다고.”
“…폐하께서는.”
“제발 그렇게 말해!”
“정말로 잔혹하시군요.”
그의 눈에 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 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페르소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샤를로테가 온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닿은 순간이었다.
“폐하께서 그 말을 해주시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가 샤를로테에게 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몇 번이나 슬픔에 잠겨가며 기다렸다.
“하지만 너무 늦게 말씀해주셨군요.”
“로, 로젤리아….”
“저는 샤를로테 보다도 폐하를 더 원망합니다.”
“!”
“샤를로테를 사랑하셨다고 하더라도, 저를 생각하셨다면.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면 그녀를 정부로 받아들이지도, 황후의 자리를 내어 주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단순한 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찍이 제게 사과를 했을 것입니다.”
샤를로테보다도 그를 더 원망한다는 말에 페르소나는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남은 일생을 폐하의 곁에서 보내시길 바란다고요? 네, 저도 그걸 원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곁에는 이미 샤를로테가 있습니다. 그녀의 뱃속에서 폐하의 핏줄을 이은 아이가 있고요.”
뱃속에 있던 아이를 낳고, 나와 페르소나를 꼭 닮은 아이를 보며 우는 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미래에 이제 그는 없었다.
“예전에 폐하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황제와 황후는 하나. 그러니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손을 감싸며 이마에 입을 맞추던 그가 했던 말.
“황후와 황제는 하나라면, 저는 뭐였습니까?”
“…너와 내가 하나가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건가?”
“그럼 하나였습니까?”
황제와 황후는 하나다. 그렇기에 황태자와 예비 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교육을 받았고, 뭐든지 합을 이루어 행동했다. 나와 페르소나는 그 말에 아주 충실하게 행동했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함께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애초에 이건 샤를로테가 정부로 들어왔을 때부터 끊어내야 했던 관계였다. 오지도 않을 희망을 꿈꾸며 그가 돌아봐 주리라 묵묵하게 믿었던 내가 멍청했다.
우리가 하나였다고? 아니,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야 완벽한 이별이다.
“저는 단 한 번도, 폐하와 제가 하나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