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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79화 (79/170)

#79화, 이미 충분했다.

칼라일은 나를 마수에게서 구한 이후, 저택으로 데려왔다.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은 나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황궁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는 아무리 봐도 안케도니아 황실의 핏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헬리오도르 가문과 안케도니아 황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안케도니아 황실에 소속된 마법사가 몇 명 있었지만 헬리오도르 가문이 키워낸 마법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혹여나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대비하여 맺은 평화협약은 아슬아슬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티는 안 내지만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내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만약 조금의 영향력이 있는 황자나 황녀였다면 대접해주었겠지만 나는 11번째 황자였다.

“황족 중에 저렇게 생긴 아이를 본 적이 있나?”

“사생아 출신의 황자가 저 애 아니야? 그 왜, 냉궁에서 자랐다던….”

“그 11번째 황자? 아무리 11번째라지만 황족을 저렇게 갖다버려도 되는 거야?”

헬리오도르 사람들은 신경을 바짝 세우며 어서 내보내라 했다.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서 내보내라면서 내 팔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아악!”

그 순간 통증이 몰려왔다.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너무 아팠다. 마수의 이빨에 당한 상처가 벌어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냅다 박혔다.

그 순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칼라일이 내 팔을 억지로 움켜쥐었던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눈빛이 살벌했다. 남자는 움찔거리며 내 팔을 천천히 놓았다.

“아가야, 괜찮아?”

“아, 아, 파아….”

하지만 칼라일은 나를 볼 때만큼은 따뜻한 눈빛을 유지하며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내 팔을 쓸어 내렸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빛들이 반짝였다. 마수에게 당한 상처가 치료되고 있었다. 치유 마법? 내가 놀라서 바라보니 칼라일은 싱긋, 웃으며 또 다른 마법도 보여주었다.

칼라일의 마력은 둥근 빛이었지만 그가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내가 신기해하자 칼라일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들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칼라일은 유리 다루듯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방으로 데려갔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직접 씻기고, 식사를 차려주었다. 침대에 앉아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내가 잠들 때까지 다양한 마법을 눈앞에서 계속 보여주었다. 생각해보자면 태어난 이래 그렇게 편안하게 잠들었던 날은 없었다. 새벽에 몇 번이고 깨어나 이불을 덮어주며 내 상처를 살펴보던 손길을 아직도 기억했다. 머리를 쓰다듬던 것도, 다음 날 아침, 살짝 피곤한 얼굴로 잘 잤냐며 묻는 것도. 황궁에서 나를 다시 데려가려 사람을 보내왔을 때도.

“황자님, 어서 돌아가시죠.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 싫어, 도, 돌아가지 않을, 거야.”

칼라일의 뒤에 숨어 옷을 꽉 쥔 채 덜덜 떨었다. 누군가 황실에 연락을 넣은 것인지, 기사들은 아침이 되자마자 나를 다시 데려가겠다며 찾아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있고 싶었다.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맞지 않을까. 또 채찍질을 당하고, 물건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생한 폭력의 기억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덜덜 떨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칼라일을 제외하고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폐하의 명입니다. 비켜주십시오. 황자님 가시죠.”

기사가 나에게 손을 뻗은 순간 나는 한계에 다다른 공포에 그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내 팔을 잡은 기사는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몇 배의 힘을 받아 바닥에 꼬꾸라졌다.

공포로 인해 마력이 개방되었다. 몸에서는 시퍼런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흘러나온 마력 때문에 숨이 막혔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머리는 깨질 것 같고,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다.

몸이 한기에 의해 떨렸다. 그 와중에 황실에서 당했던 학대의 기억이 나를 뒤덮었다.

“싫어, 아아, 싫어! 그만해! 싫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누가 좀 도와줘, 제발. 기사들이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나를 죽일 듯 달려들었다. 그 순간 나를 감싼 것은 칼라일이었다. 땅에서 솟아난 검은 한 덩어리의 큰 기운이 기사들을 압박했다.

나를 보호한 이가 칼라일임을 안 순간, 나를 지키기 위해 마법으로 기사들을 공격했다는 것을 안 순간, 그에게 매달렸다.

“여, 여기, 있게 해주, 세, 세요.”

제발 여기 있게 해달라고 가기 싫다고. 그는 내가 이 저택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줄 것 같았다. 그 순간 한 남자가 나를 칼라일과 떨어트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붙잡아서가 아니었다. 칼라일이 나를 놓지 않았다. 나를 꽉 끌어안자 칼라일의 얼굴에는 더 많은 금이 갔다.

“칼라일, 어서 그 아이에게서 떨어져라.”

“숙부님, 저 기사들을 내쫓아주세요. 그리고 황궁에서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이 상황을 대신 좀 설명해주세요. 이 아이는 지금부터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칼라일! 그 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반대하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 제자로 삼을 거니까.”

숙부라고 칭해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숨만 쉬었다. 그 남자는 기사들을 압박하고 있던 칼라일의 마법을 풀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되돌아가고 모든 상황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싶을 때, 칼라일은 쓰러졌다. 온몸에 퍼진 곰팡이같은 상처에 괴로워하면서. 밤새 앓았다.

그날 밤, 숙부님이 날 찾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저택을 떠나 달라고 말했다. 본래 까만색에 가까운 시퍼런 마력은 흑마법사 계열의 마력이었다.

그에 비하여 칼라일의 마력은 깨끗한 백마법사 계열의 마력이었다. 칼라일은 태어날 때부터 대마법사를 뛰어넘는 마력을 지녔지만 몸이 약했다.

그래서 정반대 계열의 마력을 만나면 마법을 쓸 때보다 더 무리가 간다고.

칼라일이 나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지만…나와 함께 있으면 저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했다. 칼라일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날 제자로 들이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칼라일은 워낙 정이 많아. 그러니 네가 먼저 떠나주었으면 하는구나. 네가 원한다면 돈과 집을 마련해주마. 신분도 만들어주겠다.”

집도 구해주고, 신분도 준단다. 심지어 돈도 두둑하게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떠나기 싫었다. 밖으로 나가면서 겪게 될 일이 두렵다거나 기사들이 날 찾아낼까 무서운 것보다 더 간절한 것.

이제야 겨우 내 편을 찾았는데.

황궁에서 나는 부산물에 가까웠다. 그러니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준 적도 없었다. 그들이 보인 것이라고는 폭력, 폭력이었다.

친누나인 샤를로테조차 내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그래, 이해한다. 같은 사생아고, 각자 살아남기 바쁜데 남을 어떻게 챙기겠어.

하지만 나는 누구든 상관없었다.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원했다. 그리고 그가 칼라일이었다. 처음 본 나를 구해주고,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제자로 삼겠다고 했다.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하지만….

‘그러게 왜 기대를 했어. 왜….’

아침이 되자마자 남자가 준 돈주머니를 가지고 저택을 나갈 생각이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쓰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꾹 참았다. 그런데 누군가 내 이불을 확 내려버렸다.

놀라 고개를 드니,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칼라일이 눈앞에 보였다. 칼라일은 놀란 내 얼굴을 감싸 쥐며 천천히, 한 단어씩 말했다.

“가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있어도 돼.”

“…네?”

“숙부님이 떠나달라고 말했지? 그 말 신경 쓰지 마. 여기 있어도 괜찮으니까. 아, 눈가가 부었네. 울었어?”

“저, 저 때문에 아픈 거, 아니에요?”

“응? 아….”

나 때문에 아픈 거잖아.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 한마디 하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온 거야? 겨우 가라앉혔던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칼라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런 걸 왜 네가 신경 써, 이제 겨우 10살이잖아.”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나는 널 도와주고 싶었어. 그래서 널 데려왔고, 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야.”

단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얼어붙은 서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침대 위로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채찍질을 당했을 때도 안 울었는데. 한번 흘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받고자 했던 것을, 간절히 바라왔던 것을 넘치도록 받아버렸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그 사이 칼라일은 마법도 가르쳐주고, 글도 알려주었다. 고민도 들어주었고, 내가 원하면 그날 해야 할 일을 전부 제쳐두고 내 옆에 있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보살핌을 받으며, 흑마법 밖에 쓰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마법 컨트롤도 숨 쉬듯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사제가 되기 위하여 신전에 들어갔다.

성은 안케도니아나 헬리오도르가 아닌, 엘렌. 헬리오도르는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했기 때문에 마법사로서 일을 할 때는 언제나 가명을 사용했다. 엘렌은 칼라일의 가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루치아노 엘렌이 되었다.

사제가 되자마자 공부, 또 공부를 했다.

신전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받은 대신관이 되어 헬리오도르 가문이 위험할 때 뒤를 받혀주기 위해서. 날 구해주고, 사랑해줬던 칼라일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니 칼라일이, 어느 전 황후의 정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칼라일이 카렐리아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전할 때, 칼라일의 부모님이 샤를로테로 인해 죽었다는 말을 할 때, 그때 칼라일은 샤를로테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었다.

그럼 그녀의 친동생인 나도 미워해야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칼라일은, 살아있는 나를 보고 울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며 울었다.

칼라일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로젤리아를 좋아한다고 자각한 그 날, 내가 처음으로 백마법을 쓴 그 날.

칼라일이 그렇게나 옆에서 도와주고 가르쳐주었지만 끝내 성공시키지 못했던 마법을, 로젤리아가 도와줬다. 내 손에는 내가 피워낸 붉은 꽃이 있었다.

흑마법이 아니었다. 죽었어야 할 꽃이, 내 손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사실 백마법이나 흑마법의 구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다만 칼라일이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줬는데도 정반대의 마법 밖에 쓰지 못했던 게 아쉬웠다. 속상했다.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백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붉은 꽃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로젤리아 덕분에.

처음으로 백마법을 성공시킨 그 순간,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칼라일은, 로젤리아를 사랑하는데.

두려웠다. 이 일로 칼라일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의지와 달리 로젤리아에 대한마음은 점점 커졌고 그녀에게 내 감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도망치듯 숨었다.

로젤리아가 칼라일의 대한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한다면,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면, 분명히 나는 괴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괴롭기는커녕 홀가분했다. 적어도 이렇게 꽃잎을 떼어주고 마주 앉아 식사도 하고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장난도 칠 수 있게 되었고.

“루치아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여러 번 불러도 못 듣네.”

더 이상 선을 긋지 않아도 된다.

칼라일에게 하듯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체만으로 기뻤다.

“루치아노.”

“네?”

“칼라일이 귀족들을 천장에 매달았던 그 마법,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화를 참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 칼라일과 무척이나 닮았다. 나는 꾹꾹 눌러왔던 웃음을 맘껏 터트렸다.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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