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카렐리아와 마주친 샤를로테
침착하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을 때는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졸지에 모든 이들에게 애정행각을 보여주었지만 침착하게 칼라일의 손을 잡고 내렸다. 아무렇지도 안은 척 행동하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어차피 이런 거 뻔뻔해지자!
“로웬은 오늘 파티에 온대?”
“당연히 오겠지, 누이의 생일인데 안 올 리가.”
“…그래, 오겠지. 아, 루치아노랑 카렐리아는?”
“카렐리아는 로웬이 데리고 올 거야. 어제 둘이 잠깐 놀더니 엄청 친해졌잖아. 그리고 루치아노는 아무래도 샤를로테 때문에…그리고 외국 귀빈이 지금껏 네 저택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면 분명 페르소나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저택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물어봤잖아?”
물어봤지. 그래서 루치아노에게 다른 모습으로 바꿔서 올 생각이 없냐고도 물었고, 완곡하게 거절당하기도 했고.
하지만 머릿속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칼라일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고,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상태였으니까.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축하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분이 정말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각하.”
“그러게요, 어쩜 정말 부러워요.”
“각하께서는 매일 그런 행복한 생활을 하시는 건가요?”
샴페인을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신 채 입술만 축인 지가 벌써 한 시간째였다. 얼떨결에 모두에게 애정행각을 드러낸 후, 영애들과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원래 같으면 되도록 말을 아끼고 피했겠지만 이번 파티에는 전부 황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 각하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
“맞아요. 레인 후작부인도 보이지 않고요.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없네요. 설마 대공 각하의 초대장을 무시했을 리도 없고….”
그야 칼라일이 그런 사람들은 전부 뺐으니까. 레인 후작부인이 칼라일을 정부로 들이려고 했다는 것을 들은 후, 세실리아는 칼라일과 함께 좀 더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번 기회에 걸러낼 사람을 걸러낼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후후, 저는 보았답니다, 칼라일님이 대공 각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칼라일과 함께 초대장을 골랐던 세실리아가 나를 꽤나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눈길이 쑥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칼라일님께서 대공 각하를 얼마나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보셨는데요, 사실 이번 초대장 작업도 칼라일님께서 도와주셨어요. ‘이 사람을 빼는 게 좋겠습니다.’라면서 각하를 생각하는 모습이 어쩜 그렇게 멋지시던지!”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애써 부채질을 했다.
“맞아요, 저도 길 가다가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말이 그런 거구나, 알았다니까요.”
“게다가 얼굴도 잘생기셨잖아요? 정말…저는…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처음 보았답니다. 진짜…,”
루비와 친하게 지냈던 밀러가 쿠키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릴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밀러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이 잘생기기는 했지, 많이…정말 많이 잘생겨서 가끔은 불안하기도 하고….
칼라일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바르셀민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유난히 칼라일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법 연구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는지 꽤나 진지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칼라일의 주변으로 점차 사람들이 한두 명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력연구관이라는 인맥을 쌓으려 어떻게든 말 한마디 걸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온 릴리는 그런 칼라일에 모습에 혀를 찼다. 릴리도 무역상단주가 된 이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접근해왔다. 그 중에서는 정중한 태도 형식적인 절차를 걸치면서 기획안을 따로 만들어오는 이도 있었지만, 거의 몰락한 귀족이고 시녀라는 이유로 아직은 거만하게 다가온 이들이 더 많았다.
“마력연구관이니까 더 힘들겠네요. 저기서 깨끗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몇일까요.”
릴리가 나름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로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는 척 칼라일을 가만히 바라보자, 내 시선을 의식이라도 한 듯 칼라일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힘들지 않아요?”
힘들면 중재라도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입모양으로 말했는데 갑자기 칼라일이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
“오라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
내 입모양을 착각했구나.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대화 도중에 오는 것은 조금 너무 하지 않아?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라일은 다행이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내 주변에 있는 영애와 귀부인들이 안 보이나…?
“세실리아 양, 이렇게 멋지게 파티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어요. 칼라일님도 열심히 도와주셨잖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준비해주시고.”
“마법으로 꽃을 피워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랍니다.”
초대장 작업만 도운 게 아니었구나. 어쩐지 겨울임에도 꽃이 너무 많다고는 생각했는데, 나는 고마운 마음에 테이블 아래로 그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칼라일은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영애들과 귀부인들 앞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저 눈!”
칼라일과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루비가 테이블을 치고 일어났다.
“저 눈이에요! 칼라일님은 언제나 대공 각하를 저 눈으로 보고 계셨어요! 그렇죠, 세실리아?”
“제가 칼라일님을 처음 뵈었을 때도 저런 눈이셨죠. 도대체 언제부터 좋아하신 거예요?”
보통 귀족 사회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청혼서를 보내거나, 아예 귀족의 품위를 버리고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연애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정부일 때는 더더욱.
“처음에는 제 짝사랑이었어요.”
그러니 짝사랑이라는 말에 시선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루비 양 기사를 읽어보셨다면 아실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모르시더라고요. 결국 제가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해야 했답니다.”
모른 게 아니라 그저, 나의도움에 대한 호의인줄 알았지…말없이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칼라일은 굉장히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라도 내 마음을 알아줘서 다행이야.”
“!”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이 살짝 떨렸다. 일부러 이러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 없어.
나는 나와 칼라일을 향해 눈을 빛내는 사람들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극적인 사랑, 이제는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극적인 사랑은 아닌데. 루비는 좋은 기사거리를 발견했다는 눈빛이었다. 이 상황이 여전히 익숙한 사람은 릴리뿐이었다.
나는 릴리에게 눈빛으로 도움 요청을 보냈다. 릴리는 오물거리던 케이클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반지라던가, 악세서리를 나눠 끼지 않나요?”
“네?”
“이제 연인이니까요. 반지가 불편하면 귀걸이가 좋을까요?”
내가 원한 것은 완전히 다른 화제였는데…. 뭐라 하지도 못한 채 미소만 지었다. 반지는 업무를 볼 때 불편한데, 아, 칼라일이 브로치를 선물해준다고 말했지. 그때 보석상에서 가져온 게 브로치였나?
“아. 이런.”
“?”
“단둘이 있을 때 주려고 했는데….”
칼라일은 난감하게 웃더니 그대로 품에서 진홍빛 벨벳 케이스를 꺼냈다. 뭐지? 손바닥만한 크기의 케이스 안에는 지난번 그가 말했던 브로치가 들어있었다. 풍성한 산호꽃 모양으로 세공된 브로치에 은박을 씌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빛을 받자 정교하게 조각된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알았다. 산호 모양 가지마다 달린 꽃은 가넷이었다.
이런 디자인의 브로치는 본 적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도 특이한 형태의 브로치를 보며 감탄을 흘렸다.
“직접 디자인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릴리의 말대로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을 나눠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칼라일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신 건가요? 웬만한 브로치보다 훨씬 더 예뻐요, 각하. 어서 착용해보세요.”
그는 내 손에서 브로치를 가져가서는, 조심스럽게 내 드레스 상단에 예쁘게 자리 잡아 달아주었다.
“마음에 들어?”
“…너무 예뻐, 고마워. 나는 뭘 해주면 좋을까.”
“이건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한 거잖아. 색 좀 더 화려하게 했어야 했나, 네가 수수한 디자인을 좋아해서….”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지난 번 페르소나가 나에게 보낸 브로치보다 훨씬 더. 다른 귀족들이 생일이라며 보내왔을 선물 들 중에서도,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저택에서 하던 대로 그에게 입맞춤을 해주려 했다. 그가 사랑스러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 순간.
세실리아의 저택 앞에 황궁 마차가 도착했다. 샤를로테는 페르소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풍성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든 채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요, 대공. 생일 축하해요. 오늘을 즐겁게 보내길 바랄게요.”
생일마저도 샤를로테를 봐야 한다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샤를로테는 나았다. 페르소나만 없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고아원에서 본 이후 황궁에서 불러도 지난번처럼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생일을 축하하네, 대공.”
“감사합니다, 폐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생일 때만큼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껏 잊고 살았던 작년 생일이 떠올랐다. 그날부터 시작이었지, 페르소나가 샤를로테를 데려온 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으니까.
“로젤리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칼라일이 속삭이듯 내 이름을 불렀다. 역시 황실에는 초대장을 보내는 게 아니었어. 보내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 페르소나의 비서가 페르소나에게 작은 케이스를 내밀었다. 그는 케이스를 열어 나에게 건넸다. 나는 눈앞에 놓인 목걸이와 귀걸이를 보며 말없이 웃어보였다.
“대공에게 어울릴 법할 것을 준비해봤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폐하께서 주신 선물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걸 지금 착용해봐야 하나? 나는 브로치를 살짝 움켜쥐었다. 페르소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었을까.
보아하니 샤를로테도 페르소나가 나에게 이런 선물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눈치였다. 나는 목걸이를 만지는 척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칼라일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황제가 준 선물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케이스를 열지 않았다. 나는 이제 칼라일의 연인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내 다리에 부딪혔다.
“이런 저희가 늦은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놀라 고개를 내려다보니 다리에 매달린 카렐리아가 보였다.
“언니!”
정원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카렐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로웬이 저 멀리서 카렐리아의 겉옷을 든 채 유유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를 뿌리치고 가다니, 조그마한 게 엄청 빠르네. 나중에 우리 기사단에 들어와.”
“조용히 해. 카렐리아는 기사 안 시킬 거야. 카렐리아, 이리와.”
칼라일과 꼭 닮은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안겨서 그런가. 페르소나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대공, 이 아이는….”
“아, 칼라일의 동생인 카렐리아 입니다.”
내가 익숙하게 카렐리아를 안아들자 페르소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 저러는 거지? 당황해도 너무 당황했는데…칼라일과 카렐리아가 너무 닮아서 그러나? 하지만 여기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페르소나가 아니었다.
“연구관에게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있었군요.”
바로 샤를로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