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77화 (77/170)

#77화, 헬리오도르 백작

“오랜만이에요, 루비 양. 잘 지내…지는 못 했나 보군요.”

간만에 만난 루비는 안색이 안 좋았다.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오고 입술은 다 터져서 새파랬다. 불면증인가 싶어 캐모마일 차를 내오도록 지시했다. 찻잔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저, 루비양?”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요즘 사업을 확장시키는데 모든 신경을 쏟고 있어서요. 살짝 맛이 간 것 같지만 각하의 말씀을 들을 정신은 남아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부를까요?”

고개를 저은 루비는 멍한 눈으로 찻잔을 바라보다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며칠 전에 신문에서 읽었다. 루비가 이번에 새로 잉크 사업을 시작했다는 기사였다. 신문을 제작하는 인쇄소 사람 중 몇 명이 잉크에서 나오는 독성 물질에 노출되어 결국에는 쓰러졌다고 했다. 그래서 루비가 약초를 이용한 천연 염료 잉크 제작에 손을 댔다고 했다.

하지만 약초를 이용한 잉크라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 루비는 캐모마일 차를 마신 후, 간신히 진정이 되었는지 조금이지만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래서…오늘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각하?”

“기사를 하나 써줬으면 해서요, 가능할까요?”

“당연하죠, 뭐든 가능합니다. 말만 해주세요. 혹시 칼라일님께서 세운 바올 사건의 공을 더 키우고 싶으신 거라면 신문 앞뒤 꽉꽉 채워 쓸 수도 있어요.”

루비는 순식간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펜을 들었다. 막상 저렇게 눈을 빛내며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뭔가 말하기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찻잔 손잡이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칼라일이 백작 작위를 받았답니다.”

“!”

“그래서 칼라일은 나의 정부를 그만두고, 정식적으로 연인관계가 되기로 했어요. 그러니, 루비 양만 괜찮다면 이 소식을 기사로 써서….”

“…어째서.”

“네?”

“어째서 더 빨리 불러주시지 않으셨어요!”

루비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이 반으로 뚝 부러졌다. 나는 놀라 나뭇가지가 꺾은 것 마냥 부러진 펜을 가리켰다. 저게 저렇게 쉽게 부러질 수 있는 거였어? 까만 잉크가 루비의 손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루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잉크를 쓱쓱 닦은 채, 다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언제부터 연인 관계로 발전한 거죠?”

“저기, 루비 양?”

“백작 작위를 받은 것은 역시 바올을 잡아들이는 데 큰 공을 세워서인가요? 마력연구관 자리를 받으면서 작위도 함께 받은 것인가요?”

“루비 양, 일단 진정부터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이제 정부가 아니니 따로 사시나요? 아니면 새로 저택을 구해서 단둘이 사나요? 시종은 데려가시나요? 결혼까지 생각하셨나요? 누가 먼저 좋아했나요? 칼라일님이 먼저 좋아하셨나요? 그 후에 각하께서 좋아하신 거죠? 칼라일님과 인터뷰 가능한가요?”

펜이 하나 더 부러졌지만 루비는 질문을 다다다 쏟아 부으며 가방에서 새 펜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펜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제 펜을 다 부러트리지 않고서는 이 질문 지옥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칼라일이 차와 함께 쿠키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분명 클로이한테 부탁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칼라일이?

“오랜만이네요, 루비 양.”

“백작님, 인터뷰 가능할까요, 질문이 쌓여있는데요!”

루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이와 펜을 가지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칼라일이 움찔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부르는 호칭에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루비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게 오늘이었군요. 루비 양, 일단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하나씩 질문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루비는 진정하지 못했다. 칼라일이 내 옆으로 와 자연스레 손을 잡은 것을 본 탓이었다. 나는 루비의 펜이 부러지지 않기를 바라며 칼라일을 째려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이 웃는 저 미소가 얄미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막 손잡는 사이가 되신 거죠?”

“손잡는 것은 예전부터 했어요. 사실 그때부터 좋아하는 티를 냈는데 로젤리아는 그걸 모르더라고요. 그냥 제가 애교 부리는 줄 알았나 봐요.”

“벌써 존칭까지 거뒀나요?”

“맞아요. 그런데 단둘이 있을 때만 그러자고 하더라고요.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일에 바빠서 단둘이 있을 시간이라고는 별로 없단 말이죠. 게다가 저도 일을 하니까….”

정말 둘이 이렇게 쿵짝이 잘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 루비의 질문에 부끄러워서 대답도 잘 못 하겠던데, 칼라일은 왜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답하는 거지? 나는 칼라일이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말할 때마다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칼라일은 맞잡은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왜 그래, 로젤리아?”

아마 단둘이 있었다면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루비의 눈에는 사이좋은 애정행각으로 보일 테니까. 칼라일은 루비의 질문을 받는 내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루비가 여덟 장 정도의 종이 앞뒷면을 다 채울 때쯤 질문은 끝이 났다. 하지만 어쩐지 아쉬운 표정이었다. 이것 말고도 할 질문이 더 남았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가 18년 살면서 썼던 기사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사가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좀 더 빨리 불러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기사는 느긋하게, 시간 날 때 써도 좋아요.”

“안돼요, 이미 늦었다고요! 불러주실 거라면 황실 결혼식이 공표 나기 전에 불러주셨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예요!”

황실 결혼식이라고? 언제 발표가 났지?

“오늘 아침 신문에 나와 있던데요?”

아침이 되자마자 루비를 부른 탓에 미처 신문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시종이 가져다 준 신문을 펼치자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결혼한다는 기사가 신문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말이 없어진 칼라일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는 샤를로테의 인터뷰를 읽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게요, 아쉽네요. 먼저 공표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

“그래도 최대한 신문에 꽉 차게 써 주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내 생각보다 칼라일의 반응이 무덤덤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정말 아쉬운 티가 느껴졌다. 루비의 앞이라 일부러 이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페르소나와 샤를로테의 인터뷰가 적힌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살짝 흔들었다. 그제야 칼라일이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기사에 쓸 것을 고르는 루비를 곁눈질하면서 입모양으로 ‘괜찮아?’라고 물었다. 칼라일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대답 대신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도 결혼해서 이 기사 덮어버릴까?”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화가 나거나, 부끄러운 것보다는 루비의 질문 공세가 다시 시작될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목덜미를 스친 탓이었다.

***

“화났어?”

“….”

“진짜 화난 거야, 로젤리아…?”

나는 칼라일이 나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서류로 몸을 방어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났냐고? 화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덕분에 얼마나 질문에 시달렸는지! 얼마나 부끄러웠는데!

칼라일은 그런 내 반응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칼라일이 더 가까이 오지 않고 멈추면 그대로 도망갔다.

그런 무의미한 뒤쫓기가 밤까지 지속되었다.

“로젤리아, 미안해. 나는 그냥 우리가 정식적인 연인이 되는 게 너무 기뻐서….”

칼라일이 마치 꼬리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몸을 움츠리고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지기는 했다. 애초에 칼라일에게 정부를 그만두고 정식적인 연인 관계를 공표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나였다.

페르소나에게 받았다던 서류를 다시 찬찬히 읽어본 결과,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백작의 작위를 수여한다는 글귀가 보였다. 세실리아의 말이 맞았다. 작위를 주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칼라일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인데…칼라일이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런 눈으로 보면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 뭉치를 천천히 내렸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고 있던 칼라일은 내가 서류를 내리자마자 빠른 속도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냥 좋아해서 그랬어. 많이 화났어?”

“화는 안 났는데, 너, 너무 스스럼없이 그러니까!”

“하지만 좋잖아. 내가 이러는 거.”

왜 당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물론 좋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 상황이 어이도 없고, 귀엽기도 하고.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준 이후 계속 칼라일이 나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라일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손만 닿아도 몸이 절로 떨렸다. 이렇게 손을 잡아보고 누군가 손등에 입을 맞춰준 적이 없었다. 페르소나는 가끔 가다 손 한번 잡을 뿐, 부끄럽다며 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까.

나는 그를 골려주자는 마음으로 그대로 입을 맞췄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자 칼라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멍한 눈빛이었다. 뭐지, 왜 안 놀라? 얼굴이라도 빨개지란 말이야.

그대로 내 허리를 끌어안으려는 칼라일의 팔을 저지했다. 하지만 팔을 저지하자마자 이번에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럼 팔은 어떡하려고?”

그대로 칼라일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뜨겁고 부드러운 촉감이 손바닥 전체로 퍼져나갔다. 칼라일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팔을 쥐고는 내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키스를 했다.

“먼저 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낮게 내리깐 은빛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칼라일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일부러 그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자 칼라일은 내 손목에 입을 맞춘 채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응, 좋아해.”

“!”

“그러니까 더 해줬으면 좋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