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네 진짜 이름
로웬이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켈빈 부인의 어깨는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로웬의 짙은 붉은빛 눈동자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일단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어떤 것부터 듣겠나?”
“…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어느 것부터 들을 텐가.”
차가운 붉은빛 눈동자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에 켈빈 부인은 겨우 입을 떼었다.
“드, 들을 거라면, 나, 나쁜 소식부터….”
의자를 끌어와 앉은 로웬은 감옥 문 옆에 놓인 녹슨 칼을 꺼내들었다.
“샤를로테가 네 동생의 손목을 자르지는 않았어. 정확히는 자르라고 기사들을 보냈다.”
피가 묻고 굳어진 칼은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탓에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죄수들의 혀를 뽑는 커다란 집게도 있었다. 녹슨 부분에서 들려오는 끼이익, 거리는 마찰음은 오랜 전장을 떠돈 로웬에게도 나름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그럼 이제 좋은 소식을 들려주지. 내 한마디면 네 동생은 무사할 수 있다. 네 동생이 친척 집에 가있다는 것을, 샤를로테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내가 도와주지.”
켈빈 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도와준다는 말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생과 함께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그 순간 켈빈 부인의 텅 빈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몸을 힘겹게 일으켜 철장 쪽으로 가까이 가자 로웬은 그녀에게 하얀 가루가 담긴 병을 건넸다.
“그 약을 먹어라. 너를 빼낼 수 있도록 도와줄 약일 테니까. 궁의는 내가 매수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저, 저를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나야말로 묻지. 너, 왜 로젤리아에게 죄를 덮어씌운 거지?”
켈빈 부인은 대답이 없었다. 로웬은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로젤리아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와주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목을 베고 싶었지만…릴리에게서 켈빈 부인의 어린 동생을 로젤리아가 무척이나 아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을 켈빈 부인이 몰랐을까? 사교계에서도 동생을 아끼기로 유명하다던 이 여자가, 동생에게 잘 대해준 로젤리아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어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샤를로테는 임시 황후지만 황후는 황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오거나…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고 싶었습니다.”
로젤리아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죄책감이 뒤따랐다. 하지만….
“제가 다시 상황을 뒤집으려 했어요. 사실은 샤를로테가 로젤리아님을 너무도 싫어했고, 그래서 일부러 스스로 독을 삼키고, 로젤리아님에게 뒤집어 씌우도록 지시했다 말하려 했습니다.”
“이미 한 번 거짓말을 한 자의 말을 누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나?”
로웬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켈빈 부인은 치마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날붙이였다.
“믿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서라도 믿게끔 하려고 했습니다.”
켈빈 부인은 아직도 그때의 참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의 시녀였던 아이가 쫓겨나는 건 사교계에서 거의 배척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부모님도 죽고 남편도 죽었다. 과부 또한 사교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니 동생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티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초대를 거절하면 더 우스운 꼴이 될 것만 같아 참석했지만, 역시나 자신과 라벨을 헐뜯는 말뿐이었다. 그때 로젤리아가 티파티에 직접 왔다. 황후가 사적으로 만들어진 티파티에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로젤리아는 라벨이 다시 사교계에 복귀할 수 있도록 일부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라벨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결코 로젤리아의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정하게 말을 건네준 그녀에게 언젠가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로젤리아가 독을 넣으라 시켰다고 자백한 일이 철회되지 않은 것은, 본인이 밝히려던 시점에 갑작스레 노예시장 사건이 터지면서 그 일이 어느 샌가 조용히 묻혔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추가적으로 조사할 것인지 덮으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사건을 다시 들추어서, 샤를로테를 곤경에 처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샤를로테가 오늘 감옥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테의 살벌한 협박 뒤, 로웬이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켈빈 부인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로웬은 자신이 건넨 약병을 가리키며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내가 계획을 하나 세우고 있다.”
“…계획?”
“로젤리아는 모르는 계획. 그 일에 네가 도와줬으면 한다.”
“샤를로테를 끌어내릴 수 있을 만한 그런 계획인가요?”
“끌어내릴 수밖에 없는 계획이지. 그러니, 그걸 마셔. 그것을 마시면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것으로 알겠다.”
켈빈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병을 집어 들었다.
흐릿한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잠시 머뭇거리다 병에 든 약을 모두 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로웬은 죽은 것처럼 쓰러진 켈빈 부인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조용히 감옥을 빠져나왔다.
***
효력은 1시간 정도라고 했다. 이제 슬슬 기사들의 훈련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는 곧바로 감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 아래에서 보니….
‘확실하게 그 얼굴이 드러나는군.’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꽤나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누빈 그는 남자의 얼굴에서 달갑지 않은 누군가의 얼굴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일부러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건넸다.
“핏빛의 로브를 뒤집어쓰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낫겠지.”
애초에 기사복과 낡은 로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일부러 눈에 띄지 말라고 여분의 기사복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흰 기사복과 핏빛색의 로브? 눈에 띄고 싶어서 아주 작정했군.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셨습니까?”
남자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망토를 대충 걸치면서 감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네가 건넨 약을 먹였다. 훈련은 곧 끝날 테니 누군가는 켈빈 부인을 발견하겠지. 정말로 독이 아닌 게 확실한가?”
“네.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약일뿐입니다.”
로웬은 아까부터 계속 욱신거리는 가슴을 꾹 누른 채 황궁 출구 쪽에 미리 대기시켜놓은 마차로 향했다. 그러다 식자재를 운반하던 시종과 물품을 체크하는 보좌관의 무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투명 마법 같은 것은….”
“그런 동화적인 마법은 없습니다. 로젤리아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쌍둥이는 쌍둥이신가 봅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로웬은 대충 눈으로 사람들의 인원수를 파악했다. 보아하니, 황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아니었다. 상단에서 따로 배달을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저 보좌관은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그 사이에 마차에 올라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럼 당당하게 걸어가던가. 나는 로젤리아처럼 섬세하지는 않으니 바로 말하겠다만, 지금 그 얼굴. 확연하게 티가 나는데.”
그제야 남자는 손끝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일찍 말해주시면 좀 좋습니까.”
“새하얀 기사 복에 핏물이 밴 듯한 로브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것과 이것은 별개죠.”
남자는 곧바로 망토로 벗었다가 다시 걸치면서 마차 쪽으로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그 사이 로웬은 보좌관에게 가볍게 농담을 건네며 그가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게 왜 따라온다고 해서 저러는 것인지.
십분 정도 뒤 로웬이 마차를 탔을 때, 그는 망토를 벗고 또다시 핏빛 로브를 걸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사람을 마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쪽일까.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시선을 뗀 채 로웬은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미리 매수해놓은 궁의가 일을 잘 처리할 지 생각하던 찰나,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그러지?”
“타인을 쉽게 도와주는 것인 유전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로웬은 고개를 기울였다.
“모르겠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로젤리아님이나, 그쪽이나. 이미 알만한 것은 다 아는 상태잖습니까.”
…저라면 안 도와줬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순간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덕분에 목소리의 반이 묻혔지만 로웬에게는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네 정체를 알았을 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다. 하지만 내 계획을 위해서는 네가 필요해.”
“….”
“그리고 로젤리아가 너를 퍽 아끼는 듯해서 내버려 둘 뿐이다.”
“…네?”
“어제만 해도 네 얘기를 하더군. 최근 외출을 자주 하는 것 같다고.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은데 아침 일찍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니 마주 앉을 시간이 없다고 말이지.”
“그런 얘기를 하셨군요. 의심을 사지는 않았겠죠.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실수로라도 제가 어디를 갔는지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말할 생각도 없다. 일을 그르치기 싫고, 로젤리아에게 혼나고 싶지 않거든.”
남자는 말없이 망토 끝을 만지작거리자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하게 말했다.
“많이 닮았습니까?”
“뭐?”
“딱 보면 떠오를 정도로, 닮았냐고 물었습니다.”
로웬은 다시 한 번 남자의 얼굴로 똑바로 마주했다. 많이 닮았냐는 물음에, 대답은…‘그래’였다. 하지만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해보였고, 무엇보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결국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남자도 그것을 원했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로웬은 마차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남자에게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내일 밤에도 만났으면 하는데요. 가능합니까?”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짧게 몇 마디를 나누고는 로웬이 먼저 대공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다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로젤리아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묻겠지, 왜 함께 있었냐고. 그러니 최대한 빨리 흩어지는 게 좋았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다 로웬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이름.”
“?”
“네 진짜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천천히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했다.
“루치아노.”
남자는 뭔가 이물질을 뱉어내는 것 마냥 인상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루치아노, 안케도니아….”