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80화 (80/170)

#80화, 마법사 아이들

이른 아침부터 대공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택의 입구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나도 새벽부터 일어나 간편한 드레스를 입은 채 저택으로 온 물품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또 밤을 샌 것처럼 보이는 칼라일이 작게 하품을 하다가 저택 입구를 가득 채운 장난감과 인형들, 달콤한 케이크들과 쿠기 상자를 보며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일어났어? 밤새 방에 불이 켜있던데, 또 밤 샌거야?”

칼라일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셔츠에 달린 하얀 리본이 느슨해서 속살이 금방이라도 드러날 듯 했다. 나는 물품 리스트를 집사한테 넘겨주고는 리본을 쭉 잡아당겼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밤새지 말라니까.”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아서….”

잠에 취한 얼굴로 어깨에 이마를 기댄 칼라일은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선 채로 졸기 시작했다. 그때 바닥에 묵직한 상자 두어 개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짐을 옮기다 떨군 것인지 열린 상자 안으로 인형들과 어린 아이의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칼라일은 큰 소리에 놀라 어깨를 퍼뜩 떨며 무의식적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웬 상자들이야…?”

“고아원에 보낼 물건들이야.”

“고아원? 아, 메리골드 고아원?”

종종 내 옆에서 업무를 분담해서 처리하던 터라 칼라일은 가넷 가문이 어느 단체를 후원하고 기부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내가 메리골드 고아원에 애정을 갖는다는 것도.

사실 고아원에서 편지가 왔다. 서툴게 쓴 글씨로 쓴 편지를 보자 꽤 오랫동안 고아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못 가도 한 달에 한 번은 갔었는데….

나는 칼라일의 눈앞에 아이들이 써준 편지를 보여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고아원에 들를 생각이야. 후원을 해주는 만큼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있는지 확인할 겸해서.”

삐뚤빼뚤한 글씨체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던 칼라일은 고아원에 들를 것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따라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같이 가고 싶어?”

“응. 가면 안 돼?”

“하지만 밤 샜잖아. 눈 밑이 까만데….”

“마차에서 잠깐 눈 붙이면 되니까. 나 금방 겉옷만 챙기고 나올게. 같이 가, 응?”

카렐리아를 돌보는 모습을 보며 그가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함께 외출을 하다보면, 뛰어노는 아이들을 향하여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는 했으니까.

내가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그때 상자 바닥을 뚫고 한 무더기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모두 책이었다. 무거운 책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무 상자 바닥이 부서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에게 줄 책을 한 상자에 담아달라고 지시했었다. 아, 나눠담아야 했는데.

그때 칼라일이 검지로 상자를 가리킨 채 위로 올리자, 부서진 상자와 책들이 그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공중으로 떠올랐다. 귀여운 인형들을 허리에 낀 채 서둘러 책들을 주워 담던 사람들은 칼라일의 마법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책이나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제가 옮길 테니 다른 분들은 자잘한 짐부터 먼저 날라주시겠습니까?”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가는 물건들을 보며 사람들의 짐을 나르는 손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시선은 칼라일을 향해 고정되었다. 마법을 볼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

그때 누군가 다리에 달라붙었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일전에 산 드레스를 입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렐리아가 보였다. 나는 익숙하게 카렐리아를 안아들었다.

“카렐리아님, 뛰어다니지 말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침에 안 보인다고 했더니 나가서 놀아주고 있었나? 루치아노의 얼굴도 칼라일만큼이나 피곤해보였다. 어린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정원을 뛰어다녔는지 그의 머리카락에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잔뜩 묻어있었고 구두는 더러워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아요, 루치아노.”

“제 고생을 알아주시는 분은 로젤리아님 밖에 없군요.”

“손에 들린 것은 무엇인가요?”

익숙하게 카렐리아를 안아든 루치아노의 손에는 불에 그을린 듯 표지의 일부분이 까맣게 탄 서적이 들려있었다.

“카렐리아님의 공부는 제가 담당하고 있거든요.”

“카렐리아 공부하기 싫어! 너무 많이 했어!”

“책 편지 삼분도 안 돼서 도망치셨잖아요.”

“히이잉, 루치아노 미워어…언니, 언니 카렐리아 안아줘….”

카렐리아는 단호한 루치아노의 말 한마디에 기가 팍 죽어서는 나에게 팔을 벌린 채 안아달라고 칭얼거렸다. 아까 칼라일이 잠에 못 이긴 채 칭얼거리는 것과 꼭 닮은 모습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너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안아주는 것 대신 인형 하나를 가져와 카렐리아에게 안겨주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공주픙 인형이었다. 인형을 본 카렐리아는 볼에 홍조를 띄운 채 인형을 꼭 안았다.

“카렐리아 주는 거야?”

“그래. 선물이란다. 마음에 드니?”

“응! 너무 좋아! 예뻐!”

인형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아이였다. 카렐리아는 인형에게 ‘안녕? 나는 카렐리아야.’라고 말을 걸며 공중으로 인형을 높이 쳐들었다.

“헤헤, 미엘르 언니랑 꼭 닮았어!”

미엘르?

나는 카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되물었다.

“미엘르가 누구야?”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구, 인형처럼 예쁘고 상냥한 언니야.”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루치아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도 나와 비슷하게 당황한 얼굴로 카렐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놀란 티가 역력한 목소리로 나와 똑같은 카렐리아에게 되물었다.

“미엘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응, 기억하고 있어!”

“미엘르가 누군데 그러죠?”

항상 카렐리아에게도 존칭을 쓰던 그였다. 미엘르, 라고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잘 알고 지낸 사람이라는 뜻인가?

“황녀 이름입니다.”

“어느 제국의 황녀를 말하는 거죠?”

루치아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인형의 머리 부분에 심어진 새하얀 인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미엘르는,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 이름입니다.”

***

“카렐리아가 미엘르 황녀를 기억하고 있다고?”

마차를 타고 메리골드 고아원을 가던 도중, 아까 있었던 일을 칼라일에게 말해주자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설마’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신기하네, 아직도 미엘르를 기억할 줄은 몰랐어. 카렐리아가 미엘르를 만난 것은 3살 때쯤이었거든.”

“미엘르가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지?”

“응, 맞아. 그리고 황태녀였어.”

심한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를 내린 안케도니아 제국의 황태녀였다고?

“안케도니아 제국도 황태녀가 있었구나.”

“황족들 중에서 가장 유능했고, 똑똑했고, 황제의 자격이 충분한 황태녀였어. 하지만 명칭만 황태녀였을 뿐, 미엘르는 혼령시기가 되자 무역협정을 맺은 나라의 후궁으로…보내질 예정이었으나, 그날 밤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을 당했지.”

아마도 죽었을 거야. 칼라일은 중얼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루치아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미엘르는 유일하게 루치아노에게 잘 대해준 사람이었고, 헬리오도르 가문에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그랬다.

루치아노가 황궁에서 쫓겨나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랬지. 심지어 모두가 샤를로테를 괴롭힐 때 미엘르만큼은 약과 식사를 챙겨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미엘르인 척 그렇게….’

베논 제국의 입장에서 미엘르는 황실의 피를 이을 수 있기에 꼭 죽였어야 했을 것이다. 1황녀이니, 황족의 자존심을 생각해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겠지. 샤를로테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테고….

조금의 불안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려 하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자면…확실하게 죽었을 것 같으니까, 1황녀인 척 한 거구나.

단순히 13황녀인 자신을 부정하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새삼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칼라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물어보았다는 생각에 기분은 더 찜찜해졌다. 칼라일 역시 그다지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찜찜한 기분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채로 고아원에 도착했다.

“들어가자, 칼라일.”

이 기분을 빨리 털어내고 싶었다. 나는 칼라일의 도움으로 마차에 내리면서 귓가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집중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저 멀리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보였다. 가식 따위 없는 환한 웃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

페르소나가 왜 여기에 있어? 건국제와 결혼식 준비로 한창 바쁠 텐데?

그도 나와 칼라일을 보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사탕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칼라일은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완전히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같은 날, 같은 고아원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페르소나의 주변에 몰려들어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안겼다.

“황후 폐하!”

“폐하 오랜만이에요!”

“잠깐 얘들아, 그렇게 달려들지 말고 기다리렴!”

아이들은 내게 일어난 일을 잘 몰랐다. 그러니 나에게 황후라는 칭호를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교사들은 서둘러 아이들의 입을 막았다.

“대공, 그대가 여기에는 어쩐 일이지?”

“후원 물품을 전해주러 들렀습니다.”

페르소나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칼라일은 나를 그의 뒤로 숨겼다. 아이들의 앞이라 인상을 쓰지 않으려 하면서도 페르소나를 만난 것에 썩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르소나는 칼라일이 잡은 내 손을 바라보다 실소를 터트렸다.

“황궁에 있을 시간 아닌가, 연구관?”

“지시하신 업무는 이미 다 끝낸 상태라서요, 폐하.”

“그 많은 양을 벌써 다 했다고?”

“아, 생각보다는 많지 않아서요.”

많지 않기는 무슨. 매일 같이 밤을 새는 데, 못 끝내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페르소나와 칼라일은 입으로는 평범한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눈으로는 소리 없는 신경전을 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페르소나가 왔다는 사실에 좋아라 했지만 고아원 교사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매우 난감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교사들을 위해서라도 재빨리 중재하려 했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만 아니었다면.

칼라일도 그 기운을 느낀 것인지 그의 고개가 바로 옆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정확하게 세 명의 아이들에게 닿았다.

그 아이들에게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력에 노출될 일이 없는 아이들에게 왜 마력이….

‘설마?’

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입을 막았다.

“왜 그러는가, 대공?”

아무것도 모르는 페르소나가 내 반응을 보고는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의 고개도 그 세 명의 아이들을 향했다. 칼라일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들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런 거였어.

“제 말이 맞았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없는 게 아니라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었습니다.”

페르소나는 그 의미심장한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곧장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한명씩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점점 희열로 가득 차다 못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칼라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고아원에 마법사 아이가 두 명이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