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가넷 대공의 생일파티
벌써 며칠째 로웬은 새벽에 일어나 새벽에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차 창문 너머로 이제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가 조금씩 떠오를 때마다 로웬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창백한 안색에 눈 밑은 짙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다 헝클어져 있었고, 항상 단정하던 옷매무새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왜 이렇게 죽어 가십니까.”
루치아노는 느릿하게 눈을 뜨며 반쯤 죽어가는 로웬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때 창가에 머리를 기대던 로웬이 피곤한 눈을 루치아노에게 돌렸다가 새된 신음과 함께 눈을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설마 피곤하십니까? 무슨 기사단장이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버거워하시는지.”
“비꼬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지? 칼라일 그놈에게 배웠나?”
“독학했습니다.”
로웬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내일도 만날 건가? 내일은 조금 힘들 듯 싶은데.”
“약속이라도 잡혀있으십니까?”
“아니, 릴리 양 때문에….”
더 정확히는 수도 내에서 돌고 있는 로웬의 소문 때문이었다.
그날, 로웬의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루치아노였다. 처음에는 집안에서도 몇 번 마주칠까 말까 한 로젤리아의 손님이 왜 이 마차에 타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가슴의 통증도 심했고, 로젤리아의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루치아노가 스스로를 샤를로테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소개하기 전까지는.
‘…방금 뭐라 그랬지?’
‘….’
‘샤를로테, 그 여자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네가?’
장난을 치나 싶었다. 얼굴이 상당히 닮기는 했지만, 샤를로테의 머리카락은 은빛이 아니던가. 제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신분은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 안케도니아 황실은 은빛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였다. 그러니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그가 몹쓸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쓰던 로브를 벗은 순간, 루치아노의 머리카락이 점점 밝아지더니 이내 은빛으로 변했다. 보랏빛 눈동자는 눈을 한번 깜빡이자 금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뒤로 믿기지 않는 사정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샤를로테가 신분을 속인 것부터 시작해, 그녀가 저지른 악행들…그제야 로젤리아가 왜 갑작스럽게 칼라일을 정부로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외국귀빈을 저택에 머물게 하는 것도 이상했는데, 모든 것이 한 번에 설명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로젤리아가 이 분노를 어떻게 꾹꾹 참아왔을까….
그렇기에 루치아노가 한 제안은, 거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비인가?’
‘흔히 마법사들끼리 사용하는 연락수단입니다. 급할 때 쓰는 연락수단인 만큼, 효력도 짧죠. 저는 이것으로 샤를로테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게 되었죠.’
‘들키지는 않나? 게다가 나비가 샤를로테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분명 누군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샤를로테는 마력이 없어서 감지를 못해서 상관없지만…역시 나비 말고 다른 게 좋을까요.’
루치아노가 로웬에게 원한 것은 신분을 보증해줄 증인이 되어주는 것과 황궁에서의 일을 전해주는 것 등, 조력자 역할을 부탁했다.
‘새로 하지.’
‘새 말씀이십니까?’
‘황궁 정원에 새가 많이 사니까. 의심을 덜 살 것 같은데.’
그리고 나름 조력자의 역할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골목에 숨어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마차를 준비하거나 잠시 머물 숙소를 잡아주고 가끔씩 신분을 요구하면 대신 나서주었는데….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보는 것이지?”
“들었는데도 이해가 안 되는데 하는 말입니다. 제가 그쪽과, 연인 관계라고 소문났다니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켈빈 부인을 따로 빼돌리고 뒷처리를 하느라 만나는 횟수를 늘렸더니 ‘황실의 기사단장인 로웬 가넷이 사랑에 빠졌다.’라는 …말이 사교계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루치아노는 혹시 모르니 로브를 쓰고 있었는데 그게 한층 더 소문을 자극 시킨 것인지 통 잠잠해지지 않았다.
“평소 행실이 어떠셨으면 그런 소문이 돕니까?”
“행실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릴리 양이야.”
“릴리 양이요?”
로웬은 마차 창문에 머리를 쾅 박았다.
릴리가 로웬에게 의도치 않게 고백을 한 날, 그리고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며 휴가를 받은 지금! 왜 하필 이럴 때! 그런 소문이…!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만날 수단도 없으니. 찾아간다 해도 만나주지 않을 것 같은데.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던 로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 속 의문의 여성은 루치아노였으나, 이와 별개로 진즉에 릴리에게 대답도 해주지 않고 그녀가 피하면 피하는 대로 두었던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네?”
“로젤리아에게 말할 생각 없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로웬은 루치아노의 손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새를 가리켰다.
“켈빈 부인을 이용해서 샤를로테를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계획.”
루치아노는 자신의 손가락 위에 앉아있는 새를 쓰다듬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말할 생각 없습니다.”
“어째서지?”
“로젤리아님과 칼라일님은 누군가를 이용하는 복수에 동참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어도 그저 넘기시겠죠. 그리고…”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기적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죄책감에 시달릴 듯싶어서….”
중얼거리듯 한 말은 새 날개 짓에 의해 끊어졌다.
창문 밖으로 하얀 새 두어 마리가 날아오더니 연신 짹짹대며 날개를 퍼덕였다. 로웬은 자신의 손가락 위에 앉은 새의 부리를 쓰다듬으며 말없이 새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웬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법사를 발견했다고?”
새가 전한 예상치 못한 소식에 놀라 소리를 지르자, 새가 ‘삐약’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흩어졌다.
“마법사를 발견했답니까?”
“자세한 것은 황궁에 가서 들어봐야 싶은데. 오늘은 이만 먼저 돌아가도록 하지.”
황급히 마차에서 내리려던 로웬은 문을 열려다 멈췄다.
“다음에 만나기로 한 날짜가….”
“사흘 뒤입니다.”
“시간이 겹쳐버렸군. 다음에 만나던가, 아니면 그대로 만나던가. 네가 결정하도록 해.”
“아….”
사흘 뒤에 있을 로젤리아의 생일파티.
루치아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 있는 초대장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샤를로테가 오겠지.
말없이 자신의 은빛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
파티가 성대하게 열릴 거라고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마차에서 내리기가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었는데.”
바르셀민 백작가에서 파티 준비를 모두 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마력석 광산을 되찾아준 것에 대한 보답이겠지. 어떻게든 보답하겠다며 바르셀민 백작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마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냥 그때 거절하지 말고 받는 게 좋았을까. 칼라일도 굉장히 놀란 것인지 눈가를 문질렀다가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바르셀민 가의 저택에 딸린 정원은 정말 넓었다. 수수하고 검소한 것을 추구한 덕분에 화려한 조경보다는 깔끔하게 잔디관리만 해주는 것이 다였지만, 이렇게 온갖 꽃들이 다 피어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새빨간 장미덤불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각 자리마다 놓여있는 보석 공예품과 빛이 나는 대리석 조각상들, 긴 테이블에 끝을 알 수 없도록 차려진 음식들은…. 살짝 부담스러웠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정말 열심히 준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리지 말까?”
오죽하면 칼라일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그의 말에서 어쩐지 약간의 진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분명 장난일 텐데.
“그럴까, 내리지 말까? 이대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 둘만 시간을 보낼까?”
“그거 좋은 생각이야, 돌아가자.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장난이 아니었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뭐지? 그러고 보니 아침에 아셀라가 선물해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올 때도 그랬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덤덤한 반응이었지. 나는 몸을 움직여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뭐가 불만일까, 칼라일은? 그것도 내 생일에, 이럴 때 연인이 먼저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너무 잘 어울려.”
“응? 뭐가?”
“구두. 드레스. 귀걸이, 목걸이…전부 다.”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그의 손이 발부터 허리, 귀. 목까지 천천히 이곳저곳에 닿았다.
허리를 끌어안으며 드레스에 달린 레이스를 매만지던 손이 천천히 귓가를 머물다가 목 근처로 내려왔다. 칼라일의 손끝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피부가 화끈거렸다. 그는 목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전부 잘 어울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단어 하나마다 느껴지는 소유욕에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가렸다. 칼라일은 아쉬워하는 것과 동시에 내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낯 뜨거운 욕망에 나는 눈을 떠야할지 감아야 할지 분간할 수 없었다.
“칼라일, 마차 안에서 이러지 말고….”
“이러지 말고?”
“나중에 저택에 돌아가서 해. 파티에서도 최대한 안 하도록 노력하고.”
“알았어….”
‘나중에’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지만 칼라일은 당장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애꿎은 레이스만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파티를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칼라일과 단둘이 있고 싶은 것은 나였다. 내 생일 파티라고 해서 가식과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마음 편히 있지 못한 채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것보다야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칼라일의 품에 안겨있는 게 더 좋았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다 그의 뺨을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그의 뺨에 한번, 입술에 두 번 입을 맞추자 칼라일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등에 닿았다고 생각했던 벽이, 사라졌다.
칼라일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벌컥 열린 문을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벽이 아니라, 문이었나.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젖혀졌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뒤를 돌아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겠다. 다른 귀족들이 이미 와 있을 텐데. 어쩌지? 봤나?
“뒤에, 귀족들이 몇 명이나 있어?”
마차 창문 밖으로 보았을 때, 파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칼라일은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싱긋, 웃으며 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귓가에 속삭였다.
“내리지 말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