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78화 (78/170)

#78화, 이름뿐인 황자

루비는 항상 기대 이상의 기사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기대를 뛰어넘는…내가 과연 밖에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신문을 펼쳤다가 도로 접었다. 눈을 한 번 문지르고 다시 펼쳤지만 몇 초도 못 버티고 다시 덮었다. 기사를 내라 했더니 왜 세기말의 로맨스 소설 같은….

뭔가 크게 실수했다는 느낌과 함께 방으로 나서자 두 손을 마주 모은 채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녀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클로이가 입을 틀어막은 채 신문을 꼭 쥐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 속 이야기가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진정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해봤자 소용이 없겠지. 그때 칼라일이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밤이라도 샌 것일까. 옷매무새가 다 흐트러진 채 헝클어진 머리를 묶기 위해 하얀 리본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 로젤리아.”

“….”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느슨하게 묶은 머리를 넘기다 눈이 마주친 그대로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가 문득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

“인터뷰하는 내내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듯한 두 사람은 무척 아름답고 어여쁜 사랑을….”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최근 루치아노는 새벽에 나가서 다음 날 새벽에 대공저로 들어왔다. 칼라일이 같이 아침 식사를 하자고 갔을 때는 이불과 한 몸이 되어버린 후였다. 그래서 가끔은 칼라일이 루치아노를 이불 채 안고 오거나 아예 식사를 지하실에서 하곤 했지만, 넋이 나간 그는 포크를 든 채 잠에 들었다.

그런데, 웬일로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은 칼라일이 일찍 황궁으로 가야 하는 날이라 홀로 식사할 예정이었지만, 루치아노가 있는 식사실로 찾아갔다.

“그만.”

“다이아몬드 같이 수려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인터뷰 내내 떨어지지 않았고….”

“그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에 들린 신문을 뺏으려고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루치아노는 식사 후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내내 옆에서 루비가 쓴 기사를 읽어주고 있었다. 식사는 명분이었다. 이게 그의 목적이었다.

나는 신문을 뺏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한 뼘 차이로 신문에 내 손이 닿지 않았다.

기어코 기사를 끝까지 읽은 루치아노는 내 눈앞으로 신문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카렐리아만이 내 옆으로 와 사탕 몇 개를 쥐어주었다. 내 편은 카렐리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칼라일님과 사귀는 소감은 어떠신지요.”

“루치아노의 뺨을 꾹 눌러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군요.”

“이런, 그만큼이나 좋으신가요? 세상에나.”

“그대는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저 같은 좋은 사람이 또 어딨다고 그러는지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것은 누구를 닮았을까. 나는 그대로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루치아노는 오늘따라 더 많이 장난치고 있었다. 아, 아닌가, 그의 원래 성격인가?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듯한 루치아노를 찬찬히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던 순간 루치아노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뭔가, 사람이 달라진 기분이 들어요.”

“글쎄요, 달라지지는 않고….”

카렐리아가 화관을 번쩍 들어 올리자 루치아노는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터트리는 카렐리아를 품에 안은 채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카렐리아의 머리가 온갖 꽃으로 장식되고 있었음에도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저는 칼라일님이 좋습니다.”

그리고 꺼낸 말은 때 아닌 고백이었다.

루치아노가 칼라일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둘은 오랜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그들 사이의 우정이 그 무엇보다 돈독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면서 꽃나무의 꽃잎들이 흔들렸다. 겨울이었지만 마법으로 피워낸 꽃들은 마치 봄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분홍빛이었다.

꽃잎이 머리카락에 잔뜩 달라붙었다. 카렐리아는 꽃비가 내리자 또끼처럼 폴짝거렸다.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데, 루치아노는 내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들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로젤리아님과 칼라일님은 참으로 비슷하십니다.”

“어느 부분이요?”

“어른스러우면서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루치아노가 이상했다. 달리 별다른 점은 없는 듯한데 이상했다. 물론 그게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나를 한결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그래, 마치 칼라일에게 하는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에 있는 꽃잎을 하나 둘씩 떼서 손바닥 위에 올려두자 금 새 옅은 분홍빛 꽃잎으로 가득 찼다.

“놀린 것과는 별개로 저는 두 분이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바람이 불면서 루치아노의 손 위에 모여 있던 꽃잎이 방안 가득히 흩날렸다. 한순간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꽃잎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칼라일님을 좋아합니다.”

단지 입가에 떠오른 미소만 보였다.

“그래서 로젤리아님도 좋아합니다.”

과연 그 순간 무슨 미소를 지었을까.

“그러니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

“그러니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 말을 내뱉기까지 참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아프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로젤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와 손을 잡는 순간 지하실에서 마주했던 순간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내 마음을 그녀가 알았다. 그래서 더 말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나는 그럴 자격이 없지 않은가. 로젤리아를 좋아했지만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물론 최근에는 오래 전부터 계획해둔 일 때문에 의도치 않게 만나는 횟수를 줄였지만, 선을 그었다던가, 일부러 벽을 세웠다던가. 최소한 나는 그렇게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게 맞는 답이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최근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바올이 버려진 곳에 화재가 나서 크게 다치고, 샹들리에 밑에 깔려 큰 부상을 입고.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도 어떻게든 계속 로젤리아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편해졌다. 칼라일과 로젤리아가 연인 관계임을 밝힌 기사를 보자마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흙바닥을 구르는 듯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친구로라도 남는 게 낫지 않은가.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유일한 내 가족 칼라일과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리기보다는 이게 낫지 않은가.

바람이 살랑거리면서 뺨을 지나쳤다. 따뜻한 봄바람이 아니다.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는 겨울바람의 시작이다.

로젤리아는 미리 가져온 담요 중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살갗 위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차가워진 뺨을 묻었다.

내가 황자였을 시절에는 이 바람도 따뜻한 축에 속한 것이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아기를 냉 궁에 방치할까. 그러나 칼라일을 만나기 전에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

안케도니아 제국의 11번째 황자이자 사생아였다.

내 아버지였던 황제는 떠돌이 무희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강제로 몸을 취했고, 나와 샤를로테가 태어났다. 차라리 엄마 쪽의 얼굴을 닮았다면 좋으련만, 비극적이게도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황가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명칭만 황자, 황녀였을 뿐 그에 따른 취급은 받지 못했다. 사실 취급은커녕 10살이 되던 해 버려졌으니 황자 취급조차 못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정말 이름뿐인 11번째 황자였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버러지 황자, 루치아노 안케도니아.

나를 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내 주변에 오는 이들이 하나같이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 증세를 보인 탓에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돈 탓이었다. 황제 놈은 그 소문뿐인 저주가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끼칠까 나를 학대했다. 때리고 또 때렸다.

심지어 채찍질까지 했다. 내가 상처로 거의 너덜너덜해질 때쯤 황제 놈은 나를 사나운 짐승이 사는 숲에 버리도록 지시했다.

그것도 비가 무척이나 쏟아지던 날에 나를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옷을 입히고는 웬 구덩이에 던지듯 버려두고 갔다.

짐승의 울음소리, 기괴한 비명.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무서웠다. 누군가 도와줬으면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살려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짐승도, 사람도 아닌 무언가와 마주했다. 마수였다.

늑대 형태의 마수는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잡아먹기 위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마수의 이빨이 팔을 찔렀다. 죽겠구나,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마수는 두 쪽으로 쩍, 하고 갈라지더니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검은 피가 얼굴에 튀었다. 그리고 나는 겪어보지 못한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하필 그 마수의 피는 산(酸)이었다. 얼굴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그때 나를 끌어안고, 녹아내리던 피부를 원상태로 복귀시켜 통증마저 없애준 이가 바로 칼라일이었다. 마수를 죽인 것도 그였다. 그의 팔과 얼굴에는 더 많은 마수의 피가 묻어있었다. 칼라일은 피부가 녹아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먼저 치료했다.

그리고 울음을 그치자 환하게 웃었다.

“미아구나. 이런 곳에 홀로 있으면 위험해. 이름이 뭐야?”

“…!”

“괜찮아. 겁먹지 마. 해치지 않을게, 나를 믿어도 좋아.”

상냥한 목소리에 따뜻한 눈빛. 그리고 해치지 않겠다는 말에, 나를 먼저 걱정하는 그 물음이,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이 되서야 그것이 나를 배려하면서 나온 질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사생아였지만 황실의 상징과도 같은 은빛 머리카락과 금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내가 황궁에서 버려졌다는 것을 그는 눈치 챘을 게 뻔했다.

그럼에도 칼라일은 혹여나 내가 겁을 먹을까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서워하지 말라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들고 있던 검을 멀리 던지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타인의 손이 나에게 닿을 때는 폭력을 행사할 때뿐이었으니까.

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의 손만큼은 어느 것보다 따뜻했다.

그렇게 10살. 내가 황궁에서 버려진 날. 칼라일을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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