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황녀가 아니라, 13황녀.
그럴 리가 없었다. 샤를로테가 13황녀라고?
카렐리아의 말이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샤를로테는 1황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안케도니아 황실의 1황녀라고,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1황녀라고 밝힌 이후 한동안 시종과 시녀들은 그녀를 무시했다. 1황녀이면서 황실을 지키지 않고 도망쳤으니까, 패전국의 황녀니까.
하지만 샤를로테는 1황녀의 자부심을 가지기라도 한 듯, 이를 모욕하면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그렇게 샤를로테의 손에 쫓겨나고 모욕을 당한 이들이 몇 명이었는가.
켈빈 부인, 나의 오랜 친구, 로먼 켈빈. 그녀의 불쌍한 동생 라벨…!
너는 왜 쫓겨나야 했지? 드레스에 차를 쏟았어. 순전히 실수였어. 하지만 샤를로테는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며 너의 손톱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메릴리, 라벨이 말을 하지 않아, 흐윽, 말을, 못해…약을 먹여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어, 나 어떡해야 해…?’
‘로먼, 일단 진정해?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강에 몸을 던졌어, 그 애가…물이라면 질색을 하면서 무서워하던 아이가 강에 몸을 던졌어! 너도 알잖아, 물에 빠졌던 기억 때문에….’
‘로먼, 제발 정신 차려, 네가 이러면 안 돼, 응?’
‘가엾은 라벨, 그 어린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게 사실일까? 사실이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아니야, 어린아이잖아. 어린아이가 뭘 알겠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어. 루아 남작부인은 다시 한 번 카렐리아의 어깨를 꽉 붙들며 실성한 사람처럼 카렐리아를 흔들었다.
카렐리아의 얼굴에 점점 공포가 드리워졌다.
“확실해?”
“아, 아파요, 이거 놔 주세요….”
“아가, 확실해? 정말로 샤를로테가 13황녀야? 정말이야?”
1황녀가 아니라, 13황녀라고? 거짓말을 한 거야? 그런 거야? 왜 1황녀인 척을 한 거지?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레이몬드 제국의 정부는 모두 귀족이었으니까. 노예인 정부도 있었지만 한 달도 채 못가고 내쫓겼으니까! 그러니 1황녀라고 거짓말을 했을 거야.
샤를로테가 황실에 들어오고, 황제에게 정부가 되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한 날, 역대 정부들에 대해 기록해놓은 장부를 보여 달라고 내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보여줬었지만, 노예거나 평민 출신의 정부는 유난히도 정부 기간이 짧았다는 것을 안 샤를로테의 얼굴이 흙빛에 가까웠다.
어차피 1황녀일 텐데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었다. 하, 1황녀가 아니라니!
정부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그랬지? 라벨의 손톱은 왜 뽑았지? 본보기였나?
악마 같다, 아니, 악마였다, 샤를로테는….
“이게 무슨 짓이냐!”
그때 루아 남작부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동댕이쳐진 그녀의 앞에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로웬이 있었다. 로웬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카렐리아를 끌어안은 채 루아 남작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 아…아, 아닙니다, 저는!”
“너는 황후 폐하의 전속시녀일 텐데, 무슨 짓이냐? 황후 폐하를 보필해야 하는 자가 왜 아이를 괴롭히고 있지?”
하필 들켜도 로웬에게 들켰다. 루아 남작부인은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하지, 샤를로테가 시킨 일이라는 것을 들키게 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루아 남작부인은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어깨를 떨었다. 만약 이 일이 로젤리아와 칼라일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당장 대답해.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지?”
“저, 저는….”
아무 변명이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렐리아가 자신이 물어본 것들을 술술 말해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끝이었다. 기사단장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버리니까. 루아 남작부인은 창백하게 질린 채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로웬의 품에 안긴 카렐리아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았다.
그런데 왜, 울지 않지?
카렐리아는 방금까지 울먹거리면서 루아 남작부인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울기는커녕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카렐리아는 괜찮아요.”
발랄한 목소리에 루아 남작부인은 헛숨을 삼켰다. 아프다면서 울던 아이는 어디로 갔지? 카렐리아는 그녀가 쥐어준 사탕을 오물거리며 로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 언니가 카렐리아한테 사탕을 줬어요.”
“사탕?”
“그리고 카렐리아가 사탕 먹다가 막 졸려서…서서 꾸벅꾸벅하니까 로젤리아 언니한테 데려다 준다고 그랬어요!”
그런 말은 한 적 없었다. 하지만 카렐리아의 거짓말 덕분에 로웬의 얼굴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로웬은 말없이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번쩍 안아들었다.
“…카렐리아는 내가 데려다주도록 하지. 너도 이만 돌아가도록.”
의심을 거둔 것 같지는 않지만, 겨우 살았다. 여기서 들켰다면 정말 끝이었을 거야. 루아 남작부인은 그대로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한 거지? 분명 겁을 먹은 듯 보였는데, 아니었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왜 말을 지어낸 거지? 어째서?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샤를로테가 시키는 대로 카렐리아에게 샤를로테에 대해 알고 있는 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카렐리아는 샤를로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샤를로테가 13황녀라는 것도 그 아이는 알고 있었다. 루아 남작부인은 떨리는 손을 꾹 눌렀다.
샤를로테는 13황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샤를로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 거짓말로 다치게 한 사람이 수십이었으니까.
루아 남작부인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면서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샤를로테에게 들은 것을 모두 말해야 할지, 덮어야 할지,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그때 켈빈 부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샤를로테에게 독을 먹이고 감옥에 갇히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깊고 어두운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
카렐리아는 로웬의 품에 안긴 채 남은 사탕을 먹고 있었다. 로웬은 귀빈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파티장이 아닌 저택의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파티를 즐기는 상태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로웬은 카렐리아를 내려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잘했어. 카렐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너무 어려서 실수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카렐리아는 생각보다 아주 잘해주었다.
“카렐리아 잘했어요?”
“아주 잘했단다. 생각보다 의젓하구나, 그러니 내가 한 당부도 잊지 않았겠지? 오늘 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단다.”
로웬은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갖다 댔다. 그 모습을 본 카렐리아는 자그마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카렐리아는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로웬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린 카렐리아는 이내 시끌벅적한 파티 음악이 들리는 파티장으로 뛰어갔다. 로웬은 카렐리아와 눈을 맞추기 위해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일을 부탁한 게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로웬의 중얼거림을 들은 하얀 새가 조용히 날개 짓을 하다 어디론가 날아갔다.
***
한편 그 시각, 로젤리아는 간만에 영애들과 즐겁게 놀다 보니 살짝 취한 상태였다. 약간 어지러움을 느끼고,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뺨을 더듬었다. 약간의 열기가 몸을 덮고 있었다.
바람을 쐬겠다며 잠시 자리에서 벗어나 정원 근처를 걸었다. 로젤리아는 대공저에 있는 저택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좋았다. 작년 생일을 완전히 망쳤던 탓에 이번 생일도 그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작게 흥얼거렸다. 그때 아름답게 조각된 조각상과 분수대가 보였다. 그리고 보니 바르셀민 백작이 조각품을 모으는 게 취미라는 말을 들었지.
조각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리아의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다.
분수대에 페르소나가 혼자 앉아있었다.
…어쩐지 파티장에 페르소나가 보이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호위도 없이 정원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로젤리아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고아원에 있었던 일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비참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면 절로 어깨가 떨렸다. 적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면,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구두에 밟힌 나뭇가지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페르소나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 만지다가 곧바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로젤리아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페르소나도 로젤리아가 이곳으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인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
“폐하의 시간을 제가 방해했습니다,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곧장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걸음 이상 내딛을 수 없었다. 어느 샌가 바로 뒤로 온 페르소나가 로젤리아의 손을 잡은 상태였다. 너무 놀라 그 손을 뿌리치려했으나 페르소나의 힘이 더 쌨다. 그의 손을 잡고 꾹 눌렀다. 놓아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세게 로젤리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폐하.”
“잠시만 시간을 내줄 수는 없겠나?”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젤리아가 어서 대답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제발 내 말을 좀 들어줘.”
왜 그렇게 처절한 표정인지. 로젤리아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상황이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끝내야 할 관계였다. 그제야 페르소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적어도 이제는 전 황후 로젤리아가 아닌 가넷대공으로서 들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너를 사랑한다.”
“….”
“아직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저절로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에, 심장이 욱신거리며 입안에 쓴맛이 감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